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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 안의 작지만 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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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발달하여 활자가 대중적인 매체로 자리 잡기 이전까지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입으로부터 또 다른 누군가의 입으로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그 생명력을 이어오곤 했을 것이다. 그 옛날의 이야기들은 이렇게 구전(口傳)되는 와중에 그 상황과 이야기꾼에 따라 매번 달리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이렇게 ‘아’ 다르고 ‘어’ 달라지는 방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이야기들의 처지를 떠올리다 보면, 어쩌면 이 태초의 ‘생존방식’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러니까 이 기술복제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극복’되지 않고 있는 이야기의 어떤 속성을 예고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야기란 것은, 그것이 어떤 매체를 입고 있건 간에, 애초에 그 세계를 듣거나 읽는, 혹은 보는, 어떤 수용자와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그 구체적인 만남과 동시에 발생하는 무엇이기에, 그것이 생겨나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단 한 번도 같은 모양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볼 수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리 표현되거나 수정되는 ‘적극적인’ 창작과 각색의 과정 이전에, 태생적으로 달리 읽거나 읽히는 방식으로만 존재하는 무엇이며 이로부터 시작되는 무엇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이 ‘읽기’라는 과정은, 그저 만들어진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동시에 만들어가는 무엇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오늘 이 지면을 빌어 소개하고자 하는 ‘자큰북스(대표 김해리)’는 2013년에 설립되어 6년째 운영되고 있는 희곡전문출판사로, 출판과 더불어 희곡에 대한 다양한 ‘읽기’ 방식 또한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희곡의 감상 및 공유 가능성의 지평을 다양화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귀여운 탄생 비화를 살짝 공유하자면 - 젊은 동료 작가들이 연이어 절필을 고민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목도하며 - “펭귄출판사를 능가하는 물개출판사!”라는 포부를 품었고, - 이름은 달리하게 되었지만 - 그것이 결국 실현되고야만 아름다운 사례이기도 하다.
극작과 연출을 겸하지 않고 희곡 집필만 하는 작가들의 경우, 공연 제작이 가능한 극단에 속해 있지 않은 이상, 한 프로덕션을 만나 그 글을 무대화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기도 하거니와 그 가능성이 애초에 제한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희곡을 출판하거나 발표할 수 있는 기반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연극/출판계의 현실은, 비단 작가들의 설자리만 좁아지는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극작을 겸하지 않고 무대화 위주의 작업을 하는 연출가들 또한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극히 드물어 어려움을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해리 대표는 이들이 만나 서로의 생각과 작품을,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잦아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하철역과 동네 카페와 같이 대학로를 벗어난 일상의 공간에서 희곡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하였고, 이에 카페와 바에서의 낭독공연과 더불어 예산이 허락할 경우, 작지만 큰 무대라는 취지를 담아 희곡을 무대화하는 ‘자큰무대’를 기획하였다고 한다.
2019.6.17. 리딩파티 @카페 하루키
희곡을 접해보지 않은, 또는 연극을 본 적이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 연극의 저변을 넓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와중에, 창작자가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리딩파티’를 기획하게 되었고, 어느새 이를 3년째 진행해오는 중이다. 희곡을 출판하여 판매하는 과정 가운데 희곡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로부터 상황과 배경이 충분히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점, 인물들의 대화로만 내용이 진행된다는 점, 따라서 인물들과 이들 간의 관계를 그리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는 점 등의 형식적인 피드백을 받게 되었고, 이에 ‘리딩파티’에 참여하는 전원이 희곡을 함께 읽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보다 직관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방식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파티에 참여한 모두가 돌아가며 한 대사씩을 읽어보기도 하고, 그룹과 역할을 나누어 읽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산책을 하며 희곡을 읽어보기도 하는 등, 작품에 따라 여러 읽기 방식을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참여자들의 작품에 대한 이해가 다층적이게 될 뿐만 아니라 창작자들 또한 기존에 생각지 못한 결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 역시 빈번하다고 한다.
김해리 대표는 이렇게 독자들이 함께 모여 작품을 읽고 공유하는 ‘리딩파티’를 여러 프로그램으로 다각화하여 서울과 대학로에 집중된 연극의 인프라를 전국의 책방과 도서관, 그리고 살롱 등으로 확장하고자 구상중이다. ‘리딩파티’의 진행방식 체계화와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진행자 양성을 시도하여 희곡 집필 작가와 진행자 배우에게 소정의 금액이지만 사례비를 지급하여 예술인 자생의 한 축이 될 수 있었으면 하고, 책 한 권을 계기로 한 ‘작지만 큰’ 만남을 통해 일상 속에서의 ‘연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당장 실행하기엔 어려울 수 있겠지만, “해야겠다”는 책임감보다는 “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기에 약 3년 정도의 계획을 세워 애플리케이션 플랫폼 구축 등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2019.6.17. 리딩파티 @카페 하루키
생각해보면 희곡이라는 텍스트는 개인적인 독서의 경험을 통해서만, 혹은 무대라는 공간에서 상연되는 양식화된 공연을 관람하는 방식을 통해서만 감상될 수 있는 것이라 여겨져 왔던 것 같다. 반면 ‘자큰북스’의 경우, 희곡이란 텍스트가 관객과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지, 혹은 관객이 어떤 방식으로 해당 희곡과 작품을 ‘읽을’ 수 있는지, 그 방식에 대한 상상력을 여러 방식으로 펼쳐보는 중인 듯 보였다. 한 편의 연극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과정 또한 희곡이나 텍스트를 ‘읽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자큰북스’가 시도하는 읽기의 다양한 방식들은 연극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다양한 관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여러 공간에서 ‘작품화’되고 공유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 보였다.

*자큰북스의 리딩파티는 매달 셋째, 넷째 주 월요일 8시에 진행됩니다. https://www.facebook.com/zaknbooks/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송이원,손바닥 안의 작지만 큰 세계희곡출판사 자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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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제 162호   2019-06-2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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