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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극에 대한 생각을 하다 종종 떠올리게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필멸’ 두 글자인 것 같다(낯부끄러울 정도로 비장한 표현이긴 하지만). 끝나버리고야 마는 것, 그래서 사라져버리고야 마는 것. 어쩌면 연극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멈춤 없이 흐르는 시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기에, 무대 위 마지막 빛이 좁혀져 사라지는 마지막 암전에 이르기까지, 매순간 ‘사라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책상에서, 연습실 또 극장에 이르기까지, 연극을 만드는 매순간은 ‘잘 사라지기 위한 것’이어야 하려나. 만약 그렇다면 다소 상대적일 수 있는 ‘잘’은 차치하더라도, ‘사라진다’라는 동사는 또 무엇이라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아마도, 단순한 ‘없음’과는 다른 무엇일 테다.
“괄호 안에 들어간 극작가의 언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극을 떠받친다. 동시에 괄호는 쉽게 생략되는 지시문 같은 극작가의 현실적인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 “괄호” 동인 소개 中

오늘의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하는 “괄호”는, 김진희, 도은, 신효진, 이소연 네 명의 극작가가 함께 모여 이룬 극작가 동인이다. 비슷한 시기에 연극원 극작과라는 공간을 공유하며 강의실과 과방 등의 자리에서, 또 학교 안팎의 무대에서 서로의 활동을 지켜보던 이들은, 오며가며 각자의 물음표를 나누던 와중에 이 물음표들을 함께 또 본격적으로 ‘떠안아’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왜 극작가는?’, 그리고 ‘왜 연습실은?’, 그렇다면 ‘왜 연극은?’, 그래서 결국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이들은 눈앞의 질문으로부터 어떤 답을 찾아내기보다는 그 질문을 계기로 곧 이어지는 질문들을 계속 떠안으며 엮어나가고자 한다. 극작가, 연습실, 연극, 그리고 우리. 사람에 따라 꽤 일상적일 수도 있는 단어들인데 앞에 “왜”가 붙으니 어쩐지 심오해져버린다. 그렇다면 이 질문들은 어떻게 솟아오르게 되었을까. 또는, 이 질문들은 어디로부터 솟아오르게 되었을까.

근 20년 새 한국 연극의 창작환경은 미디어의 발달과 정치·경제 구조 및 일상 감각의 변화 등, 사회의 여러 조건들과 더불어 적잖은 변화를 겪어온 것 같다. 이에 비극적인 것부터 시작해 부조리한 것, 사실적인 것, 그리고 이른바 포스트(Post)하거나 퍼포먼스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연극은 여러 형식과 내용으로 ‘현실’을 담아내고자 시도 중이고, 따라서 그 텍스트 역시 드라마, 다큐멘터리 말하기, 당사자 발화, 공동창작이나 구성, 또 현장발생 등, 다양한 수단과 방식에 의해 창작되고 있다.

이렇게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양상들이 ‘연극’에 관여하며 공존하는 가운데, ‘새로운’ 서사와 표현방식을 위한 여러 이름붙이기가 시도되고, 다양하게 붙은 이름들에는 곧 그만의 해석이나 관점이 덧붙기에 ‘새로운 것’과 더불어 ‘기존의 것’에 대한 다시보기 또한 지속해서 요구되고 있다. 다소 거칠은 분류일 수 있겠지만, 이른바 드라마의 장르가 고전적인 영역에 속하고, ‘신체/공간/사건/맥락 등을 두드러지게 하는 발화 방식의 모색’이 어떤 실험의 장으로 열려있다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인식이 대표적인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연극 현상과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극작가 동인 “괄호”는, 이름 그대로 괄호와 같은 형태로 이 담론의 장에 참여하고자 한다. 2020년, 대한민국, 그리고 연극/계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괄호”는 희곡을, 극작가를, 연극을, 그리고 희곡-극작가-연극이라는 망과 관계 맺는 자신들을 물으며 이 모든 것들이 어떠한 말과 생각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따라서 어느 곳에 어떠한 응답으로 흘러야 할지를, 그래서 또다시 그곳에서 어떠한 물음표로 떠다녀야 할지를 확인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무대에서 상연되는 공연을 전제로 쓰인 문학작품’으로 정의되곤 하는 희곡은, 오늘날 점차 문학작품의 형태로 읽히기보다는 무대에서 상연되는 방식으로 감상자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신춘문예 희곡 부문의 신예 발탁 지면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본지 “연극in”의 “10분 희곡” 코너가 한동안 운영되지 못한 것이 그 현상의 한 면이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편, 연극이라는 장르 및 제도적 공간에서 희곡과 극작가는 어떤 곳에 자리할까.

이 지점에서는 “괄호”의 네 작가 모두가 ‘신진’이라는 위치에 분류된다는 점이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 같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실험과 신진이라는 두 단어는 별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듯 보이며, 실험이란 과정은 신진의 창작자들에게 종종 요구되고 권장되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실험과 희곡이라는 두 단어는, 과연 실험과 신진의 쌍만큼이나 척하고 붙어버리는 조합일까. 다시 말해 ‘신진 극작가’와 그 창작물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은연중에 어떤 기대를 투사하고 있을까. 이 같은 생각은 어떤 제도/담론적이거나 따라서 경제적인, ‘신진 극작가’의 활동기반과 일상의 환경을 위해 무엇을 마련하고 있는지 한 번쯤 자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공감하는 방식으로든 혹은 대항하는 방식으로든, 어떤 보편을 건드릴 수 있게끔 적절히 직조되어야 한다는 희곡 텍스트에 대한 요구 - 이는 극작이라는 영역에서 종종 ‘신진’의 창작자로부터는 성취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것도 같다. 또 다양한 예술 언어와 창작 방법론에 대한 실험으로 연극의 경계를 질문하여야 한다는 신진 창작자에 대한 요구 - 이는 신진이라는 영역에서 종종 ‘극작가’의 존재를 경계에 위치하게끔 하는 것도 같다.

이처럼 다양한 실천 및 담론의 양상이 공존하는 가운데 상대적인 관점에서는 제각기 모두 적절하고 타당한 ‘연극’에의 잣대이자 고민일 것이다. 하지만 이 네 명의 극작가를 정의하는 단어나 위치들은, 이들을 정의하는 동시에 서로 상충하며 앞선 ‘희곡’의 정의만큼이나 여러 경계들을 마주하게 한다. 신진 연극 창작자이자 극작가이고, 또 보편의 인간이자 여성이란 소수의 위치에 자리하며 그 삶과 표현의 방식을 찾는 이들은, 어디에 어떻게 자리하여야 할까.
  • 도은
  • 신효진
  • 이소연
  • 김진희
이 복잡다단한 현실 가운데 극작가 동인 “괄호”는, 경계적인 자신들의 상태 그 자체를 희곡이라는 무대(언어)로 드러내며 맞닿음의 지점들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눈앞에 보이거나 발화된 문장에 대해 늘 긴장을 유지하며 수정과 변경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괄호는, 눈앞에 드러난 자명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잠재적이라는 차원에서 긍정성을 내포한 어떤 상태일 것이다. 연극이 그 끝으로 향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늘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달리 보자면, 그렇기에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어떤 시작의 순간에 무한히 연관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앞 문장과 뒤 문장 사이의 괄호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질문해나가는 “괄호”의 언어가, 자명해 보였던 ‘시작’과 ‘끝’, 그리고 ‘앞’과 ‘뒤’ 그 양편에 어떤 열림으로 존재하게 될지, “괄호”의 드러남과 사라짐의 방식에 대한 호기심과 응원을 보내며 글을 마친다.

*극작동인 ‘괄호’와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다음의 주소를 통해 인터뷰 내용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QctSZ7REwpVtaGlcBGMLa-buFTP45KJgYY8fUfLNRnY/edit

 

태그 “괄호”, 동인, 송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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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제180호   2020-06-0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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