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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가치의 충돌이다
[최윤우의 연극 미리보기] 국립극단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최윤우_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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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배경을 막론하고 권력을 쟁취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가져야할 필수조건이 있다면, 비이성적인 논리에 대한 자기합리화나 편협함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말을 해도 닫힌 귀는 열리지 않고, 본질보다는 현상에 머문 동어반복으로 대화는 단절된다. 간혹 부침이 생겼을 땐 인과관계와 상관없이 ‘대의’를 위한 것이라는 명제만 수식해주면 되는 것이다. 도덕성은 결여되고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된 상황에서도 이와 같은 지난한 역사는 지금도 반복, 재생되고 있다. 왜 인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와 존엄에 대해 망각한 채, 마치 만년을 사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변화의 지점은 없는 걸까?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속에 그 숨은 비밀이 있다. 연극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며 전쟁을 일으켜 살상과 파괴를 일삼는 이들(남성)과 거친 땅을 새롭게 일구며 이전보다 나을 내일을 켜켜이 쌓아가는 화전민(여성)들의 대립과 갈등을 축으로 삶의 본질과 맞닥뜨리게 한다. 개국을 위함이라는 허명 속에 빠진 이들과 묵묵히 땅을 일구는 이들의 삶의 태도와 행위를 들여다보자.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폐허의 땅에 진정한 생명을 이어가는 불변의 가치가 숨어 있다.

  •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나라를 세운다는 미명 하에 전쟁과 살상을 자행하고 노동 없이 먹을 것을 축내기에 바쁜 남자들과 양식을 나누고 가족을 만들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는 진실하고 원초적 삶을 추구하는 화전민 여인들의 서로 다른 삶을 통해 인간의 존엄한 생명력과 불변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작품이다. 2013 국립극단 가을마당 창작희곡 레퍼토리 첫 번째 작품으로 공연되는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창작희곡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대서사시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시대미상? 지금 우리시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새로운 국가의 왕이 되고자 하는 도령이 전쟁을 일으켜 강 너머 적들과 대치하고 있다. 하지만 전투도 없이 국경에서 강을 마주하고 지내는 날들만 길어지고 그 사이 군대는 밥만 축내고 있다. 게다가 대장군 휘하의 군대는 도령에게 충성하지도 않는다. 그는 대장군과 반대세력을 처단하고 왕이 되기 위해 지식 관료 계급인 유자를 이용하고 급기야 왕은 열매에서 태어난다는 개국신화 ‘열매론’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무당은 거짓으로 ‘가랑이 사이로 피 흘리는 여인은 역심을 품었다’ 하며 모두 죽이라 예언하고 왕은 월경을 금지하기에 이른다.

    한편, 전쟁터에서 화전을 이루고 사는 여인들은 전쟁으로 지친 병사들에게 씨종자와 길양식 등 먹을 것을 빌려주고, 그 담보로 칼과 창 등 무기를 받는다. 화전민과 병사들은 나흘 뒤 만나 무기와 씨종자를 교환하기로 약속하며 여인들은 병사들이 지키던 진지를 움막 삼아 일을 하며 지낸다. 마침 커다란 천이 있어 진지의 지붕을 덮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적의 깃발이었다. 이를 계기로 여인들은 전쟁터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도둑으로 몰린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데올로기에 눈멀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남성으로부터 야기된 비극적이고 참혹한 전쟁이 시작된다.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상반된 두 세계를 보여준다. ‘도령’으로 대변되는 ‘남성’이 권력 안에서 삶을 파괴하는 존재이자 죽음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면 ‘화전민 여인들’은 자신의 삶을 내어주면서 삶을 지켜내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권력을 위해 거짓 예언을 만들고 한 달에 한번 월경하는 여성의 삶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탄생의 근원을 거부하는 등 극단으로 치닫는 남성들과 달리, 의도치 않게 전쟁에 휘말린 여인들은 극한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먹이고 씨종자를 나눠주며 다시 밭을 일군다. 그렇게 다시 살아가야 할 삶의 근간을 지켜가는 것이다.

    시대미상時代未詳의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이 작품의 서사는 남성 중심의 ‘개국신화’라는 허상과 위선 속에 가려진 진실, 즉 가족을 만들며 다음 세대의 미래를 내다보는 여성들의 원초적 삶을 대변한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 시대미상의 과거, 무지하고 비극적인 시대의 아픔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시대와 중첩된다. 극단적인 희곡 속 사건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접목되지 않을 뿐, 시대를 품고 있는 거짓된 진실과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비이성적인 권력, 그로 인해 인간의 가치와 존엄이 사라지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시대적 현상이 그렇다. 우리는 과연 어떤 시대 속에서 어떤 가치를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중요한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가? 허구적 상상력 속에 펼쳐진 알 수 없는 전쟁터를 통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질문이 바로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는 이유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폐허의 땅 위에 생명을 맺는 여인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원전유서> <풍찬노숙>에 이은 김지훈 작가의 개국신화 3부작의 정점이라고 말한다. 4시간이 넘는 공연시간으로 할 말 다 풀어낸 김지훈 작가의 용감무쌍함이 ‘창작희곡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과 함께 연극무대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 작품의 서사구조만으로도 갖게 되는 기대 역시 남다르다. 게다가 진중하고 묵직한 질감의 소극장 연극을 만나보기 힘들었던 최근 <그게 아닌데>로 상징과 압축, 연극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진한 연극성을 선보였던 김광보 연출과의 만남은 그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작품의 배경과 관점에 주목해보자. ‘개국신화’는 새로운 시대의 갈망과 동시에 핍진한 세상에 대한 구원을 바탕으로 한다. 죽음과 공포, 희망을 잃어버린 폐허의 땅에서 꺼지지 않는 생을 연명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나 시대를 구원할 영웅을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극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세상에는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 어떤 영웅들이 정해진 운명과 신탁에 의해 악을 징벌하고 새로운 왕이 되거나 혹은 죽음으로 사라진다. 영웅이 사라진 그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이 왔고, 악은 사라졌다.

    개국신화 속 서사구조에서 이러한 흐름 속에 늘 새로운 인물이 세상과 맞서는 인물로 나서는 것과 달리,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이미 그 삶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들을 불러낸다. 어떤 특별한 능력과 힘을 가진 이들이 아니다. 그저 그 삶 속에 살고 있다. 연극은 바로 그러한 여인들을 통해 폐허가 된 땅에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 어떤 권력도, 그 권력에서 나오는 공권력도, 세상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싸움도, 불변의 가치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진실을 드러낸다. 연극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 연극적 담론을 확장하고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더 깊은 파급력을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원더풀 초밥
  • 일시 : 11월27일(수)∼12월8일(일)
    화∼금 19시30분 / 토,일 15시 / 월 쉼
    장소 :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작 : 김지훈 연출 : 김광보
    출연 : 이호재, 길해연, 이승주, 오영수, 김재건,

    정태화, 황석정, 김정영, 최승미

    문의 : 1688-5966 / www.ntc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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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우

최윤우 연극평론가. 본지 편집장
월간 [한국연극]에서 편집장, (사)한국소극장협회 정책실장으로 근무했으며 공연예술 관련 매체에서 필자로 활동하고 있다.
E-mail parodia@naver.com
웹진 36호   2013-11-2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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