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top

연극인

검색하기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극단 물리 <서안화차>

김슬기_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연극, 낮은 목소리

    2003년 초연 이후, 9개 연극상을 석권하며 세 차례 재공연을 갖고 십여 년 만에 돌아온 작품. <서안화차>는 그간의 세월이 무색할 만큼, 어느 한 구석 퇴색한 느낌 없이 완벽하게 현재적이고 보편적인 공감대 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몇 차례 대본을 다시 읽어봐도 참으로 잔향이 짙은 작품이라 가슴이 서늘하다. 놀라운 것은 이야기만이 아니다. 인간 내면의 욕망과 집착에 대한 도발적인 서사는 진시황릉의 토용들로 시각화되고, 무대미술과 조명, 음악까지, 모든 감각들이 쫓고 있는 인간의 그늘진 환상은 연신 객석을 향해 거친 숨을 뱉어낸다. 그리고 그 외연에는, 달리는 기차의 차창을 서성이며 상념에 젖은 한 사람이 있다.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2008년 극단 물리가 창단 10주년을 맞아 <서안화차>를 재공연할 당시 연출가 한태숙은 인터뷰에서 만나 이렇게 이야기했다. 연극은 꾸준하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인간이 인간 앞에서 영혼의 무게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무대가 연극만의 힘이라고. 고대의 진시황에게나 지금 우리와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삶은 똑같이 유한하고, 인간은 그 유한한 삶을 붙잡고자 한없이 욕망한다. 하지만 연출가 한태숙이 무대 위에 불러 세운 인간은 단순히 욕망하는 인간을 넘어선다. 그는 그 한갓된 욕망을 현기증이 나도록 반추하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그것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을 인정하는 것인지 혹은 부정하는 것인지, 연극이 부추기는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 흙이 되어 사라질 욕망

    연극 <서안화차>는 중국 서안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은 상곤의 기억이 불러낸 이야기다. 상곤은 죽음마저 정복하려 했던 진시황의 욕망에 이끌렸다. 지하 용갱을 가득 메운 병마용들은 가히 병적이라 할 만한 진시황의 집착으로 상곤을 압도했으며, 상곤은 그로부터 자신의 조각 작업에 영감을 받길 원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하지만 지금 그는,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그곳을 향해, 예상보다 더 빨리, 더 고통스러운 마음을 안고 떠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따라 진저리치도록 벗어나고 싶었던 과거의 조각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이민다.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어린 시절 상곤의 어머니는 매일 밤 다른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인다는 추문에 휩싸여 있었고, 상곤은 어머니의 남자를 죽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이후 남자를 욕망하는 상곤에게 어머니는 줄곧 ‘남자’로 살 것을 요구했지만 상곤이 원했던 것은 폭력적이고도 위압적인 찬승이었다. 대야의 물빛에 어른거리는, 붉은 기운이 도는 그의 발이 예뻤다… 그게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기다리고 부탁하는 건 언제나 상곤의 일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두 사람. 상곤의 의식은 혼란스럽다. 그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는지도, 복수를 하고 싶었는지도, 어쩌면 극복하고 싶었는지도, 혹은 말 그대로 그를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죽고 없어져도, 진시황을 지키는 병마용처럼 천년, 만년을 살게 하고 싶었던 사람, 너무나 간절해서 사랑하는 이를 조각틀 속에 집어넣고 세찬 불길 속에 담금질해 토용으로 만들어버린 남자의 이야기. 아, 도대체 왜! 이 연극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토록 고통스러운 질문을 남기는 것인가! <서안화차>의 전체 구조는 욕망과 집착의 이중주가 빚어내는 비극과 그로부터 연유하는 카타르시스를 중단시킨다. 그런데 바로 그 중단으로부터 이 연극의 놀라운 힘이 발현된다는 사실. 상곤은 이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아 전진할 것인지, 영원으로 회귀할 것인지 그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진짜 진시황릉으로 가는, 화차(火車) 안에 있다. 남은 것은 무대를 가득 채운 토용들과 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인간들, 그리고 언젠가 흙이 되어 사라질 욕망들뿐이다.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이 연극에는 상곤의 마음과 나란히 대꾸를 이루며 세상 만물을 굽어보는 듯한 진인의 대사가 몇 차례 이어진다. 그는 의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쾌락, 결국 고통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을 노래한다. 몇 년 전, 처음 <서안화차>를 봤을 때, 그의 목소리가 오래오래 귓전을 맴돌았던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은 배와 같고 어떤 사람은 물과 같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전복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 처절한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극장으로 간다.


  •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 일시 : 5월22일(목)~6월1일(일) 평일 8시 / 토 3시 6시
    / 일 3시 / 월 쉼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작, 연출 : 한태숙
    출연 : 박지일, 이명호, 지영란, 최일화, 윤현길, 조명운, 최순진
    문의 : 02-589-1002

[궁금하다 이 연극] 함께 나온 기사 보기

탐하지 마라, 미련도 두지 마라

극단 물리
<서안화차>

혁명은 왜 실패했을까

명동예술극장
<줄리어스 시저>

태그 극단 물리, 탐하지마라, 서안화차

목록보기

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44호   2014-05-22   덧글 0
댓글쓰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