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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렇게 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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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윤상화가 연습실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대본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이제 막 한 차례 연습이 끝나고 주어진 5분간의 쉬는 시간이 그렇게 흘러간다. 가만히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어쩌면 그 역시 그 순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방금 연습을 끝낸 장면에서 그는 울음을 참아내느라 마지막 대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연출은 울지 말라고 주문했건만 묵묵히 감당하기엔 그 감정의 무게가 너무 육중하다 한다. 차마 편한 다리를 하고 쉬어갈 마음조차 허하지 않는 이 작품, 너무 진짜라서 연극으로 재현해내는 것이 감히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은 이 작품, <미국 아버지>가 무대에 오른다.

우린 이렇게 망한 걸까

드라마와 현실의 간극, 이것이 연극이다

이 극은 2004년 어느 날,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가 어느 대학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대자보로부터 출발했다. 자보의 내용은 미국인 마이클 버그가 영국의 전쟁저지연합에 보낸 장문의 편지 한 통을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그 몇 달 전, 마이클 버그의 아들 닉 버그는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해 참수 당했고, 바로 그 순간에도 미국은 이라크와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편지는 논리적이면서도 명쾌했고 심금을 울렸다. 혈연관계를 넘어 인류 전체를 사유하는 인간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작가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기를 어느덧 7년. 더 이상 쓰지 않으면 이제는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고. 어쩐지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꽤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초고가 나왔을 땐 격앙된 목소리들이 고스란히 대사가 되어 있었고, 연극으로 올리기에 작품은 몹시 뻑뻑했다. 1년쯤 후에 수정해 나온 두 번째 버전 역시 리딩을 해보니 극이 진행되기엔 여전히 무리가 있었다. 다시 1년, 어느 정도 객관화된 시선을 입힌 세 번째 대본이 마침내 2013 공연예술 창작산실 대본 공모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작가는 미국에 다녀왔고 지금 공연될 버전의 대본이 완성되었다.

“일반적인 드라마 형식을 적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을 두고 작품을 수정했다. 작가 개인적으로 이것을 잘 재현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게 옳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제대로 해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드라마일 뿐,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건 자명했다.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다녀오고 난 이후 고쳐 쓴 대본과 그 이전 버전에 차이가 크다고 느낀다. 오히려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담백하게 인정하는 것, 그게 내가 취해야 할 태도라는 걸 알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인물은 극 안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만, 마이클 버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 간극, 그것이 결국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연출가 장우재

우린 이렇게 망한 걸까

분노, 그 너머의 진실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했지만, 극 안의 인물과 이야기들마저 진짜가 될 수는 없었다. 결국 이 잔혹한 현실의 낭떠러지에서 아들을 잃게 될 아버지 빌은 자본주의와 전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저주하며 살아간다. 한 마디, 한 마디 그가 내뱉는 말들은 때론 속이 후련하게 폐부를 찌르고, 가끔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꼬집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하지만 그의 분노에 위안이 되어줄 것은 오직 술과 마약뿐이다. 맨 정신으로 현실을 버틸 수 없는 그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의 자신과 그가 사랑했던 여인 ‘낸시’, 그리고 ‘낸시’를 가로채갔으나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간 친구 ‘데이빗’이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빌은 몇 번이고 그들에게 총을 쏘아댄다. 분노를 장전한 그의 총질에 그들은 죽어도 죽지 않고, 죽었다가도 살아나길 반복한다.
반면에 그의 아들은 마냥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버지 얘기가 근거 없는 원망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로 세상이 온통 엉망진창인 걸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떠났다. 분명 세상엔 그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상은 그대로일까.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과연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되었을까. 만약 지금으로부터 10년이 또 지나도 여전히 그대로라면? 아니… 더 나빠진다면?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랬지만 최근 만나는 많은 연극인들이 작품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통적으로 꺼내는 슬픈 화두가 하나 있다. “작품 하기 좋은 시대야.” 아, 작품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나 또한 이 무거운 시대를 견딜 수가 없어 글이 자꾸만 산으로 간다. 장장 4년여에 걸쳐 작품을 수정해야만 했던 작가의 고뇌는 오죽했을까. 하지만 마감이 내일모레이므로, 감정을 한 단 접고 이쯤에서 배우 윤상화의 말을 빌려 글을 마무리할까 싶다.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땐 뭔가 젖은 솜방망이로 후려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인물이 무겁다기보다는 감정이 무거운 연극이었고, 배우로서는 상당히 욕심이 났다. 내가 연기자로서 이 무거운 감정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부딪혀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세니까 극이 잘 진행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솔직히 이쯤 되면 연극이 더 이상 무슨 얘길 하겠나 싶다. 빌이라는 인물이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분노만으로도 벅찬데, 세상은 망해가고, 그 정점에서 아들이 죽는다. 그리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손자한테까지 이상이 생긴다. 문제는 지금의 내가 분노를 표현하기에 급급하다는 거다. 사실 표현하지 않아도 보이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힘을 많이 쓰게 되고 쉽지가 않다. 하지만 이렇게 센 이야기를 비껴가지 않고 정직하게 돌파하는 것, 그게 이 작품의 매력이 아닐까.” - 배우 윤상화

이 연극은 실제 마이클 버그가 전쟁저지연합에 보낸 편지로 막을 내린다. 취재를 나간 날도 그랬다. 그렇게 마지막 장면의 연습이 끝나고 잠깐의 알 수 없는 침묵 후, 배우들은 부지런히 연습실을 정리했다. 아마도 스스로의 내일을 위해서, 그리고 연습실을 사용할 다음 팀을 위해서. 한데 그 모습이 지금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현실과 너무나 섬뜩하게 닮아 있어 기묘한 위안이 찾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자신을 돌보고 서로를 보듬으면서. 이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인 장우재는 끔찍한 비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곁에 있어주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냥 그렇게 안고, 사람들이랑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저, 세상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당신들과 함께 나란히 앉아 이 연극을 보고 싶다.

[사진: 바나나문프로젝트 제공]

미국 아버지 포스터

일시
10월 30일~11월 8일, 평일 8시, 토일 3시, 월 쉼 (11월 13~22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장소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작·연출
장우재
연출
윤상화, 이동혁, 이기현, 이정미, 박기륭, 김경익, 김동규, 김정민, 강선애, 정원, 심원석, 강병구, 곽정화, 고광준
문의
764-7462

태그 우린 이렇게 망한 걸까,극단 이와삼,미국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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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54호   2014-10-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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