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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이 끝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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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죽는다. 보부아르는 한 소설에서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을 그렸다. 이것은 그 소설의 제목이다. 불멸은 인간을 현혹한다. 언제고 그것이 문학과 예술의 소재가 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우리는 그 영원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무한함은 결코 체득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그것은 유한한 것의 반대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죽음을 안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는다. 여기, 자신이 1만4천년의 시간을 살아왔다고 말하는 사내가 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근거는 없지만, 그것을 반증할 근거 또한 없다. 이 수수께끼 같은 사내의 존재는 그 자체로 인간 삶의 유한함을 말해줄 뿐이다.

이번 생이 끝나지 않는다면

내가 늙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거야?

이야기의 플롯은 아주 간단하다.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던 존 올드맨은 종신교수직도 거절한 채, 어느 날 갑자기 학교를 떠난다. 그리고 존이 이삿짐을 꾸리는 동안 동료 교수 몇몇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의 집에 찾아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아니, 사실 이 작품에 ‘사건’이라 부를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한 사내가 여태까지 한 번도 누설한 적 없는 자신의 존재적 비밀을 동료들에게 털어놓을 뿐이다. 자신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 알아챌 무렵, 10년에 한 번씩 인생을 정리하고 삶의 터전을 이주해야만 하는 숙명.
2007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각색한 이 작품은 놀랍게도 꽉 짜인 대화의 긴장감만으로 극을 이끌어간다. 콜럼부스와 함께 항해를 하고 반 고흐에게 그림을 선물 받았다는 소설이 어디 가당키나 한가? 세상에! 당신이 크로마뇽인이라고? 그런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자꾸 그럴 법하게 만들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으니 큰 설전을 벌일 법도 한데, 이들은 미심쩍은 것은 질문하되,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1만4천년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싶어 하는 눈치다. 아… 인간…

그럴 리가 없잖아…

이야기가 절정에 달하는 것은 존이 붓다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감동받아 그것을 500년 동안 품고 있다가 로마 제국으로 들어간다. 자, 이쯤 되면 뭔가 슬슬 불안하다. 존은 그곳의 폭정을 목격하고 자신이 진리라 믿는 것을 설파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바로 예수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받은 죽지 않은 인간. 이것은 세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모반하는 것이고 그들의 정신적 뿌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가 신경쇠약이었으면 좋겠다. 이제 이들은 그에게 어서 이 모든 거짓말을 끝내라고 종용한다. 이것이 소설임을 인정하라고! 아… 인간이여…
원작 영화의 결말은 의외로 담백하다. 당연히 반전이 존재하지만 여운을 길게 남기기보다 무언가 SF다운 황망함으로 끝을 맺는다. 사실, 그것이 어떤 결말인지 너무나 쓰고 싶지만! 이미 상당한 스포일러를 흘렸으므로, 공연을 보기 전 이 글을 읽게 될 독자들을 위해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한다. 다만, 연극의 결말이 영화와 다르다는 점은 밝혀두어야겠다. 배삼식 작가가 고쳐 쓴 대본은, 역시나 연극이 가진 힘으로 인간의 실존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연극은 삶과 죽음, 그리고 이 모든 우주 만물의 유한함에 대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숭고한 우주의 무한함에 대하여 부박한 인간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번 생이 끝나지 않는다면

나는 만사천년을 살았습니다

“일부러 원작 영화는 보지 않았다.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 영화는 영화대로 매력적이지만 또 한편 굉장히 연극적이라고 하더라. 연습하면서 여러 차례 대본 수정을 거쳤고, 영화의 큰 줄기를 따라가되 설정은 조금씩 다르게 가져갔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한 번씩 주어진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무한함을 욕망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만사천년동안 살아온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별, 관계의 단절, 그런 고독과 아픔들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 무한함의 결핍을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중층적 의미들이 바뀐 결말에 드러나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연출가 최용훈

이야기의 강렬함과 더불어 연극 <맨 프롬 어스>를 기대하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은 중견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 호흡이다. 죽지 않는 사내 존 올드맨을 비롯해 5명의 동료 교수와 그 밖의 인물들까지 극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8명뿐이지만, 이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들은 모두 21명이나 된다. 심지어는 정해진 팀을 짜서 공연을 올리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볼 수 있는 앙상블의 경우의 수가 무려 1944가지. 게다가 우리는 만사천년을 살아 온 인간의 전형 같은 걸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서로 다른 존 올드맨 여현수, 문종원, 박해수 세 명의 배우가 차마 그들을 믿을 수도,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치명적인 매혹과 혼란의 인생을 연기한다.

이번 생이 끝나지 않는다면

[사진: 드림컴퍼니 제공]

맨 프롬 어스 포스터

일시
11월 7일~2015년 2월 22일, 평일 8시, 토 3·7시, 일·공휴일 2·5시, 월 쉼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극작
배삼식
연출
최용훈
출연
여현수, 문종원, 박해수, 김재건, 최용민, 이대연, 이원종, 손종학, 서이숙, 김효숙 외
문의
02-744-7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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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55호   2014-11-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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