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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아야 할 것은 말꼬리가 아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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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는 억울하다. 어릴 적 유치원에 판다 인형을 들고 가 선생님한테 보여줬더니, 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예쁘다, 다음에 또 보여줘.” 그래서 여자는 거의 한 달가량 매일매일 그 인형을 가져가서 선생님한테 보여줬다. 그쯤 되니 선생님이 “이제 됐어.”라고 했지만 여전히 얼굴은 웃고 있어서 계속해서 인형을 가져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선생님이 소리쳤다. “이제 가져오지 말라고 했잖아!” 여자는 너무 창피하고 억울해서 유치원에 나가지 않았고, 선생님은 사과를 하기 위해 집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그 판다 인형, 다음에 또 보여줘.” 진짜로 억울한 건 아이일까, 선생님일까.

극단 사개탐사 <억울한 여자>

적당히 맞춰 살면 되잖아

2008년 초연 당시 월간 <한국연극> BEST 7에 선정되고, 이듬해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억울한 여자>가 간만에 무대에 돌아왔다. 단언컨대,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다. 새삼스럽게 뭘 이런 걸 걸고 넘어져,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앞뒤 맥락을 따져보면 모든 게 부조리하기 짝이 없고, 버럭 짜증이 나다가도 금세 연민이 느껴져 서글퍼진다. 과연 모든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무작정 바보로 몰아붙여도 되는 것일까? 혹은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기 위해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위선자라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작품은 시종일관 따뜻하고 소박한 웃음을 둘러치고 메치면서 이것을 문제적 상황으로 직시해야 하는 우리의 비극을 증언한다.

정말 내가 잘못한 거야?

일본의 어느 한적한 소도시. 에너지연구소가 들어온 이후 인구 감소 현상과 더불어 코가 두 개 달린 코끼리가 태어났다는 둥, 벌벌 떨며 가을에 우는 매미가 나타났다는 둥 기이한 소문이 무성한 곳이지만, 정작 마을 사람들은 이런 얘기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카페에 모여 앉아 하릴없이 수다를 떨거나 시간을 죽이면서 소일할 뿐이다. 바로 이 마을에 억울한 여자가 등장한다. 그림책 작가 다카다와 결혼하기 위해 도쿄에서 이주해온 요코는 예쁘고 상냥한, 그리고 무엇보다 다카다와 가치관이 서로 잘 맞는 여자다. 다카다의 그림책을 보고 이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줄 거야, 라고 생각해 팬레터를 보낸 것을 계기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사연이 조금 특별하긴 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다면 요코가 어딘가 남다르게 끈질기고 집요하다는 사실. 그녀는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이고 되묻다가도, 막상 대답을 해주면 깜짝깜짝 놀라 사람을 당혹케 한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맑고 순수해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데, ‘커피 한 모금만 마시고 일어날게.’라고 말하고선 커피 한 잔을 마셨다고 기겁을 하니, 참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런 요코가, 마을에 나타났다던 괴소문의 정체 ‘떨매미’를 찾아 나선다. 그거야말로 네스호의 괴물 같은 건데, 사람들은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요코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코는 억울하다. “다 같이 가요!”라고 했을 땐 모두들 웃으면서 좋다고 해놓고선… 게다가 며칠 뒤, 실제로 마을에선 떨매미가 발견된다.

극단 사개탐사 <억울한 여자>

억울해 해봤자 소용없다고!

사람들은 빤한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손해를 보는 건 언제나 너무 진심인 쪽이다. 요코는 어린 시절 유치원 선생님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시작해, 살면서 자신이 겪었던 숱한 억울한 사연들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다카다와 극중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공연을 보던 관객들조차도 그런 그녀에게 완전히 질려버리고 만다. 그런데 말이다.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그것이 정말 그녀가 진상(?)이라서, 혹은 그 존재 자체가 그저 부담스러워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어찌하여 그 시절들을 다 겪고 나서도 그녀가 한 치의 깨달음도 얻지 못하였는지 답답하고 속상하다. 그렇게도 평생을 억울했으면서, 가끔은 눙치고 넘어갈 줄도 알고, 적당히 밀당도 하면서, 좀 더 정색하고 영악스러워지지 못했다는 것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살다보면 자연스레 시련에 대처하는 근육이 붙기 마련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단단해진다. 솔직함을 위시한 복수는 치졸하고, 당신도 나와 같았으면 좋겠다는 헛된 기망은 곁에 있는 사람들을 멀어지게 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을 향한 요코의 한 마디에 우리는 어떤 서늘한 불안함을 느낀다. “나 좀 이상해? 처음부터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 준 사람은 처음이야. 지금까진 그래서 잘 안 됐던 거 같아.” 그리고 그녀는 비로소 안심을 하고, 기운을 얻고, 작정을 하고, 다시 ‘이상한’ 짓들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고… 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붙잡아야 할 것은 말꼬리가 아니라 정신줄인 것 같은데. 이봐요, 당신은 이상하고도 이상해요. 물론 당신을 이상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훨씬 더 이상하긴 하지만. 그러니 더더욱 정신을 차리라고요!!!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극단 사개탐사 <억울한 여자> 포스터

일시
12월 18~27일, 평일 8시, 토3시7시, 일·공휴일 3시, 월 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쓰치다 히데오
연출
박혜선
출연
이지하, 박윤희, 류태호, 이선주, 김문식, 신문성, 이소희, 이지영, 염승철
문의
02-889-3561~2

태그 극단 사개탐사,억울한 여자,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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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58호   2014-12-18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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