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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비어 보여도 좋으니, 일단은 웃고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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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뭔가 망연하다. 아연하다. 문장 부호도 없고 띄어쓰기도 되어 있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보게, 선생. 소뿔을 자르고 주인이 오기 전에 어서 도망을 가게나.” 정도의 권유 혹은 명령인 줄 알았는데 웬걸.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 누군가의 호칭이란다. 하긴 그것이 권유이든 호칭이든 망연하고 아연한 건 마찬가지다. 어쩌자고 작가는 이런 제목을 써놓았을까. 그것도 ‘무협 액션 판타지’라는 간판을 걸고. 아, 눈부신 포스터의 입성도 빼놓을 수 없다. 정색하고 모범생다운 기사를 쓰면 오히려 좀 우스운 꼴이 될 것 같다. 하여, 내키는 대로, 글쓰기 원칙을 일탈하고 표준어를 이탈하여 상탈한 배우들의 무협액션판타지를 써제껴 보기로 한다.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수사극의 끝장을 보여주마

누군가 전국을 다니며 소뿔을 자르고 있다. 범인을 잡기 위한 수사가 한창인 취조실엔 “빙신, 육갑을 하네.”라며 용의자들을 겁박하는 경찰이 있고, ‘꽃무늬 머플러를 멋스럽게 목에 두른 가슴이 큰’ 순경이 있으며, 서울에서 낙하산 타고 내려와 ‘한 놈만 패는’ 취조를 하는 수사관이 있다. 어딘가에서 봤다 싶은 왼갖 캐릭터들이 다모여서 이것이 바로 본격 수사극이다 싶은 스토리를 전개시켜 나간다. 서울서 왔다는 그놈은 물론 시인 엘리엇쯤은 읽어주고, 그 와중에 반장은 미국 CIA로부터! 방금 도착한 의뢰 결과를 알려준다. 로맨스? 당연히 있고, 반전? 당연히 있으며, 범인은? 손에 땀을 쥐어야 하니 검거하는지 아닌지는 알려드릴 수 없다. 이 망연하고 아연한 제목의 작품을 쓴 작가 최치언은 바로 이 격하게 낯익은 있음직함에 대해서 유형성이란 설명을 덧붙인다. “너무 많이 생각하면서 보지 마시라구요.”

그의 당수엔 당할 자가 없었네

그런데 퐝당하게도 이 작품의 무대는 전구 하나 덜렁 매달린 경찰서 취조실이 아니라 사각의 링이다. 도대체 어떤 활극이 펼쳐질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구요? 아, 네, 암요. 이 경천동지하고 기상천외한 취조과정은 링 위에서 직접 목격하실 수 있습니다요… 각설하고,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무협액션을 넘나드는 이유는, 바로 범인이 맨손으로 소뿔을 잘랐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당수! 단 한 번의 맨손 내리침으로 소뿔을 자른다는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은 당수도의 창시자로 어느 날 돌연 종적이 묘연해진 인물이다. 그와 대적한 무술인들이 모두 재기불능 불구가 되어 무술계에서 당수도 자체를 파문시켜버렸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겐 당수도의 적통을 이어받은 베일에 싸인 제자 하나가 있었고,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럼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다?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무능한 권력과 부패한 정부에 대항하는 영웅은 누구인가

“지난 정권에 소 정국이 있었잖아요. 그 시대를 조롱하고 풍자해보고 싶어서 쓰게 된 작품이에요.” 이것은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을 쓴 최치언 작가의 말이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작가는, 작가라는 부류를 언어로 사기치고, 싸우고, 권력을 훔치는 이들이라 말한다. 한편 극 중 ‘쥐기자’에게는 “…국민들은… 이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을 무능한 권력과 부패한 정부에 대항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영웅으로 치켜세운다.”라는 대사가 주어지고, 지금 바로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기사를 쓰고 있는 나로서는 여기서 잠깐, 이 작품이 극중극중극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 그만 털어놓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정말 이 작품에서와 똑같이 전국적으로 한우의 소뿔이 잘려나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도 더불어. 진짜로? 넵, 이건 극중극중극 중에서 극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이쯤에서 연출가 인터뷰가 나와 주어야

“사실 대본상에 작가가 이미,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골 비어 보여도 좋으니까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라’고 명시해뒀다. 물론 극중극중극의 3중 구조 중, 가장 안쪽에 있는 극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니 그 의도대로 공연 내내 아무 생각 없이 웃으며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언가 사유의 편린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본적으로는 무술액션 장면이 많아서 전체적인 호흡이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라이브 밴드를 선택한 이유도 음악과 액션의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가기 위해서였다. 녹음된 음악을 틀면 큐를 맞추는 것 이외에 호흡을 조율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나. 현재로서는 전체적인 템포를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연출가 김승철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어지러운 글쓰기로 독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심심한 사과의 말씀과 더불어, 솔직히 이 연극을 끌고 가는 중심 서사랄까, 주된 갈등의 실체랄까 하는 것들은 이 글에서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과감한 고백을 또한 남겨야겠다. 연극이 가지고 놀고 싶어 한 바로 그 한심한 작태를 글로써 실천해보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극과 현실의 영역 탐구에 대한 질문 한 가지. 사실 최치언 작가는 이런 식의 극중극, 혹은 현실과 환상, 꿈을 넘나드는 연극놀이에 몹시 능한 이야기꾼이다. 이번 작품은 그 절정에서 연극 자체를 가지고 논다. 한편 김승철 연출은 연극과 현실, 혹은 실재와 허구의 경계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결국 우리의 한계가 아닐까, 하고 반문한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연극과 현실, 허상과 실체, 그 어디쯤에서 무엇을 실천하며 살고 있는가. 정말 골 비어 보여도 괜찮은 건가?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포스터

일시
3월 12일~3월 29일 평일 8시, 주말 3시, 월 쉼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최치언
연출
김승철
출연
신현종, 김수현, 김성일, 이형주, 민병욱, 박완규, 한보람, 김관장, 이준혁, 박시내, 유지혁, 김민태, 한일규, 김민재, 이해미, 김동훈, 임지성, 유혜원, 황세희
문의
02-758-2150

태그 남산예술센터,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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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63호   2015-03-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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