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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예나’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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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시작은 1991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공개한 故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작가 본인이 위작이라 주장하며 논란은 시작되었다. 26년간 이어진 논란인 만큼 펼쳐져온 역사도 지난하다.
그림에 적혀있는 대로 1977년 작인 이 작품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 10.26 사건으로 김 전 부장의 재산이 압수되면서 <미인도> 역시 정부의 소유로 넘어갔다.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을 거쳐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로 이동하게 된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표면적으로는 군부독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자유민주화 시대가 도래한 듯했던, 1991년 봄.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국립현대미술관은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대중 친화적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오랫동안 잠자던 <미인도>는 이때 대중에게 공개된다. 연극 <‘미인도’ 위작 논란 이후 제2학예실에서 벌어진 일들>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때는 1991년 3월.

윤예나. 국립현대미술관 공채 1기 1호 최초의 非서울대 출신 학예사다. 권위와 프라이드로 똘똘 뭉친 학예사 선배들 사이에서 종종거리며 제 몫을 하려 분주하다. 제2학예실이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작품에서 사용한 사업명)의 중심부서가 되면서 신입인 예나에도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가 찾아 올린 것은 수장고에 잠자고 있던 천경자의 <미인도>다. 예나의 기획이 성황을 이루며 <미인도>는 ‘움직이는 미술관’ 사업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고, 지금까지 가장 많은 양의 아트포스터가 판매된다. 제2학예실 사람들이 성공을 자축하던 중, 작가 본인이 작품을 위작이라 주장하면서 미술관이 발칵 뒤집힌다. 수습하겠다며 거듭 사죄하는 예나에게 학예실장은 <미인도>는 진품이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유진모 (아트포스터를 보고) 이게 가짜가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게 가짜가 되면요. 국립현대미술관이 가짜가 되는 거예요.
국립현대미술관에 그림이 다 가짜가 되는 거예요.
이 나라가 가짜가 되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예나 씨도 가짜에요? 가짜 학예사에요? 책임지겠다고 했죠?
진짜가 되세요. 그게 책임지는 겁니다.

예나는 운동권 출신으로 “예술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학예사가 됐다. 그러나 이제 시작됐을 뿐인 사회로의 걸음 앞에는 거대한 벽이 서있을 뿐이다. 예나에게는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벽을 뚫고 나갈 것인가, 벽 안에 머물 것인가.

연극은 천경자 화백의 입장에서 <미인도>가 위작이라 전제한다. 작가 본인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작품을 국립기관에서 ‘진짜’라고 판명한 이 아이러니한 사건의 뿌리를 찾아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이 작품은 가짜가 진짜가 되는 과정을 한편의 그림을 채색하듯 담담하게 그려내면서, 가려져 가는 진실처럼 기성에 물들어 가는 한 인물을 보여준다. 진짜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아도, 힘을 가진 가짜는 서서히 조금씩 진짜를 밀어낸다. 이윽고 완고한 벽처럼 우뚝 진실 앞에 선다.

이 작품은 <미인도> 위작 논란이 진행형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91년부터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병폐를 복기한다. 청년세대가 기성에 포섭되는 과정 속에 녹아있는 힘의 격차, 권력의 절대성에 대해. 누군가의 손가락은 다른 누군가의 전신을 흔드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가로 26cm, 세로 29cm, 4호 크기 그림의 진위여부에 대해 26년 간 갑론을박을 벌여오는 동안 정작 거짓이 된 것은 삶과 사람들이라고, 이 작품은 말한다.

“이 작품은 어쩌면 '미인도'가 아닌 우리 삶의 위작논란에 대한 이야기다. 1987년, 우리는 광장에 모여 국가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안심했다. 그리고 작년 겨울 우리의 대통령이 가짜였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87년보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광장에는 지금까지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탄식으로 가득했다. '가짜의 삶을 청산하고 진짜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미인도> 위에 덧입혀진 혼탁함을 바라본다. 거기엔 섬세한 터치도 풍부한 색채도 없다. 그 많던 예나는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갔을까?

[사진: 극단 위대한 모험 제공]

일시
12월 22~31일 평일 8시, 토3시7시, 일 3시, 월 쉼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강훈구
연출
김현회
출연
김정호, 송희정, 전운종, 송철호, 김보나, 조하나, 신윤지
문의
010-8317-1005

태그 예나, 위대한 모험, 미인도, 허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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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균

허영균 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 창작 작업과 함께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byebanana26@gmail.com
제130호   2017-12-2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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