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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 누적된 폭력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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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일 년만이다 싶어 지나간 날을 들춰보니 정말 꼭 일 년이 지나있다. 극단 프랑코포니의 정기공연 <벨기에 물고기>를 취재하던 날 말이다. 한 해에 단 한 편, 동시대의 불어권 연극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불 그룹 극단 프랑코포니(Theatre Francophonies)가 2001년 활동을 시작한 이래 세웠던 약속을 또 한 번 지키고 있다. 불문학자 임혜경과 한국연극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 연출가인 까띠 라뺑을 중심으로 한 이 팀은 해마다 이 무렵이면 ‘손편지’ 같은 작품을 들고 관객을 찾는다.

2018년 작품인 <아홉 소녀들>은 작가 상드린느 로쉬(Sandrine Roche)의 2011년 작품이다. 상드린느 로쉬는 1970년 생 극작가로서, 2001년부터 극작을 시작한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그녀가 2010년부터 아동들과 함께 하는 창작 아뜰리에 ‘서클 극장’을 이끌고 있는 것인데, <아홉 소녀들>은 바로 이 아뜰리에에서 탄생했다. 프랑스 렌느 시에 있는 ‘서클 극장’은 9살에서 10살 여아들을 대상으로 아이들을 지도하던 작가는 아이들의 상상력 속에 등장하는 폭력에 많이 놀랐다고 한다. 이는 작가를 ‘순진한 나이’라는 관념적 표현에서 벗어나게 했고, 작가는 아동들에게 내제된 폭력의 기록을 작품으로 치환했다.

이 작품은 제목을 통해 등장인물들이 ‘소녀들’임을 유추하게 할 뿐, 인물들의 이름과 나이, 국적을 설정하지 않고, 오직 ‘-(하이픈)’으로 대사의 순서만을 구분한 독특한 극작 방식을 지니고 있다. 시간도 제시되어있지 않아서, 생각하기에 따라 여러 날이나 혹은 특정한 며칠이 될 수도 있다. 학교 운동장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장소적 설정도 더는 없다. 이 작품은 각각의 상황을 모은 조각들이며, 무질서하게 균형이 맞지 않게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 실린 작가의 메시지는 이 작품을 재즈처럼 자유롭게 해석하여 연주해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본은 혼자에서 아홉으로… 따로 또 같이 연주할 수 있는 악보처럼 구성되어 있다.

<아홉 소녀들>을 여러 번 연출한 스타니스라스 노르데 연출은 “겉으로는 샴페인처럼 가볍고, 신맛이 나고, 톡톡 튀며, 거품이 일지만 사실은 비희극”(에서의 인터뷰, 2014)이라고 작품을 표현한다. 그 ‘비희극’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홉 명의 소녀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있다. 이들은 이야기를 지어내는 놀이를 한다. 자기 차례가 오면 허구와 실재를 교묘하게 뒤섞어 저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과거의 추억, 두려웠던 기억, 꿈꾸었던 것들… 부모로부터, 또는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 편견으로 가득 찬 무서운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한다. 순진하고 순수하던 이들의 이야기는 놀이가 진행될수록 점차 무거워진다. ‘하이픈’의 소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여성, 놀이, 여성혐오, 성폭력, 왕따와 차별, 동성애, 난민 등 현대사회가 품고 있는 문제들이 발설된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반복하고, 이것은 더 이상 소녀들의 말이 아니다. 이들이 발설한 것은 이 사회의 질병 혹은 질병의 징후들이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라는 말과 함께 우리가 저질러 버리는 일들은 실상 오랫동안 누적되어 온 어떤 입력 값의 결과일 것이다. 폭력이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원인을 종종 그들의 어린 시절에서 발견해 내는 것처럼. 아이들의 순진하고 재기발랄한 놀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재즈의 즉흥성처럼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폭력의 경험을 끼어 들인다. 경험이 남긴 흔적의 조각들은 이야기를 날카롭게 벼리며 점층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가정과 사회에서 억눌려온 소녀들의 무의식이 ‘즉흥 이야기 만들기’라는 계기를 통해 경고의 신호음을 울리는 것이다. 소녀는 여자로 자라게 될 것이다. 여자가 될 소녀는 여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지극히 환상적이기에, 지독하게 현실적인 이 게임이 만들어 내는 고유한 세계는 놀이와 실재를 오가며 환상과 악몽을 혼합한다. <아홉 소녀들>은 ‘순진한 아이’들은 없을지라도, 폭력의 기억을 누적해 가는 아이들은 분명, 어른의 거울임을 보여준다. 이 세계의 하이픈(-)들이 보내는 비정형의 경고음이 울린다.

[사진: 잘한다프로젝트 제공]

일시
3월 22일~4월 8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월 쉼)
장소
동양예술극장 2관
상드린느 로쉬
연출
까띠 라뺑
드라마투르기
임혜경
출연
권기대, 김시영, 한철훈, 김진곤 외
문의
070-7664-8648

태그 허영균, 아홉소녀들,폭력의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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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균

허영균 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 창작 작업과 함께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byebanana26@gmail.com
제136호   2018-03-2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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