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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움직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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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마주치는 낯선 얼굴은 종종 내게 묻곤 한다. “도를 아십니까?” 지금이야 가차 없이 갸웃 목인사만 하고 지나쳐버리지만, 전엔 붙잡혀 법당에 초대를 받거나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준 적도 있다. 처음 보는 이가 말해주는 나와 조상의 전생과 현생, 환생에 관해 한참을 듣다보면 도를 찾는 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곧 업의 굴레,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 도리어 그것을 잘 운용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권하건대, “운명을 믿으시나요?”하고 물으며 다가왔더라면 훨씬 더 흥미롭게 시간의 한쪽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운명(運命). 인간을 포함한 우주 일체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초인간적인 힘으로서, 흔히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란 의미로 통용된다. 하지만 한자를 엿보니 의미가 사뭇 다르다. 움직일 운, 목숨 명. 움직이는 목숨, 움직이는 인생이라니. 역동적인 단어다. ‘운명은 움직이는 것’ 이렇게 생각해야 연극 <운명>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덜 아프겠다.

윤백남의 운명

2014년 시작된 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가 아홉 번째로 소개하는 작품은 <운명>이다. 작가인 윤백남은 극작가이면서, 소설가, 영화감독이기도 했던 예술가로 활동 분야가 다양하고, 방향도 다채로웠다. 1888년 출생으로 지금으로부터 꼬박 100년하고도 30년 전에 태어난 윤백남 작가는 일본 유학을 거쳐 보성전문학교 강사,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다 1912년 신파극단 문수성을 창단하고 집필과 더불어 배우로도 활약하는 삶을 겸했다. 월간잡지 『예원』을 발간하거나, 이기세와 함께 신파극단 예성좌를 조직하고, 1917년에는 백남프로덕션을 창립해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에 나서는 등 연극과 영화에서 폭넓게 활동했다.

연극에 있어서는 신극사(新劇史) 최초의 연극론인 논문 「연극과 사회」(1920)를 발표한 것으로 공을 세웠다. <운명>은 비슷한 무렵인 1921년 집필되고 상연됐다. 활동 영역만큼이나 그가 다뤄온 소재나 주제의 폭도 큰데, 계몽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 초기 작품에서 벗어난 과도기적 시점의 작품이 <운명>이다. 신여성의 등장, 구식 결혼제도의 비판, 노동 이민 등 현대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하여 비평하기에도, 칭송하기에도 의미가 있다.

사진신부가 된 신여성

<운명>은 하와이에 살고 있는 남자와 ‘사진결혼’을 하게 되면서 약속한 연인과 헤어지게 된 이화학당 출신 여성의 일을 그린다. 김낙형이 연출을 맡고, 국립극단 시즌단원 양서빈, 홍아론, 이종무, 박경주, 박가령, 이수미, 주인영이 1920년 하와이로 떠난다. <운명>은 당시 성행한 사진결혼의 폐해를 드러내는 사회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신여성, 도미유학, 노동 이민 등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각양각색 운명이 보인다.

하와이 사진신부는 하와이로 이민 간 남성들의 사진을 통해 결혼을 약속하고, 하와이로 떠난 여성들이다. 사진 속 남자들은 주로 부와 명예를 갖춘 서양화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사탕수수밭이나 농장에서 고되게 일하는 노동자였다. 나이 또한 신부들보다는 15세 이상 훌쩍 많았기 때문에 신부들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깜짝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고.

노동력 부족에 시달리던 하와이는 임금이 비싼 백인이나, 일본인이나 중국인 노동자를 대신하여 조선에서 노동자를 들였다. 가난과 기근에 허덕이던 대한제국 정부도 백성들의 이민 정책을 검토했고, 그렇게 1902년 11월 이민협정을 맺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항에서 증기선 게일릭호에 승선해 하와이로 떠난 102명의 청년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식 이민자들이다.

이들 상당수가 미혼이었으나 동양인과 미국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금혼법으로 현지의 미국 여성과 결혼할 수 없었다. 타국에서 안정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음주, 도박, 범죄에 빠지는 일이 많았는데 농장주들은 이들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런 연유로 탄생한 궁여지책이 사진결혼이다.

일반적인 사진신부들이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이었던 것에 반해, 주인공 메리는 이화학당 출신의 신여성으로 연인 이수옥 또한 일본 유학생인 지식인층이다. 그럼에도 서양을 선망하는 아버지가 결정한 혼사를 거부하지 못한다. 하와이에 건너와 잡일로 생계에 보태고, 술꾼 남편과 반목하며 겨우 살던 메리의 주위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려던 동네 여인이 남편의 칼에 찔려 사망하면서 메리는 더욱 삶을 체념하며 가혹한 운명을 탓하게 된다. 절망의 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 수옥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메리의 삶은 태풍을 맞는다. 운명(運命)의 때가 다시 온 것이다.

그때의 눈으로

작가는 메리에게 다시 한번 선택의 기회를 주지만, 결코 그녀를 선하게만 그리지 않는다. 까막눈이거나 겨우 글을 읽는 정도의 동네 여인네들이지만, 남편을 봉양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가정에 복무하는 그들을 훨씬 너그러이 묘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당대의 현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감각이 돋보인다. 1924년, 하와이 정부가 결혼 이민을 금지하기 전까지, 무수한 조선 여인들이 실제로 가혹한 사진신부가 되었다. <운명>은 지금이 아닌 그때의 눈으로 보아야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인다. 희곡의 첫 장, 작가가 적어두었듯이.

시(時)

현대 여름.

[사진: 국립극단 제공]

일시
9월 7~29일 평일 7시반(화 쉼), 주말 및 공휴일 3시
※ 단, 9.19.(수) 3시 공연
9.15.(토), 9.22.(토) 3시, 7시반 2회 공연
9.23.(일), 9.24.(월) 공연 없음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윤백남
연출
김낙형
출연
양서빈, 홍아론, 이동무, 박경주 외
문의
1644-2003 | www.ntck.or.kr

태그 허영균,운명,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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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균

허영균 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 창작 작업과 함께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byebanana26@gmail.com
제147호   2018-09-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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