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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창고는 안녕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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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무언가 일을 하다 보면, 도대체 이 일이 어디에 소용되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 서늘한 찰나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종의 성실함, 혹은 어떤 인내심을 비집고 허락 없이 끼어드는 불복종의 심리 상태. 대개 그것은 의도치 않은 사소한 실수로부터 비롯되기 마련이다. 응당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무언가 어그러졌을 때,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로부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때, 심지어 누구도 그 잘못을 눈치 채지 못할 때. 어찌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는 일이란 게 대부분 이러하다. 미안하지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충분히 가치 있다고 확신하는가? 바로 그 일로부터 누군가 행복한가? 바로 그 일로 인해 누군가 배부른가? 정말 미안하지만, 당장 그 일을 멈춘다고 해도 세상은 별로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 불온한 의구심을 기억해야 한다.

극단 피오르 <비극의 일인자>

그것은 당신의 미션인가, 상자의 미션인가

창고에 물건 상자들을 보관하는 일을, 아마도 아주 젊은 시절부터 해왔을, 중년의 두 사내가 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상자를 실은 트럭이 창고 앞에 당도하고, 일련번호가 매겨진 상자들이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도 없거니와 그것을 안다 해도 일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내들은 그 상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쩌면 이와 같은 창고를 몇 번이고 들락날락거리는 것이, 여기 이 상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일지도 모른다. 창고지기들은 그저 상자들이 제대로 미션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창고지기들은 ‘자앙’과 ‘기임’이라고 불리는 사내들이며, 창고는 그들의 일터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모든 것이 우주의 법칙대로 흘러가고 있던 어느 날, ‘기임’은 그곳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래서 모두가 ‘다링’이라 부르는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고, 밤이면 술에 취해 창고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자앙’은 그런 ‘기임’을 위해 아침마다 북엇국을 끓여주었고, 어느덧 창고에는 ‘기임’의 숙취 해소에조차 쓰이지 못한 북어대가리들만 남겨지게 되었다. 그 즈음 ‘기임’은 홀로 우주의 법칙을 어기는 것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 법칙 자체를 무용하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출고되어야만 하는 상자 하나를 다른 것과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다.

극단 피오르 <비극의 일인자>

법칙은 어기라고 있는 거야

물론, 망가진 법칙으로 인해 우주가 멈추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은 것은 우주뿐만이 아니었다. ‘다링’은 아무렇지 않게 상자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고, 그것은 ‘자앙’에게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괜찮았다. 그래봤자 상자일 뿐, 애초에 상자에게 미션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 와중에 트럭 운전수는 ‘기임’과 ‘다링’을 결혼시키겠다며 평생을 함께 해온 ‘기임’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자앙’은 상자 주인에게 사실을 고하는 편지를 썼으나 애석하게도 편지의 수취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은 것은 오직 ‘자앙’과 북어대가리뿐. 그리고 도대체가 어디에 소용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수북한 상자더미들뿐.

“여기서 ‘자앙’이 얘기하는 가치는 지금 이 시대에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만이 옳은 일이라는 전통적 가치관을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테면 예전에는 내가 이 시기에 이런 씨앗을 뿌리면 언제쯤 무엇을 수확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예측과 통제는 이제 불가능하다. 오랜 시간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자앙’은 이러한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게 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사실 최근 들어 나 스스로 연극 연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계속 하는 게 맞는지, 계속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왜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건지, 작품이 자꾸 나한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마도 이 시대의 많은 관객들이 비슷한 질문들을 받게 되지 않을까.”- 연출가 구태환

<북어대가리>는 극작가 이강백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93년 초연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2004년부터 이 작품을 꾸준히 무대화해왔던 구태환 연출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기 이 인물들이 우리에게 유효한 질문을 던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20년 전에도 동시대의 문제를 다뤘고 지금도 그러하며, 언제까지고 동시대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라고. 그게 바로 고전 아니겠는가라고. 이 시대의 관객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주었으면 좋겠다. 연극의 마지막, ‘자앙’은 수북한 상자들 사이에서 북어대가리에게 말을 건넨다. “이 창고 속에서의 성실함이… 무슨 소용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다시 상자를 쌓기 시작한다. “단 하나의 착오도 없게, 절대로 틀려서는 안 된다!”라고 다짐하면서.

[사진: 극단 수 제공]

극단 수 <북어대가리> 포스터

일시
3월 6일~4월 5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월 공연 없음)
장소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이강백
연출
구태환
출연
이문수, 박윤희, 배성일, 박수현
문의
02-889-3561

태그 극단 피오르,비극의 일인자,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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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62호   2015-02-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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