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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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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서른다섯의 동갑내기 커플 대환과 수아의 지긋지긋한 인생에 대한 것이다. 부모님의 원조로 딱히 하는 일 없이 서른 중반이 되어 버린 이들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지 못한다. 함께 산 지 6년이나 되었으니 연애는 일상과 다를 바가 없고, 통장 잔고는 바닥인데 집주인은 전세를 올려 달라 한다. 변비 얘기, 섹스 얘기, 그리고 답 없는 서른다섯의 인생 얘기를 두덜두덜 늘어놓는 두 연인에게, 과연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란 게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대환은 자신이 소설 쓰기를 가르치는 여고생에게 홀려서 과외비를 몽땅 줘버리고, 수아는 강의 자리를 잃고 싶지 않아 교수의 오피스텔에 불려가 희롱을 당하고 있다. 이러고 산다. 청춘이 뭐 이러냐. 그 별 볼일 없는 인생과 멋없는 청춘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느 볕 좋은 날, 최원종 작가와 함께 낙산 공원의 산책길을 걸었다.

청춘, 갔니?

극단 명작옥수수밭 <청춘, 간다>

2006년, 서른셋에 쓴 작품이다. 당시 내가 쓰던 희곡은 관념적이고 무겁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작업 과정에서 배우들도 힘들어했다. 내 길이 희곡이 아닌가 싶어, 시나리오 학원에 들어갔는데, 그때 목표는 딱 하나였다. 연극을 너무 하고 싶었는데 실패한 거니, 여기서는 절대 실패하지 말아야지, 라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인생이 더 나아지질 않는 거다. 그러면 나는 작가라는 꿈을 버려야 하는 걸까, 아무리 힘들어도 난 작가가 될 거라고 믿어왔는데, 스스로를 의심한 적은 없는데, 그때 그 순간 마치 청춘이 떠나가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살겠지,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9년 만에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다시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되어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야지, 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나는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나는 그때 분명 청춘을 놓았고 편안해졌다. 그런데 이 작품이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니 마음이 힘들어지더라. 작업을 같이 하는 배우 스태프들도 서른 초중반대가 많아서 연습 내내 어려운 점들이 있다. 현재진행형의 고통을 마주해야 하니까. 여기 나오는 주인공은 작가로 그려지지만, 배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했고, 우리 각자의 인생에 대해 떠들고 고민하면서 만들고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생존의 문제

극단 명작옥수수밭 <청춘, 간다>

작품에 나오는 여고생을 많은 사람들이 욕했는데, 나는 이 애가 너무 마음에 든다. 예전에 실제로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었는데, 그때 느낀 게 있다. 우리 세대가 부모님한테 의지해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다가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세대라면, 이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이미 그걸 다 경험하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답답해하는 이들이다. 그러니 자기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지를 철저히 내면화시키면서 살게 된 거다. 실제로 얘기를 해보면 애들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워서 묘하게 대화가 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아이처럼 살아도 괜찮은 것 같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에게 거짓말이 힘이 된다면, 내 마음이란 건 애초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영화를 좋아하는데, 불면증에 걸렸을 당시 한동안 공포영화를 정말 많이 봤다. 잘 만든 공포영화에서 절정의 순간이 뭐라고 생각하나? 이를테면 엄청난 괴물이 쫓아오는 가운데 주인공이 사력을 다해 괴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고 쳐보자. 그런데, 막다른 곳에 몰려 이제 자신을 도와줄 이가 정말 아무도 없고, 오직 스스로 이것을 헤쳐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너무 무시무시한 괴물이라 도저히 나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젠 정말 방법이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찾아오는 거다. 그 순간 나는 괴물에 맞서 혼자 싸워야 한다. 세상을 살면서 힘든 상황에 부닥치면 나는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설득했던 것 같다.

최원종 작가와 나는 낙산의 길을 오래도록 걸으며 연극하는 얘기와 세상사는 얘기를 한참동안 떠들었다. 돈 많은 척 해보니 대접이 달라지더라, 청춘도 좋지만 세상이 어른 대접을 너무 유예하는 것 아니냐, 현실이 힘들어서 정신적 도피처로 책을 찾게 된다, 보수화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등등 일상의 소소한 경험을 얘기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내내 연극의 한가운데 머루를 수 있었다. <청춘, 간다>는 그런 작품이다. 연애 이야기로 시작해 세상만사를 에두르게 만드는 연극. 인생이 그냥 살아지는 게 싫은 어느 날, 애인이랑 친구랑 함께 보고 위안 받고 싶은 그런 연극.

[사진: 바나나문프로젝트 제공]

극단 명작옥수수밭 <청춘, 간다> 포스터

일시
5월 5일~5월 17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공휴일 3시, 쉬는 날 없음
장소
대학로예술마당 1관
작·연출
최원종
출연
김동현, 김나미, 김왕근, 류혜린, 박지아
문의
02-764-7562

태그 극단 명작옥수수밭,청춘, 간다,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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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67호   2015-05-0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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