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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레퍼런스가 필요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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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국립극단 <허물>

인생이 어떻게 더 이상 손써 볼 수 없을 정도로 꼬였을 때, 어느 길로 가도 막다른 골목만 나올 때, 그럴 때는 어떤 사건이 필요하다. 기왕이면 아주 강력한 사건이어야 한다. 특이하고 괴이할수록 좋다. 이런 사건은 환기의 기회이자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사건이 삶에 중요한 지침을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무대 위는 이혼 위기와 실직, 어머니의 죽음 등 여러 가지 악재가 겹친 한 남자의 집이다. 이곳에서 마치 강력한 심리치료 프로그램 같은 기묘한 사건이 벌어진다. 바람을 피다 걸린 주인공 남자는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게 대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남자가 코너에 몰릴 대로 몰린 어느 날, 치매에 걸린 아버지가 몸의 허물을 벗으며 점차 젊어지기 시작한다. 80대에서 20대까지 역순으로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아들은 자신을 발견하고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일본 작가 츠쿠다 노리히코의 기발한 발상이 돋보이는 연극 <허물>은 더 이상 손 써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진 인생에 나침반을 제공하는 듯한 작품이다. 2006년 기시다 쿠니오 희곡상 수상으로 작품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국내의 경우 지난해 한일연극교류협의회와 국립극단이 공동주최한 ‘제6회 현대일본희곡 낭독공연’에서 관객을 만난 바 있다. 올해는 ‘국립극단 젊은연출가전’을 통해 류주연 연출가의 연출로 정식으로 국내 초연된다.

(재)국립극단 <허물>

환상을 통해 현실을 보다

"최대한 사실적으로 묘사될 것이다. 인간이 허물을 벗는다는 황당하면서도 환상적인 설정이 쉽고 빠르게 이해되어서, 마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처럼 여겨졌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허물을 벗는다는 재미난 형식보다 작품이 갖는 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내용이 부각되길 바랍니다."- 류주연 연출가

극은 총 7막으로 구성된다. 각각 어느 저녁 무렵의 일, 첫째 날의 일, 둘째 날의 일, 3일째 날, 그날 밤, 6일째 날, 49일째 날이라는 소제목 아래 허물을 계속해서 벗는 아버지와의 49일간 동거를 그린다. 아버지가 허물 벗기를 시작한 이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공연의 막이 나뉠 정도로 허물을 벗는다는 설정은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모티프다.

그러나 허물 벗는 과정이 공연 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지는 않는다. 사실상 관객이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사실적인 풍경뿐이다. 류주연 연출가는 “인간이 허물을 벗는다는 황당하면서도 환상적인 설정이 쉽고 빠르게 이해되어서, 마치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처럼 여겨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허물을 벗는다는 재미난 형식보다 작품이 갖는 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내용이 부각되게 하는 것이 이번 공연의 목표라는 설명이다.

(재)국립극단 <허물>

인생은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

허물을 벗는 과정을 통해 남자가 만나는 아버지의 총 숫자는 6명이다. 남자는 80대부터 20대까지의 아버지를 역순으로 만난다. 치매에 걸려 인지 능력을 상실한 현재의 80대 아버지, 다정다감했던 60대의 아버지, 건강은 나빴지만 가장 열심히 살던 50대 아버지는 남자에게 비교적 익숙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그러나 여자를 좋아하고 자유로운 일상을 추구하던 40대 아버지, 앞날에 대한 꿈으로 활기가 넘치는 30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태어나기 전의 천진한 20대 아버지는 미처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제각각 다 다른 사람인 것만 같은 각 연령대별 아버지는 실제 무대에서 배우 6명이 나눠 맡는다. 배우 6명이 각 연령대마다의 개성과 특징에 집중함으로써 그 이질감은 더욱 극대화된다. 결국 한 명 한 명이 아니라 이 여섯이 모여야 한 남자의 일생이 된다. 계속해서 바뀌는 아버지의 모습은 비록 현재 혹은 과거에 우리가 엄청난 실수와 좌절을 겪었을지라도 영원히 패배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허물 벗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아들은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난다. 일종의 제의를 간접 체험하면서 마음이 정화되고 삶 속 희망의 실마리를 다시금 잡게 된다. 관객 역시 이 과정을 함께 지켜봄으로써 각자 위치한 생의 자리에서 필요로 하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지친 사람들, 아버지를 보고 싶은 사람들, 웃고 싶은 사람들, 자기 자신이 병신같다고 생각되는 사람들, 자신의 뜻과 개성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 글쎄요, 누구든 와서 보고 뭔가 위로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류 연출가의 말처럼 이 연극의 관객층은 상당히 넓다. 삶의 레퍼런스가 갈급한 모든 이들이 관객층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 <허물>은 문제 속에 갇혀버린 나'들'을 꺼내줄 수 있을까. 극장에서 직접 체험하며 확인해보자.

[사진: (재)국립극단 제공]

(재)국립극단 <허물> 포스터

일시
6월 2일~6월 14일, 평일 8시, 주말 3시, 월 공연 없음
장소
국립극단 소극장판
츠쿠다 노리히코
연출
류주연
출연
임홍식, 정태화, 조영선, 신안진, 신용진, 김유진, 현은영, 김애진, 반인환, 조재원, 이경미
문의
1688-5966

태그 (재)국립극단,허물,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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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김나볏 공연칼럼니스트
신문방송학과 연극이론을 공부했으며, 공연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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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호   2015-06-0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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