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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실은 내가 집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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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극단 이와삼 <햇빛샤워>

그러니까, ‘햇빛샤워’라는 제목에서 모종의 간절함이 읽혔다. 그것이 몸으로 햇빛을 받아내는 일임에는 분명해 보이는데, 이 말은 어쩐지 자외선을 차단할 여유 같은 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 손바닥만 한 반지하방에 사는 광자가 온몸 구석구석 햇빛을 바른다. 해 지기 전 짧은 사이 간신히 ‘햇빛샤워’를 하는 것이다. 광자를, 혹은 그녀의 삶을 조금 더 소개하고 싶지만 그러는 사이 의도치 않게 그녀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려버릴까 저어된다. 그러니 여기서 섣부른 시도를 그만 멈추고 장우재 연출의 말을 빌려본다. 극중 주변 사람들이 광자에 대해 얘기하는데, 저마다 그 대답이 다르다. 그리고 연출을 하면서 작품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광자가 어떤 인물인지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원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칼끝은 항상 자기를 향하게 되어 있으니까.

광자는 썅년입니까?

광자는 백화점 의류 매장 직원이다. 연탄 가게를 운영하는 동교네 집에 세 들어 살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이름을 바꾸는 일이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름을 바꾸는 데 돈이 들어가는 이유도 모두 이름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그 이름을 두고 광자를 ‘미친년’이라 부르던 애를 그녀는 면도칼로 그어버렸다고 말한다. 전과자가 이름을 바꾸려면 ‘악착같이’ 모아야 할 만큼 많은 돈이 들어간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비난하고 싶은가? 그녀의 이름을 광자라고 지어버린 사연 많은 부모님? 급기야 면도칼까지 들게 만든 동급생의 도를 넘은 조롱?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개명을 대행해주는 사람? 혹은 그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 생각하는 광자? 정말 그 누군가의 말처럼 광자가 썅년인 걸까, 그저 광자만 썅년이 되면 모든 게 괜찮은 걸까. 답이 없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남산예술센터, 극단 이와삼 <햇빛샤워>

답이 없다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질문을 던지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해는 안 되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 당장의 자기 생존을 위해 문제를 우회하는 것, 혹은 감상에 빠지거나 도피하는 것, 이 작품은 느닷없고 돌발적인 광자의 죽음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현실에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 이야기를 모두 밝힌 순 없지만, 광자는 이름도 바꾸고 승진도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룬 순간 죽음을 선택한다. 물론, 그녀의 선택 앞에 어쩌면 그것의 전제가 되었을지 모르는 동교의 죽음이 있다. 그런데 동교를 생각하면 질문은 한층 복잡해지고 답은 더더욱 미궁으로 빠진다. 자신이 땀 흘려 일한 대가로 받은 연탄을 이웃들과 나누던 동교는 그 누구와도 그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아이다. 인도 계통의 독일어에 따르면 친구(friend)와 자유(freedom)는 같은 어원으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오직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광자는 자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동교의 죽음을 모른 척 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걸 넘어서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세요

남산예술센터, 극단 이와삼 <햇빛샤워>

이 연극의 가장 바깥에서는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광자를 추적하고 있다. 그는 광자의 주변 사람들을 찾아가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의 대답을 통해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수사나 탐문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광자의 뒤를 밟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로 관객들은 어느새 그의 시선을 공유하게 된다. 인물의 정체는 극의 말미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기실 그것이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순간까지도 우리가 여전히 그 많은 사람들의 말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는 진실이 드러날 뿐이다. 아마도 모두에게는 각자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신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현실에 대한 당신의 진단이 바로 그 대답 안에 들어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우리를 또 다른 물음 앞으로 이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들의 말만 따라갈 거냐고.

이야기가 상당히 다양한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전개되기에, 장우재 연출에게 무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물었다. 특정 장면을 재현하기보다 이야기와 배우를 먼저 생각하려고 한다. 이전에 <환도열차>를 하면서는 중립적인 대소도구를 놓고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해서 사용했는데, <햇빛샤워>는 거기서 한 발 더 나간다. 구체적 사물 자체를 오브제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로등 바로 밑에 침대를 두는데, 그 가로등은 침대 맡 스탠드일 수도 있고 침대는 가로등 아래 평상이 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초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것이 연극이라는 것을 완전히 까발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차피 극장 밖 세상은 이보다 훨씬 초현실적이니 우리는 그저 무대의 상상력을 현실로 끌고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 햇빛에 샤워를 하는 세상이다.

※ <햇빛샤워>는 2014년 8월 남산예술센터의 ‘남산희곡페스티벌’에서 낭독 공연으로 소개된 이후 공동제작 공모를 통해 그 가능성을 인정받아 1년여 만에 무대에 오르게 된 작품이다. 극작가들을 위한 상시투고 시스템 ‘초고를 부탁해’는 드라마터그 독회와 품평회, 낭독공연을 연계해 작품을 수정·보완해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특별한 응모 자격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 접수된 모든 희곡은 극장 드라마터그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남산예술센터, 극단 이와삼 <햇빛샤워> 포스터

일시
7월 9일~26일, 평일 8시, 토 3시7시, 일 3시(월 공연 없음)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작·연출
장우재
출연
김정민, 이기현, 정은경, 김동곤, 박무영, 강진휘, 김선혜, 김동규, 이동혁, 강선애, 심원석, 전영서, 허균
문의
758-2150

태그 남산예술센터,극단 이와삼,햇빛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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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71호   2015-07-0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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