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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때부터 무대에 설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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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선 <리어 왕> 공연이 한창이다. 그리고 여기, 일흔의 노배우가 있다. 40년간 셰익스피어의 ‘리어’ 역할을 연기했던 그가, 들려오는 소리에 의지해 그 공연을 기억한다. 무대의 질서, 예술의 자리는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몸은 늙어졌고 정신은 입 밖으로 뱉어내는 말조차 고르지 못한다. 한평생 무언가를 해왔다는 것, 어떤 존재로 살아왔다는 것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거워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토록 가벼워질 수밖에 없었나 싶기도 하다. 그는 자기 안에 쌓여 있는 말과 기억과 시간이 스러지고,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데도 <리어 왕>은 계속 공연될 것임을 알고 있다. 아니, 더 이상 공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수로울 것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살아질 것이고, 그렇게 사라질 것이므로. 극단 76단의 창단 40주년을 기념하는, 연출가 기국서의 신작 <리어의 역>이 무대에 오른다.

40년, 역사가 아닌 지금

1976년 신촌 시장 골목의 한 소극장에서 시작된 76극장은 1980년대, 암담한 시절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일련의 <햄릿> 공연들로 무대화하는 한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 도발적인 형식으로 관객들을 자극하는 <관객모독> 등의 공연을 통해 일찌감치 한국 연극계의 새로운 시대를 견인할 주역으로 주목받았다. 이후 1990년대 들어 76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현실의 어두운 단면과 소외된 사람들을 무대로 불러내는 창작극을 잇달아 발표했으며, 바로 그 ‘76단 연극’에 연출가 기국서를 필두로 박근형, 김낙형 등이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지나면서 시대도 연극도 관객도 빠르게 변화했지만, 76단은 해외 문제작들을 소개하고 기존 레퍼토리 공연들을 재정비하면서도 새로운 <햄릿>을 발표하는 등 76단이라는 이름의 연극 실험을 쉼 없이 지속해왔다.
40년이라는 세월이 이렇듯 단출한 몇 줄 문장으로 정리될 수는 없을 테지만, 지금은 그 역사와 의의만큼이나 현재를 말해야 할 때임에 분명하다. 이제는 각자 자신의 극단을 꾸려 활동하고 있는 박근형과 김낙형이 2016년 76단의 창단 40주년 기념공연을 위해 연달아 신작을 발표한다. 평생토록 리어 왕 역할을 해온 노배우를 통해 예술과 인생을 성찰하는 기국서의 <리어의 역>을 시작으로, 박근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에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가 자식들을 데리고 삶의 마지막 순례길을 떠나는 여정을 보여준다. 한편 세월의 흔적과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두 연출가의 작품에 비해, 김낙형의 <붉은 매미>는 현대 사회의 시스템 속에 망가진 중년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망상과 불확실로 가득 찬 그들의 정신세계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재단될 수 없는 이 시대 평범한 사람들의 자화상을 그려낼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연극

기국서 연출의 신작 <리어의 역>은 연극과 현실, 무대와 인생을 눙치고 넘나들며, 평생토록 리어를 연기했던 한 배우의 삶과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거울처럼 되비추는 작품이다. 연극은 오랜 세월의 연기와 생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리어라는 인물에 온전히 다가설 수 있었다는 한 노배우의 회한에 찬 고백으로 시작된다. 연출가는 그가 무대에서 자꾸만 다른 대사를 한다며 그 말들을 녹음했고, 그는 그것을 다시 들으면서도 그런 상황에서라면 <리어 왕>의 리어도, 리어 역을 연기하는 그 어떤 배우라도, 그리고 세 딸을 키워내 그 나이에 이른 그 자신이라면 더더구나 충분히 그럴 말을 할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침내 역할과 하나가 된 노배우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그가 자신의 삶과 연극의 경계를 굳이 구분한다고 해서 그것이 또 무엇에 소용될지 모르겠다. 결국 자신의 이름을 붙인 극장 지하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는 이제, 매일 저녁 무대에서 들려오는 <리어 왕>의 대사들을 따라 과거를 다시 산다. 그리고 그와 함께 평생 광대 역할을 연기했던 또 다른 배우가 그를 찾아오면 연극은 이전보다 더욱 모호한 질문과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관객들이 자신의 광대 연기에 웃지 않았다고 불퉁거리는 그는, 낮 동안 종로 길거리에 나가 노인들을 붙들어 두고 광대 노릇을 했던 일상에 대해 떠들어댄다.

연극 말고 현실, 너무 상투적인가?

이어서 아버지를 방문한 두 딸이 먹고사는 얘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리어 역의 노배우는 자신의 유산을 어떻게 상속할지 마지막 말을 남긴다. 그 사이 딸들은 아버지의 극장을 팔아버리기로 합의하고, <리어 왕>에서 코딜리어를 연기하던 막내딸은 공연을 마치고 내려와 맹렬한 기세로 언니들을 비난한다. 헌데 그 모습이 마치 현실이 아닌 연극을 살고 있는 듯, 극 중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듯 보여, 간신히 제자리를 찾은 무대와 삶의 매트릭스는 또 다시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극장에서 예술을 지키겠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위한 것인지, 예술을 위한 것인지, 혹은 그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이제 노배우에게는 그 어떤 ‘상투적인’ 마지막 선택만이 남아있다.

<리어의 역>은 실제로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 나오는 대사들을 공연으로 끌고 들어와 연극과 연극 사이에 매우 흥미로운 중층 구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리어의 독백이기도 하지만 노배우의 회상이자 현실이기도 하고, 극 중 무대에서 들려오는 공연 실황이기도 하다. 이처럼 정해져 있지도 않고 선택될 수도 없는 말들의 층위는 그 자체로 이 연극을 표상한다. 기국서 연출은 작품 제목인 ‘역’에 역할을 뜻하는 役과 거스른다는 의미의 逆, 두 개의 한자를 병기해 두었다. 40년의 세월 동안 연극 무대를 지켜온 그의 모든 질문이 바로 이 제목에, 그리고 이 연극에 담겨 있다. ‘답’이 아닌 ‘질문’을 담는 연극, 그 안에서 76단의 40년 힘을 본다.

[사진: 76단 제공]

일시·장소
4월 20일~5월 8일 선돌극장
6월 1일~6월 5일 게릴라극장
평일 8시, 토 3·7시, 일 3시, 월 쉼
작·연출
기국서
출연
홍원기, 밝남희, 김왕근, 고수민, 김태라, 황보란
문의
070-7664-8648

태그 76단, 리어의 역, 김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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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기

김슬기 공연저술가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제90호   2016-04-2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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