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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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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이라는 말을 온전히 달갑게 들을 스승은 과연 몇이나 될까. ‘가르친다’는 행위는 따지고 보면 내 것을 남에게 내어주는 행위이다. 가르치는 동안 내 것을 높은 이해력으로 습득하는 ‘제자’를 보게 된다면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렇게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처럼 아름다운 마음만 갖기는 어려운 일이다. 제자가 내 것을 소화하는 것을 넘어 어떤 위치를 점하게 되고, 또 그 결과물에서 나의 DNA를 발견하게 된다면 열에 아홉은 아마도 내심 속이 쓰리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게 아마도 인지상정이리라. 스승과 제자는 이렇듯 애증의 경계를 넘나들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2000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극작가 도널드 마굴리스의 작품 <단편소설집(Collected Stories)>이 국내 초연된다. 성공한 소설가 루스와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리사가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는 작품이다.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을 내세웠지만 모녀 관계가 아닌, 스승과 제자 관계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루스는 리사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가르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기의 이야기도 털어놓게 되고 둘도 없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된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의 정신적 DNA를 탐닉했던 제자가 자기 소설을 가져오면서 둘 사이가 삐걱대기 시작한다.

진짜 내 것은 어디까지인가

“단순히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이건 글 쓰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말이죠. 또 세대 간의 문제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성공하기 위해서는 밑에 있는 세대들은 어쨌든 스승을 극복하면서 성공하는 거고, 또 윗세대들은 어떻게 아름답게 퇴장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니까요.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도 울림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 공연을 준비하게 됐어요.” -이곤 연출가

루스와 리사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행위다. 단어와 문장을 만들고 뉘앙스를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작가는 알게 모르게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내가 썼다면 그것은 분명히 나의 것이다.

그런데 진짜 그런가. 만약 이야기의 소재가 내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봐야할까.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흥미로워 그 이야기를 글로 담아냈다면 말이다. 보통의 경우 작가에게는 그런 행위가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곤 한다.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수집해 글에 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 아니던가. 그러나 루스는 리사에게 화를 낸다. 자신이 이야기해준 비밀 같은 속내를 리사가 소설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리사는 자신의 스승이 이토록 화내는 이유에 대해 황당해 한다. 스승을 위해 헌정하는 의미를 담아 쓴 것이었다고 항변한다.

<단편소설집>은 이처럼 이야기를 만들어 글로 적어 내려가는 작가의 행위와 관련해 아주 예민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루스의 주장은 나는 내 목소리를 표현할 도구를 가진 사람이기에 나를 위해 글쓰기를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루스가 보기에 그것은 이야기를 훔친 것이고, 왜곡한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 스승과 제자 간 갈등 이야기

“내 인생을 다른 사람이 소재 삼아 글을 쓸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작품이죠. 미국작가, 영국작가 사이에 벌어졌던 실화이기도 해요. 원작자인 도널드 마굴리스는 주로 자기 경험을 가지고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고, 또 아들을 낳은 후 느끼는 아버지로서의 심정도 작품 속에 많이 들어가 있다고 봐요. 그런 문제들이 녹아 있는데, 작가를 떠나서 모든 창의적인 일을 했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민했었을 내용들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완벽하게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걸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곤 연출가

표면상으로는 작가들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지만 세대 간의 갈등으로 바꾸어 생각해봐도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자기의 실제 겪은 일을 리사가 글을 쓰면서 완전히 망쳐버렸다고 분노하는 루스는 리사의 글 속 자기 DNA를 부정한다. 소재만 훔쳐다 썼다는 주장이다. 리사는 스승이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상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스승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또 무자비해지라고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루스였음을 상기시킨다. 이 같은 갈등은 결국 전 세대의 유산을 이후 세대는 어떻게 전승하고 극복해야 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결국 ‘나의 목소리 찾기’의 과정을 상징한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고찰, 나를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과정에 대한 상념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나를 형성한다는 것은 곧 남의 것들을 습득해서 나의 일부로 삼아 가는 과정이다. 나는 과연 어디까지가 진짜 나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누구의 DNA를 수집해서 나는 나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일까. 원작의 영문 제목 ‘Collected Stories’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선후배 사이인 배우 전국향과 배우 김소진의 캐스팅이 흥미롭다. 개성 강한 두 배우가 굳건한 양 축이 된 채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대결 구도를 펼쳐보이는 이 작품 특유의 묘미를 잘 살려낼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사진: K아트플래닛 제공]

일시
8월 12일~8월 21일 평일 8시, 주말 4시, 월 공연 없음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원작
도널드 마굴리스
연출
이곤
번역, 드라마터그
마정희
출연
전국향, 김소진
문의
02-742-7563

태그 극단 적, 단편소설집, 김나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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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볏

김나볏 공연칼럼니스트
신문방송학과 연극이론을 공부했으며, 공연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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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호   2016-08-0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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