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TOP

연극인

검색하기

너를 헤엄쳐, 나에게 되돌아간다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한 해에 단 한 편, 전 세계 불어권 동시대 연극을 국내에 소개하는 극단 프랑코포니의 공연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극단 프랑코포니(Theatre Francophonies)는 ‘불어권 극단’이라는 뜻으로, 지난 20여 년간 함께 한국 연극을 프랑스에 번역, 소개해 온 불문학자 임혜경과 한국연극을 전공한 시인이자, 번역가, 연출가인 까띠 라뺑이 중심인 팀이다. 2009년 <고아 뮤즈들>을 시작으로, 지난 해 <두 코리아의 통일>(조엘 폼프라 작)까지. 봄꽃처럼 이맘때면 새롭게 무대를 찾아오는 프랑코포니의 2017년 작품은 프랑스 극작가이자 배우인 레오노르 콩피노의 2015년 작 <벨기에 물고기(Le poisson belge)>다. 이 작품으로 작가 콩피노는 같은 해 몰리에르상 작가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출연 배우 제랄딘느 마르티노가 여배우 연기상을 받았다.
확실히 이 작품에서 여배우 분의 쁘띠 피이으(Petit fille)는 신비롭다. 현실적인 상황을 순식간에 환상 속으로, 동화의 세계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급진적인 끌로드의 매력과는 대조적으로 남배우 분의 그랑드 무슈(Grande monsieur)는 미묘하고, 섬세하며, 복합적인 인물이다. <벨기에 물고기>는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 우연히 서로를 발견하고, 끌어안고, 통과하여, 다시 자신에게 헤엄쳐 가는 이야기다. 이들이 유영하는 세계에 먼저 몸을 담가본다.

안녕 낯선 사람

많은 일이 그렇듯, 시작은 우연이다. 우연은 필연보다 가까이 있지만 그만큼 희박하기에, 우연보다 결정적인 필연은 없다. 어느 겨울날,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익셀르 호수 앞 벤치에서 40대 남자와 10대 소녀가 만나는 일처럼.
여성용 구두, 큼지막한 진주 귀걸이, 바둑무늬 목도리를 한 그랑드 무슈가 초코바를 먹으며 나타난다. 빵빵한 책가방을 메고, 벤치 주변을 서성이던 쁘띠 피이으의 눈이 큼지막해 지면서 초코바에 고정된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쉼 없이 줄어드는 초코바를 보면서 쁘띠 피이으는 들으라는 듯 말하지만, “엄마 아빠가 죽었어?”라고 퉁명스런 대꾸가 돌아온다.
둘은 각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와야 할 사람들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점점 자신의 파트너가 오지 않을 거라 확신한 그랑드 무슈는 자기가 먹다 버린 초코바 껍질을 핥아 먹는 쁘띠 피이으(그러면서도 당돌하게 대드는)에게 뭔가 먹이려 집으로 데려간다.

네 개의 잠금장치가 달린 현관문, 초인종은 없다. 옷걸이는 기울어 있고, 거실엔 노트북 한 대, 부엌 찬장을 가득 채운 말린 스프, 말린 크림, 가루우유, 감자 가루, 말린 대구, 말린 자두…. 누군가 오간 흔적이라곤 없는 이 낡은 아파트에도 한 가지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최고급 욕실이다. 물을 좋아하는 쁘띠 피이으가 한 번만 씻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목욕을 허락하고, 그 사이 그랑드 무슈는 쁘띠 피이으의 가방을 열어, 이 아이의 이름 ‘끌로드 끌로케’를 알아낸다. 이제 아이를 집에 돌려보낼 차례.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끌로드가 나오지 않는다. 잠긴 문을 억지로 열어 보니 물속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들어 올려 수건으로 닦아주는데, 끌로드는 “물속에서 문어를 봤다”고 천진하게도 말한다. 이런…, 아무래도 이 애 좀 이상하다. 쿵! 그랑드 무슈의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정지된 공간에 울린다.

어쩌다 두 사람

딱, 주말까지만. 그랑드 무슈는 단 이틀만 끌로드가 자기 집에 머물도록 허락한다. 이 며칠이 자신의 삶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곤 상상하지 못한 채. 끌로드의 부모가 지난 금요일 차 사고로 숨졌으며, 사람들이 사라진 끌로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고, 그 이야길 듣고도 끌로드는 별다른 동요도 없고, 친척들에게로 가지 않겠다고 버티기까지. 모든 일이 그랑드 무슈의 상상 밖에서 벌어진다. 이제 그랑드 무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세상 사람들이 끌로드를 잊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그랑드 무슈와 끌로드의 동거는 반강제적으로,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필연으로 인해 시작된다.

40대 남자와 10대 소녀의 만남, 여장 남자 게이와 별난 외톨이가 함께 살아가는 날들이 평범할 리 없다. 끌로드가 휘젓고 다니는 통에, 그랑드 무슈의 먼지 쌓인 아파트는 날마다 풀풀 먼지가 피어오른다. 이 아파트는 그랑드 무슈의 버려진 기억이 묻혀 있는 곳이다. 깊은 물속처럼 어둡고, 고요한 이 공간에는 항해하던 배가 떨어뜨린 물건, 해안가로부터 떠밀려온 물건들이 바다 깊이 묻혀있는 것처럼, 색깔 잃은 사진들이 다만 붙어있고, 때를 지난 물건들이 그저 놓여있다. 그러나 끌로드가 머물게 되면서 이곳에도 점차 물빛이 차오른다. 그 물기가 서서히 그랑드 무슈를 적신다. 메마른 그의 내면에 톡톡,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가 오래전 마음속에 묻어둔 것들을 향해 톡톡, 노크하듯이.

튼튼한 물고기들

<벨기에 물고기>라는 제목은 그랑드 무슈가 끌로드에게 권유한 일본식 상중의식에서 비롯한다. 이 의식은 눈물을 모은 어항에 물고기 한 마리를 넣어두고, 7일 후 튀겨 먹는 것으로,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들이 하는 특별한 장례 절차다. 하지만 아무리 때리고 놀라게 하여도 이들이 사온 금붕어는 기절하지 않는다. 둘은 팔딱팔딱 뛰면서 생을 포기하지 않는 금붕어를 살려두기로 한다.

죽지 않는 금붕어처럼, 누군가에게는 결코 없앨 수 없는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무언가는 살기 위해 감추거나, 타인을 위해 마모시키길 강요당한다. 일생을 두고, 이 일을 지속하는 건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어떤 결정적인 우연이 삶을 향해 헤엄쳐 올 때가 있다. 그것은 우연보다 차라리 구원에 가깝다. 스스로가 질식시켜온 것, 묻어 지운 것을 발견해주는 구원의 손을 잡을 때, 그는 한 마리의 튼튼한 금붕어가 된다. 그랑드 무슈와 끌로드는 서로의 아가미 속으로 깊이 손을 넣어, 압사 당하던 것들을 끌어낸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의 구원이 된다.
*
*
*
튼튼한 물고기 두 마리가 유영한다.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중이다.

소녀라는 뜻의 피이으fille는 여성 명사여서, ‘작은’ 이라는 뜻인 쁘띠petit 라는 형용사에 e를 덧붙여 쁘띠뜨Petite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작가는 여성형에 붙이는 e를 일부러 빼서 남성처럼 만들었다. 한편, 영어의 미스터(Mr)와 같은 뜻인 무슈monsieur는 남성형 단어이기에 문법적으로는 Grand monsieur라고 해야 맞다. 여성에 붙이는 e가 남성명사에 붙어 있어 문법에 맞지 않지만 이것 역시 작가의 의도다.

[사진: 극단 프랑코포니 제공]

일정
3.15~4.2 평일 8시, 토 4·7시, 일 4시
장소
소극장알과핵
원작
레오노르콩피노(Léonore Confino)
연출
까띠라뺑(Cathy Rapin)
번역·드라마투르기
임혜경
출연
전중용, 성여진
문의
02-743-6487

태그 프랑코포니, 벨기에 물고기, 허영균

목록보기

허영균

허영균 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 창작 작업과 함께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byebanana26@gmail.com
제111호   2017-03-09   덧글 0
댓글쓰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