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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 로먼으로부터

1949년 2월 10일 미국의 한 극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여러분을 만났습니다. 내 이름은 윌리 로먼, 세일즈맨이지요. 네? 세일즈맨이 뭐하는 직업이냐고요. 아, 세일즈맨은… 그러니까 말 그대로 뭔가를 ‘파는’ 일이죠. 영업… 그래요. 뭐 얼추 비슷한, 그런 일이랍니다. 내 나이 어느덧 60세, 30년이 넘도록 전국 각지를 돌며 판로를 개척하고 물건을 팔고 있습니다. 이제는 좀 쉬고 싶어요.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 조금이라도 편한 일을 하고 싶습니다. 겨우 60세 아니냐고요? 이런 세상에 이렇게 평생 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음, 요즘에야 나이 60을 청춘이라고도 한다지만, 68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죠. 나는 아주 지쳤답니다.
이 고된 일을 계속 해올 수 있었던 건 가족들이 때문이었죠. 나에겐 나를 보필해주는 아내 린다와 두 아들, 비프와 해피가 있습니다. 특히 큰 아들 비프는 아주 매력적인 젊은이랍니다. 학창시절엔 뛰어난 럭비선수였고 미남인데다가 개성이 넘쳤습니다. 네, 그땐 분명히 그랬습니다. 난 그 아이가 아주 특별한 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격려했습니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그 공허한 고속도로를 달리고 또 달려야 하는 세일즈맨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애. 뛰어난 운동선수가 되거나, 위대한 사업가가 되거나. 이 나라는 실력과 개성이 있으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내 아들 비프 로먼은 누가 봐도 탄탄대로를 눈앞에 두고 있었죠.

그러나 지금, 35살의 비프는 내 자랑이기는커녕 차라리 암덩어리입니다. 직업도 없고, 결혼도 하지 못했습니다. 툭하면 몇 달씩 집을 떠났다가 거지꼴을 해서 돌아옵니다. 그동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을 떠나있을 때면 종종 보내던 편지마저 요새는 한통도 보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집에 와봐야, 떠나있을 때랑 다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안 좋다고 해야 할까요. 언젠가부터 비프와 전 싸우지 않고는 대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단 비프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등 뒤로 말을 던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더듬거리면서 빙빙 돌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거나 하는데, 그걸 보고 있자면 속에서 불이 치솟습니다. 대부분 사실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더니 요전에는 꽤 멀쩡한 소리를 하더군요. 안정된 직업을 구하겠다, 예전 사장을 찾아가서 사업 자금을 빌리겠다. 아무래도 제 엄마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여하튼 반가운 소리입니다. 그 사장이 비프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덩달아 가슴이 뜁니다. 고작 1만 달러 정도나 챙겨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어, 조금 호통 치듯 조언을 했습니다. 1만 5천 밑이면 받아오지도 마라.

오랜만에 양복을 차려입은 비프가 2층에서 내려옵니다. 역시나, 큰 애는 늘씬하니 멋있는 남자입니다. 이런 모습이라면 누구라도 1만 5천을, 아니 그 보다 더 큰 돈도 선뜻 빌려줄 것입니다. 자, 이제 그에게 행운을. 젊은 날의 방황으로 길에서 이탈해버린 청년이 그가 있었어야 할 자리로 마땅히 돌아올 수 있기를. 당당하게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거라. 고개를 숙이지도,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주지도 말거라. 신신당부할 것들이 넘칩니다.
비프를 보내면서 옛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뿐인 형님 벤에 대한 생각들을. 형님은 17세가 되던 해, 다이아몬드를 캐겠다며 먼 길로 떠났습니다. 알레스카였을 겁니다. 내게도 같이 가자고 했었지만, 선뜻 따라나서지 못한 채 난 여기 남았고, 우린 그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형님이 더 자주 우리 집에 왔으면 좋겠습니다. 내 두 아들에게 그가 성공한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랍니다. 17세에 집을 떠나 20세에 큰 부자가 된 형님. 젊음의 패기와 사내의 개성, 주저하지 않는 성격으로 일찌감치 큰 성공을 한 형님. 그런 모습을 내 아들들이 닮길 바랍니다. 누구나 실력과 개성만 있다면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런 나라니까요.

절망적입니다. 1만 달러? 1만 5천 달러? 1달러도 얻지 못하고 비프가 돌아옵니다. 형편없는 녀석! 사장은 비프를 기억조차 못했답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사장이 비프를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비프가 뭔가 실수를 한 게 분명합니다. 어설픈 농담을 던져서 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필요 이상으로 굽히고 들어가서 신뢰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멍청한 자식! 도대체 젊은이들은 노오력하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들은 진짜 노력을 모릅니다. 자기도 뭔가 해보려고 애썼다고? 웃기는 소리입니다. 겨우 보름 남짓 되는 휴가를 위해 일 년 내내 죽어라 고생하는 대신 일상을 보상받는 겁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내 탓이라 합니다. 린지의 무료함도, 비프의 무력함도, 해피의 타락도…. 아! 나는 너무 지쳤습니다. 신물이 납니다. 한 평생 버티며 살아온 삶을 모두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온 생을 바쳐 마련한 집 한 채마저, 속수무책으로 지어지는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그림자만 까맣게 내려앉습니다. 황망하게도. 지금 나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떠나면 장례식에 찾아올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나면, 비프도 해피도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때가 되면, 내가 보여주려던 삶이 어떤 모습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안녕히. 나의 긴 이야기를 들어주어서 고맙습니다. 나는 또 어딘가, 낯선 나라, 낯선 공연장에서 아주 지친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능한 가장 큰 꿈을 꾸던 날을 잊지 않은 채로. 그러나, 여러분, 혹시라도 기회가 되신다면, 이번엔 내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어요? 비록 나는 실패했을지라도, 여러분과 그들이 대화할 수 있기를 바라거든요.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일정
4.12~30 평일 7시반, 주말 3시(월 공연 없음)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원작
아서 밀러(Arthur Miller)
재창작
고연옥
윤색
오승욱
연출
한태숙
드라마터그
강태경
출연
손진환, 예수정, 이승주, 박용우, 이문수, 이남희, 외
문의
02-580-1300

태그 예술의 전당, 세일즈맨의 죽음, 허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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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균

허영균 공연예술출판사 1도씨 디렉터
문학과 공연예술학을 전공했다. 공연 창작 작업과 함께 예술·공연예술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byebanana26@gmail.com
제113호   2017-04-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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