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TOP

연극인

검색하기

[작품리뷰] 도약하는 기예, 안착하는 예술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공중에 놓인 곡예사는 반드시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도착과 추락의 기로에서 믿을 수 있는 건 무수한 연습으로 짐작할 수 있게 된 지면의 인력과 단련된 신체다. 도약의 순간, 관객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공연자의 안전한 착지를 기대한다. 바닥에 도달한 곡예사는 양팔을 뻗어 자신의 무사함을 알린다. 관객들은 박수와 환호로 기예에 화답한다. 서커스는 시종일관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스릴을 만들어낸다.
컨템포러리 서커스는 서커스가 갖고 있는 긴장감에 실패와 이야기를 더한다. 실패는 기예의 부족이 아닌 공연의 일부가 되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동작들은 예술가들이 만들고자 하는 장면 위에 놓인다. 컨템포러리 서커스는 기술의 완성을 지연시키거나 의도적 실수를 배치하며 관객들로 하여금 공연이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서스펜스가 작동한다. 관객들에게 은폐된 요소들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불안함과 긴박감이 생성된다.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에서 주최한 “서커스 캬바레”는 아직 다소 생소한 컨템포러리 서커스를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축제다. 첫 축제였던 작년에는 컨템포러리 서커스를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면, 올해는 전통과 근대 그리고 동시대 작품까지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이며 서커스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됐다. 문화비축기지 문화 마당에 설치된 커다란 텐트는 ‘서커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풍경을 만들어냈고, 공연들은 석유 탱크, 마당과 거리 위에서 적합한 공간을 찾아 위치했다. 창작그룹 노니의 전시 <리서치 : 서커스 / 연희>는 유구한 서커스의 전통과 현재로 이어지는 개인의 기억을 인터뷰를 통해 채록하며 서커스와 연희에 대해 통시적인 연구를 제시했다. 보는 축제에서 확장해서 저글링, 에어리얼 실크, 장대타기 등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서커스 예술놀이터>, <나도 서커스타>와 같은 참여형 프로그램이 진행되며 공간 전체가 서커스로 채워졌다. 공연되었던 14편의 작품 중 오래 마음에 남는 작품을 따로 적는다.
<스토리 서커스_根(뿌리)>은 50년간 서커스를 해온 곡예사 안재근의 공연이다. 한국 근대 서커스 역사의 산증인인 그의 공연은 완벽하지 않다. 그의 신체는 연륜이 느껴지고, 젊은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기민함을 찾기는 어렵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가 물구나무를 서서 몸을 푸는 일에도 감탄하게 된다. 저글링, 외발자전거, 접시돌리기 등 그가 선보이는 기예에서 곡예사 안재근이 거쳐 왔을 반세기의 이력을 상상하게 된다. 공연 중간, 과거 영상이 서커스 텐트 상단을 스크린 삼아 상영된다. 다섯 명의 가족 모두가 서커스를 했던 시절부터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공연, 민첩하던 시절의 날랜 동작들이 영상 속에 있다. 무대가 자주 없다는 그의 실수는 공연 몰입의 방해 요소가 아닌 그의 내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그가 마지막 기예를 마친 뒤 관객에게 인사를 건넬 때 터져 나오는 격렬한 반응은 공연자가 무사히 기예를 마쳤다는 사실을 넘어 여전히 무대 위에 있는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에 닿는다.
찰나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다. 대만 포모사 서커스 아트의 공연 <찰나의 빛 : 지금 이 순간은 얼마나 갈까?>는 일상용품들과 훈련된 몸을 이용해서 낯선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이 사용하는 오브제는 청소도구, 옷걸이, 양동이, 탁자 등 평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팝콘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시작하는 공연에서는 오브제들의 새로운 기능 정의가 터져 나온다. 공연자는 서로의 몸에 기댄 빗자루, 마대를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분투하고, 옷걸이를 몸에 끼워 다른 사람들이 막대로 자신을 이동시킬 수 있는 새로운 걸이로 변화시킨다. 머리를 맞댄 두 명의 배우는 그사이에 무수한 양동이를 잇대서 서로의 거리를 늘려나간다. 탁자는 용기를 짜는 도구로 전락하고, 우산은 컵으로 이용된다. 맨몸 구석구석 붙인 뚫어뻥을 손을 대지 않고 떨어트리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이상한 세계의 정점이 되고, 신체의 높이와 균형감각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통적 서커스 문법에서 이탈해, 서커스 하는 몸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한다. 순간에만 실재하는 형상과 물체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지속하며 기이한 그들의 세계를 납득시키고야 만다.
남자와 여자가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둘은 묘하게 엇갈린다. 탁자 위의 여자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손짓한다. 이어 등장한 남자는 탁자를 두드리며 여자의 동작을 방해한다. 주도권을 다투는 그들의 행동은 새로운 박자를 만들어낸다. 꺼지지 않은 텔레비전은 노부인 생일날을 비춰 보이며 이들이 속한 시간을 의심하게 만든다. 벨기에 듀오 엘자 부셰와 필립 드로즈는 핸드 투 핸드와 아크로바틱 기예를 통해 <이노센스>라는 이상한 시간대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조금 이상하다. 여자는 남자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며 스물여덟부터 백까지 띄엄띄엄 숫자를 읊고, 남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치 여자가 안 보인다는 듯 행동한다. 이런 행동들 사이에서도 둘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아름다운 기억을 만든다. 홀로 남은 여자의 얼굴에 세월이 드리워지고, 뒤에 걸렸던 사진이 바래가는 것에서 여자가 마지막 순간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저물어가는 시간 속에서 핸드 투 핸드 서커스는 그들의 행복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방법이 되고, 무결하게 조직된 아크로바틱 무용 동작들은 쾌감이 아닌 그들의 정서를 전달한다. 남자가 절명에 다다른 그녀를 닦아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홀로 남은 남자의 아득함을 헤아려보는 일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 진행된 라운드 테이블 2부 '다원/융합적 관점에서의 컨템포러리 서커스 창작' 세션에서 한 참가자가 말했다. 무대를 만드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자신은 무대 위에서 시(詩)적인 것을 만들고자 한다고. 그가 말한 시적인 것에 대해 정확히 상상할 수는 없다. 축제에서 발견한 발견했던 장면들로 그의 발언을 유추해 본다. 오래된 손이 만들어내는 완숙함, 낯섦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용기, 환호가 아닌 마음을 담는 기예에는 그가 말한 순간이 있었다고 믿는다.
컨템포러리 서커스는 어린 예술 장르로서 아직 관객들에게 친숙하지 않다. 예술가들에는 끊임없이 자신들의 작업을 정립하고, 재정의해야 하는 대상이다. 축제는 관객과 예술가 모두에게 비일상의 시공간이다. 뒤섞이는 공간 속에서 서로의 낯을 익혔다. 낯선 시간을 통해서 관객들은 서스펜스에 익숙해지고, 예술가들은 무대 위의 시적인 순간을 발견해낼 것이다. 서커스를 축이는 두 번째 카바레가 끝났다. 이제 취기가 돌 때까지 필요한 건 시간뿐이다.

[사진 제공: 서울문화재단]

서커스 캬바레
일자
2019.5.4(토) ~ 2019.5.6(월)
장소
문화비축기지
서울문화재단 서울거리예술창작센터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SeoulStreetArtsCreationCenter/

태그 서커스 캬바레,김민범,작품리뷰

목록보기

김민범

김민범
대학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거리와 공간에서 발생하는 일들에 관해 관심이 있다. mar621@naver.com
제159호   2019-05-15   덧글 0
댓글쓰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