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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차] 겹친 세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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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세상에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은 연극이 부리는 마술 중 하나다. 가장 유아적이고 순수한 차원에서 체험될 때, 극적 환영(illusion)은 세상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연극은 서로 구분되는 독자적인 세상을 물리적으로 연속된 공간 속에 겹쳐놓는다. 겹쳐져 있는 세상들이 각자 다르게 운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것은 연극을 누리는 관객들의 즐거움 중 하나다.
세월호 2019 기획초청공연 <바람없이>, 서울연극제 참가작 <집에 사는 몬스터>, 신촌극장에서 상연된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는 서로 스타일도 다르고 말하려는 바도 전혀 다른 연극들이다. 다만 나는 이 연극들이 모종의 ‘겹’을 쌓아 다른 세상들을 만나게 하는 테크놀로지를 주목해서 보았다.
<바람없이>
공연을 보러 극장에 들어가면 천장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뜨려져 있는 다섯 개의 하얀 천이 눈에 들어온다. 천의 표면에는 프로젝터에 의해 투사된 그믐달의 상이 맺혀 있다. 그믐달의 윤곽은 천을 하나씩 투과하면서 점차 부옇게 흐려진다. 극장 안에 뜬 다섯 개의 그믐달은 시간의 변화를 표현하는 동시에 각 단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어떤 궤적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간결하고 상징적인 무대 세팅은 <바람없이>라는 공연이 연대 활동가들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관점을 잘 보여준다.
(사진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7기동인 ⓒ박동명)
극장 곳곳에 설치된 여러 대의 스피커를 통해 연대 활동가들의 인터뷰 내용이 하나씩 흘러나온다. 그 목소리들은 외롭고 지난한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그리고 어느덧 익숙해진 활동가의 삶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담담히 토로한다. “내가 어디에 있지. 내가 뭘 눈 감았지. 내가 뭐가 무섭지?”(홍은전)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활동가의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에 대해, 그 힘의 원천을 안고 사는 고단함에 대한 발화가 이어지기도 한다. “분노만 보고 처음에 갔다가, 다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를 가지고 자기만의 애정의 지점을 찾고, 거기에서 계속 힘을 받아서 활동을 하고 그러는.”(정인) 공연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공연은 바람 없이 계속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스스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지금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가늠하고, 이 일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는다. 바람 없이 지속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그들은 세차게 바람이 일어나던 시기의 기억을 더듬어 간다. 그것은 각기 다른 단계에 놓여 있는 활동가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힘을 얻는 순간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그 선생님도 혼자 싸우고 있더라고. 혼자 회사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거야. 그 선생님을 딱 본 순간 내가 혼자 싸웠던 시간이 생각이 났어.”(랑희) 엠마누엘 사누와 고권금의 퍼포먼스는 타인과의 간격을 탐색하면서도 ‘머물기’를 감행하는 신체를 보여준다. 두 퍼포머는 마치 살얼음판을 나아가듯이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고 천천히 무게중심을 옮긴다. 그들의 느리고 미세한 움직임은 고통 받고 있는 당사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의 무게와 지반의 두께를 견주면서, 당사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곁’의 위치를 더듬어가는 것이다. 그러한 움직임을 지속하며 살아가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고통스러운 일이다. 퍼포머들은 어렵게 찾아낸 위치에 쪽잠을 자듯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무대를 가로질러 질주하기도 하고, 희미한 프로젝터의 미광 아래에서 격렬히 춤을 추기도 한다. 그것은 바람 없이 지속하는 삶에 찾아오곤 하는 소리 없는 요동이라 할 수 있다.
(사진제공: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7기동인 ⓒ박동명)
그러나 퍼포머들은 어둠 속에서 다시금 곁을 탐색하는 자세를 수복한다. 그들은 다섯 개의 천 사이에 서서 상대를 바라보며, 천을 움직이게 만들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몸을 구부려 자신의 이마를 대어 보는 제스처를 취한다. 타인을 향해 구부러지는 감각과 타인에게 무게를 더하지 않기 위해 자기중심을 지키려는 감각 사이에 놓인 신체. 고통의 곁을 맴돌고 있는 신체. <바람없이>는 다섯 개의 그믐달처럼 동시에 현존하고 있는 타인들의 세상 속에서 ‘곁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 연대 활동가들의 모습을 비춘다. 나직하게 흘러나오는 음성, 조명이 끊기길 반복하는 어두운 무대, 절제된 움직임 등 정적인 요소들이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 정서적인 긴장을 놓기 어려운 공연이었다.
<집에 사는 몬스터>
무대가 첫눈에 관객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집에 사는 몬스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을 포위하는 형태로 짜여 있는 기하학적인 무대는 이 연극이 제시하는 세계관과 직결되어 있다. 임지민 연출은 공연 프로그램에서 “주변 세상과 만나면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육면체’로 보았다. 이러한 주변 대상들의 무쌍한 변화 속에 ‘한 인간’은 ‘혼자, 한 몸뚱아리로’ 지구상에 서 있다.” 라고 썼다. 중요한 것은 나라는 육면체의 동요에 따라 주변 세상과의 접촉면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연극의 주인공인 ‘덕’이라는 소녀는 몽상적이며 자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황당무계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덕이라는 육면체는 쉬지 않고 동요한다. 그에 따라 주변 세상 역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 판타지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한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한 인간이 육면체라는 것은 타인과 매 순간 하나의 접촉면만 공유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기도 한다. 나머지 면들은 영영 드러나지 않거나 최소한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연극은 그런 관계의 파편성을 관객들도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무대 한가운데에 앉은 관객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사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목격하게 된다. 프로시니엄 모델이 무대의 사건을 원근법적으로 조망하는 퍼스펙티브를 제공하는 데 반해 <집에 사는 몬스터>는 관객이 자신의 위치와 시야의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또한 관객은 덕의 프라이버시 공간 한가운데에 숨어들어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몬스터’의 역할을 맡게 되기도 한다. 덕은 글쓰기를 통해 판타지를 충족하는 감수성 풍부한 소녀인 동시에 현실의 인간들과 관계 맺기에 서툰 전형적인 너드(nerd) 캐릭터이다. 너드 소녀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드라마는 풍족하고, 내적 드라마가 풍족해질수록 현실 세계와 원만하게 접촉하는 일은 점점 힘들어진다.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아버지 ‘휴’와 격리되지 않기 위해 사회복지사 앞에서 정상 가정을 연기하려 하는 덕의 행동은 제법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만, 극의 진행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덕이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들을 자주 오해하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령 극의 결말부에서 덕은 사회복지사 린다의 소박한 호의에 겁을 먹고 달아난다.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는 이 한 칸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어머니처럼 ‘두카티 몬스터’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나다가 나무에 부딪혀 쓰러지는 덕의 모습은 일종의 반복 강박을 통해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운명에 도달하고 마는 비극적 인물의 모습을 닮았다. 그러나 관객?(몬스터)들의 시선으로 포위되어 있던 중앙 무대에서 멀리 벗어난 곳, 오토바이와 함께 볼품없이 나뒹구는 새로운 육면체 공간에서 덕은 자신의 운명과 희극적으로 화해한다. 이는 서로 다른 속도로 회전하며 겉돌고 있던 덕의 내면세계와 외면세계가 잠시 마찰을 정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집에 사는 몬스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양면성’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다룬 연극이기도 하다. 자신이 감각하는 주변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 편협한 에너지를 온몸에 걸고 자신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돌진하는 소녀의 모습은 돈키호테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연극은 우리 모두가 철저히 혼자라고 말하는 ‘척’ 하지만 실상은 홀로 운행하고 있는 모나드(monad)들의 공존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에 가깝다. 우리 모두는 철저히 혼자, 라는 공리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
앞의 두 작품과 대조적으로 김은한의 1인극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에는 별도의 무대 장치가 없다. 오로지 김은한이라는 퍼포머의 말과 행동, 애티튜드의 변화만으로 복잡한 겹을 쌓아나가는 공연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공연 제목에서부터 이미 여러 개의 레이어가 병합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즉 몰리에르의 『베르사이유의 즉흥극』을 패러디한 것이 이오네스코의 『알마의 즉흥극 혹은 목동의 카멜레온』이고, 그것을 다시 패러디해 2018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서 공연한 것이 <성 알마의 비즉흥극>, 그것을 다시 개작해 상연한 것이 신촌극장 버전의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이다. 그렇지만 공연을 보고 있노라면 몰리에르나 이오네스코, 상호텍스트성 같은 것은 맥거핀에 불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단 상호텍스트성을 점검해보도록 하자. 몰리에르가 경쟁자들을 조롱하고 자신의 연극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즉흥극을 썼다면, 이오네스코는 당대에 유행하던 과학적 연극/비평을 풍자하기 위해 즉흥극을 썼다. 비록 아이러니의 구조를 취하고 있지만 이오네스코 역시 자신이 적대하는 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몰리에르를 전유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김은한의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에는 비판의 대상이 없다. 공연장에 오기로 했다던 비평가들은 오지 않고, 비판조차 받지 못하는 ‘듣보잡’ 퍼포머의 몸만이 덩그러니 무대에 남아 있다. 공연은 시작되지 못하고 퍼포머는 공연 소개를 전전한다. 워밍업을 위한 워밍업, 서론을 위한 서론, 각주를 위한 각주가 길어진다. 그래서 이 연극은 이오네스코적이기보다는 보르헤스적이다. 김은한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면서 공연 자체에 대해 메타적으로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말 자연인으로서 솔직하게 말을 건다는 느낌이 아니라 이미 짜온 연기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애쓰는 느낌에 가깝다. 그는 눈을 잘 마주치지 않고 초조하게, 무언가에 쫓기듯이 중언부언과 횡설수설을 반복하며 요설을 이어간다. 공연 러닝타임에 대해, 자신이 먹어본 일본식 꼬치에 대해, 자기가 지금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면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등등. 자꾸 말과 말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퍼포머의 자의식은 희극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못하는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잘하는 연기를 못하는 것도 아닌, 자유로운 상태로서의 즉흥 연기와 꼼꼼히 설계된 상태로서의 비즉흥 연기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망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기대 이상으로 신선하고 쾌락적이다. 심지어 비평가 역 배우가 오지 않는다면서 황망해하는 즉흥 연기조차도 다 계산되어 있는 티가 나는데, 심각하게 즉흥 연기를 연기하고 있는 퍼포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뻔뻔함에 웃음을 참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른다.
(사진제공: 매머드머메이드 ⓒ보통사진관 박태양)
홍수처럼 쏟아지는 요설의 향연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시점에 접어들면, 이 공연이 정말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공연이 표방하고 있는 ‘비즉흥극’이라는 개념에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몰리에르적 의미에서 즉흥극이 ‘논쟁극’으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비즉흥극은 곧 ‘비논쟁극’이 된다. 바꿔 말하면 이 연극은 논쟁극의 형식을 전유하고도 논쟁을 하지 못하는 어떤 무력한 신체를 보여주는 연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잘 가장되어 있는 무력함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무슨 질문인가. 비평가도 재단도 동료 창작자도 찾아오지 않는 아주 작은 극장에서 ‘연극’이라 부를 만한 어떤 사건을 성립시키고 있는 가장 미니멀한 관계성, 즉 연기하는 나와 그것을 지켜보는 너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다. 공연의 도입부에서 김은한은 웃음기 없이 어떤 글의 내용을 낭독한다. 불멸을 꿈꾸는 어떤 이의 목소리를 담은 글이다. 그 내용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불멸에 이르는 방법은 한 편의 글이 되어 타인에게 읽히는 것이다. 내가 쓴 글 속에서, 나의 글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타인의 시선을 느낄 때 그 사람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이전(移轉)의 감각을 얻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류의 이해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너와 내가 무관심하게 동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해받고 싶은 나의 욕망, 이해해주려 하는 너의 욕망이 개입하는 순간 진정한 전달은 불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연극은 어떠한가. 글과 달리 연극은 관객과의 직접 대면을 특성으로 한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감추고 싶어하는 듯한 김은한의 퍼포먼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오해에 가까워질 뿐이라면, 연극은 시작되기를 중단하거나 영원히 시작하기를 반복해야 할 것이다. 김은한의 어정쩡한 제스처에 보르헤스적 주제가 겹쳐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연극이라는 계(界)에 발을 붙이자마자 발생하는 근본적인 질문들, 연극은 대체 왜 해야 하는 것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극장에 모이는가 하는 비생산적 의심들.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말하듯 ‘스스로 몰락하는 자의 표정’을 통해 이 단순하고 징그러운 물음을 던지는 연극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세상은 정말로 겹쳐 있는 것일까? 조금 얄미운 것은, 50분밖에 안 되는 이 공연이 멀리멀리 돌아서 그 세상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었다는 점에 있다.
바람없이
일자
2019.05.23(목) ~ 06.02(일)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출연
엠마누엘 사누, 고권금 외
조명
노명준
사운드
정의석
그래픽
황혜준
영상
박동명
드라마터그
강보름
오퍼
김은정
연출
신재
각색/제작
0set프로젝트
관련정보
http://www.playticket.co.kr/ticketDetail.html?idx=891&fbclid=IwAR1gKFKerPdmaYgAdIsLsMBNMzUAsK2B3bcSx9_OgSuuh987Yhp-sgsV9Gc
집에사는 몬스터
일자
2019.05.17(금) ~ 05.26(일)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작가
데이비드 그레이그
각색/연출
임지민
번역/드라마터그
이단비
출연
김은석, 남미정, 이지혜, 이종민 음악 김태우
움직임
고은결
무대디자인
이창원
조명디자인
이현규
음향디자인
임태형
의상디자인
도연
분장디자인
백지영 소
품디자인
황혜원
무대제작
서울무대장치
무대감독
김해도담
조연출
윤해영, 김인규
포스터디자인
황유진
연구자문
인원근
제작
라마플레이
기획
권효진, 이찬미, 조아진
관련정보
http://theater.arko.or.kr/Pages/Perf/Detail/Detail.aspx?IdPerf=257284
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
일자
2019.05.24(금) ~ 06.01(토)
장소
신촌극장
출연
김은한
제작
매머드머메이드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theatresinchon/posts/2694382343922358

태그 바람없이,집에 사는 몬스터,성 알마의 비즉흥극 리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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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연극평론가
연극비평집단 시선소속. 평론과 드라마투르그 작업 등을 하고 있다.

wingmn1k@naver.com

제161호   2019-06-13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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