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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차] 서울 2019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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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땅 위에, 우리는 태어나고. 아름다운 이곳에, 자랑스런 이곳에 살리라.
연극 <댓글부대>에서 모든 배후를 지휘하는 흰 머리 흰 정장 차림의 회장이 단 한 번 등장해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을 따라 부르다 슬피 말한다. “이 노래를 빨갱이가 만들었어.” 그의 안타까움은 아름다운 예술을 만들 힘이 자신과 같은 보수 세력으로부터는 좀처럼 나오지 못하고 빨갱이, 곧 ‘지상 낙원을 믿는 자들’, 그리하여 작금의 현실 속에 ‘불평불만을 심는 자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서 기인했다. 요컨대 세계에 대한 안주는 아름다움을 발생시키는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신중현은 1972년 당시 박정희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정권의 강요를 거부하며, 대신 아름다운 강산, 이상적인 세계를 찬양하는 곡을 지었다. 그리고 이 노래는 이후 유신정권 내내 금지곡이 된다. 한편 연극이 조망하는 것은 2014년의 한국. 정권은 불평하지 않는 세대, 더 나은 세계를 꿈꾸지 않는 세대를 만들기 위해 십 대를 겨냥한 인터넷 통제를 조장하고, 이에 고용된 댓글부대는 ‘나는 강하다(그러므로 현 세계를 다 포용할 수 있다)’라는 주제로 청소년들이 만드는 동영상 공모전을 주최한다. 그리고 그것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아주 많은 학생이 죽었다.
그렇다면 연극이 올라가는 2019년의 오늘은 어떠한가. 우리는 저 픽션 속 댓글부대가 얼마간 현실에 정말로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고, 촛불로써 그 세계를 일부 무너뜨렸으나, 다시 또 밀려오는 겹겹의 문제에 가로막혀 뿌연 생을 더듬어가고 있다. 우리를 조작하는 자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교묘했기에. 그러니 예술은 무엇을 하려 하는가. 다시금 불평불만을 통해, 그럼에도 더 나은 세계로 가고자 하는가. 더 나은 세계가 있는 것을 여전히 믿는가. 그를 위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있는가. 지난 5월 보았던, 올해로 40회를 맞은 서울연극제의 공식선정작 10편을 상기하며 이 질문들의 답을 고민해본다.
<댓글부대>
연극이라는 것이 갖는 근본적인 정치성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의 특이성 때문일까. 우선 눈에 띄게 과도할 만큼 비판의 기능에 충실한 작품들이 많았다. 가령 <댓글부대>는 저 공작을 파헤치려는 한 기자의 고군분투가 결국 또 한 번 그들에게 이용되는 이야기를 과격한 드라마적 형식으로 그렸고, 이와 유사한 색채 속에서 <공주들>은 일본군 위안부로부터 집창촌 포주를 거쳐 일흔에 가까운 나이까지 성매매에서 헤어나올 수 없던 김공주의 생애를 무대화했다. <어떤 접경지역에서는>은 통일을 앞둔 북쪽 농촌에 공장지대가 들어서는 것을 환영하는 청년 세대와 반대하는 노인 세대의 대립과 파멸을, 하여 ‘교수 집 자식이 교수가 되고 의사 집 자식이 의사가 되는’ 동안 ‘어떤 접경지역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을 그려 보였다.
이밖에 50년 전 독일, 정치의 혼란과 분열 속에서 통합을 꾀하거나 방해했던 수많은 목소리를 절제된 연출로 담아낸 <데모크라시>,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보다 더 비참하게 취급되었던 게이들의 사랑을 탁월한 연기로 펼친 <BENT>, 20세기 초 중국 인력거꾼의 삶을 통해 극복되지 않는 가난의 밑바닥을 가장 연극적이고도 서정적인 방식으로 무대에 올린 <낙타상자> 등이 있었다. 급격히 무더워지던 나날 속에 공연장을 찾는 일은 그런즉 매번 세계의 참혹을 마주하는 일이 되었다. 모든 무대가 울고 있었다. 그렇다면 관객도 함께 울었을까. 아마도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데모크라시>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모두가 하나같이 섬세하고도 적확하고 강렬하게 인물을 구현하여 관객을 몰입시켰다. 이에 더해 대부분의 연출이 취하는 구슬픈 가속도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넘치는 처절함은 지극히 한국적인 방식의 시상(詩想)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깊은 피로감을 주었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때로 도리어 어떤 진실들을 훼손하기도 했다. 가령 <공주들>에서 김공주의 삶을 비난하며 여성단체운동가로 살아가던 손녀가 돌연 미투 고발을 하는 김지은 씨로 연결될 때, 서사의 과도함은 관객의 공감을 비껴갔다. ‘윗구멍, 아랫구멍, 뒷구멍’으로의 입장은 공허했고, 위안부 소녀상처럼 굳어 앉아있는 김공주를 버려두고 퇴장하게꿈 하는 장치는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불편할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떠먹여줌으로써 이야기의 힘을 반감시켰다. 여기서 여성은 또 다시 다만 메시지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듯한 기시감마저 일었다.
흘러넘치는 것들의 버거움은 여타 공연들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어떤 공연은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그것을 승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가령 <댓글부대>는 여론 조작에 승리한 사람들이 벌이는 광기 어린 환락의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때 그들에게 사용당하고 버림받은 한 댓글부대 청년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오른다. 무대 뒤편에 걸려 뚝뚝 물을 흘리는 닳아 해진 주머니와 거기 달린 퉁퉁 부은 손. 우리가 기억하는, 감히 똑바로 바라본 적은 없던, 그 어린 시신들을 닮은. 그 앞에서 스타킹을 머리에 쓰고 춤추는 인간들. 그로써 150분 동안 축적된 과격하기만 하던 이미지들에 아득한 구멍이 파인다. 그 상실감을 힘입어 앞선 과잉들이 정당화된다.
그러나 비판의 방식이 반드시 과잉의 형식을 취해야만 할까. 드물게 몇 공연들은 절제나 우회를 택하기도 했다. 대극장 무대 위에 서늘한 공백들을 남기며 다만 묵직한 연기로 한 정치인과 스파이의 인간적 고뇌를 그린 <데모크라시>가 그러했고, 짤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평화로이 무대를 돌며 교차하는 인력거꾼들의 그림자로 시작된 <낙타상자>가 그러했다. 성실하고 꿈 많던 주인공 상자가 환멸에 찬, 희망 없는 낙타로 전락하기까지, 연극은 세계의 절망을 강조하기보다 도리어 아름다운 환상을 지어 펼쳐 보이는 편을 택했다. 깊은 무대 뒤편이 열리고 사랑했던 이들이 빛나는 세계로 떠나가며 우리에게 손 흔들어 말한다. “죽고 나면 한 줌 흙이야, 그뿐이야.” 그 초연함이 우리가 남은 현실을 더욱 뼈아프게 했다.
<낙타상자>
한편, 어떤 형식을 취하든 저 연극들이 일종의 불평과 비판을 기조로 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이 그 비판 지점의 극복을, 그런즉 더 나은 세계를 꿈꾸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요컨대 오늘날 연극은 여전히 이상을 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감히 제시하는가. 대부분의 작품이 내리는 진단은 희망을 가리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연극은 그저 모순과 갈등을 그대로 펼쳐 보이는 역할을 자처한다. 현실 속에서도 요원한 갈등의 해소를 무대에서 강요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기에 관객은 종종 지치고 힘겨워지지만, 그 어지럼증은 어느 때보다 우리의 진실에 가까웠다.
반면 모순을 덮고 위로를 주고자 했던 몇몇 연극은 얄팍해졌다. 공교롭게도 나약한 남성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서사들이 그러했다. <대한민국 난투극>에서 고등학생 주인공은 무술 영상을 짜깁기하여 비밀 유튜브 스타로 살아가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약한 모습으로 모두로부터 소외당한다. 거짓되게 버는 돈에 대해 그는 ‘강해지고 싶었다’며 그게 잘못인가 되묻고, 연극은 그에게 연민을 품게 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저 변명은 <댓글부대>에서 등장한 ‘나는 강하다’의 모토와 묘하게 연결되지 않는가. ‘강해지고 싶어서’ 철없는 행동을 일삼는 인물을 웃고 즐기는 가운데 포용하는 동안, 말하자면 그가 ‘강해지기를’ 우리가 응원해주는 동안, ‘강한 자들의 세계’와 거기 편입하고자 하는 그의 꿈은 정당화되고, 연극은 비판의 기능을 상실한다.
<중첩>은 아들의 장례를 치른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가 자살한 아내의 시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통에 잠긴 그의 의식 속에서 과거의 생이 중첩된다. 그는 별 의지 없이 운동권을 따라다니다 붙잡혀 애인과 동지를 이간하는 형사의 꼬임에 넘어가서 친구를 죽게 하고, 군대로 도망가서도 저만 살겠다고 비겁한 행위를 일삼고, 불도에 귀의한 애인을 찾아갔다 분노하여 죽여버리고, 앞서 자신을 동생처럼 돌봐주던 누이를 강간해 자살하게 했으며, 결혼 후에도 바람을 피우다 결국 아들과 아내를 죽게 했다. 때로는 격렬하게, 때로는 지루하게 이어지던 극적 장면들은 끝내 그런 그를 보듬기 위해 무려 원시시대의 환상까지 무대로 끌어온다. 그리고 그 환상 속에서 되살아난 아내를 통해 그를 용서한다. 관객 역시 그를 이해하기를 바라며.
무릇 연극이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며, 그 세계 속 인물을 이해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은 쉽사리 그를 옹호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엄청난 폭력과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세계를 만들기 전에, 인물을 제시하기 전에, 연극은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관객에게 누구를 이해시킬 것인지. <중첩>의 선택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착오적이다. 성범죄자와 살인자를 연민하게 하려는 이 작품에 제40회 서울연극제의 ‘희곡상’이 돌아간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벤트>
끝으로, 비판의 시선을 누구보다 짙게 드리우되 어설픈 위로와 연민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그런즉 세계의 절망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투쟁하기보다 사랑하기를 택한 작품 하나가 있었다. 연극 <BENT> 속 수용소의 두 인물은 무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하염없이 돌멩이를 옮기며 그 짧은 이동 가운데 서로를 살리기 위해 애쓴다. 그들의 사랑을 배척하는 세계의 잔혹 속에서, 상대가 쓰러지지 않도록 계속해서 말을 걸고, 두 눈을 감은 채 보이지 않는 손길로 서로의 몸을 만진다. 그들은 결국 죽지만, 관객에게는 그들의 죽지 않는 사랑이 남는다. 패배 정신을 다독이거나 저열함을 연민하게 하는 연극들 사이에서,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연극 한 편만이 나를 울게 하였다.

이토록 많은 한국 연극을 쉴 틈 없이 이어 본 것은 무려 6년 만의 일이었다. 하여 그들이 그리는 오늘의 지형도가 궁금했다. 도입부에 제시한 물음들에 비추어 말해보자면, 많은 연극이 현실을 비판했고, 그 방식은 주로 드라마적 과잉에 치우쳐 있었으며, 화해를 전망하지 않은 채 갈등을 펼쳐 보임으로써 뼈아픈 진실을 감각하게 하는가 하면, 몇몇은 섣불리 위로를 말하느라 공허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그것들은 아름다웠는가. 고백하건대, 슬프게도 나는 객석에 앉아 좀처럼 가슴 뛰는 설렘을 겪지 못했다. 구태의연한 형식들은 마음을 건드리지 않았으며, 형식적 탐색을 등한시한 서사의 과잉과, 관객보다 먼저 우는 울음이 무대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그래도 남는다면, 그것은 모든 객석을 가득 채워준 관객과, 연극으로 채워진 봄, 그리고 바라건대 이 축제의 끝내 자족하지 않음일 것이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제 40회 서울연극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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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서울연극제, 목정원, 댓글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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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작품이나 문화 사회 현상에 대해 글을 쓰고 가르친다.
가끔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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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1호   2019-06-13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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