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TOP

연극인

검색하기

맛이 펼치는 공감각의 세계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그들이 그린 맛의 그림은
<궁극의 맛>은 원작 만화 츠지야마 시게루의 『고쿠도메시』에서 ‘재소자’, ‘음식’, ‘죄’라는 세 가지의 키워드만 가져와 재창조한 작품이다. ‘무의 시간’, ‘자정의 요리’, ‘선지해장국’, ‘파스타파리안’, ‘왕족발’, ‘펑펑이 떡이 펑펑’, ‘체’라는 일곱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식 구성의 공연은 독립적으로 보이면서도 연결되어 있다. 상처의 맛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죄와 연결되고, 인생 전체로 확장될 수 있으므로 켜켜이 쌓아 온 축적물처럼 보인다. 특히 여성 재소자들의 죄가 앞선 폭력으로 인해 발생한 경우가 많아 가해자/피해자로 구분하기 어려운 슬픔, 분노, 죄책감 등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게 했다.
또한 거창하고 화려한 음식이 아니라 단순한 맛의 음식들이 나오지만, 역설적으로 다채로운 그림들을 보여 준다. 무채색 공간인 감옥은 획일적인 수의처럼 식욕이 거세되고 번호로 불리는 것처럼 개성을 발휘하기 힘든 곳이지만, 다양한 인생이 녹아 있기에 무대는 그 사람이 그려 나가는 그림이 된다. 이는 미각뿐만 아니라 시각, 후각, 촉각을 자극하는 공감각의 세계로 관객들을 인도한다. 공감각적인 요소 역시 연극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궁극의 맛’을 떠올릴 때 음식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었을 때의 상황, 감정, 관계 등의 경험도 따라올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맛은 생존의 의미뿐만 아니라 감정과 관계들이 융합된 삶의 응결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생에 쉽게 갖다 붙이기 힘든 수식어로서 일곱 가지의 맛을 엿본다는 것은 곧 일곱 가지의 삶을 엿본다는 것과도 같았다.
‘무의 시간’(좌), ‘자정의 요리’(우) 공연사진
순환의 맛
궁극은 어떤 과정의 마지막이나 끝을 뜻하는 말이다. <궁극의 맛>에서는 끝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무의 시간’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엄마가 끓여 준 소고기뭇국을 통해 채소인 ‘무’의 시간과 無의 시간을 동시에 드러낸다. 중의적인 단어는 엄마에 대한 애증과도 연결된다. “그냥 희뜩하고 멀건 국”이지만 먹고 나면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차고, 잘 살고 있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하는 그 국은 단절되고 싶어도 이어지는 엄마의 존재처럼 생명력을 상징한다. 섬뜩한 슬픔을 주는 연기가 그 끈질김을 보여 주었다. 반면 ‘자정의 요리’는 아이의 복수를 해 “사법부를 대신한 심판자”로 불렸던 엄마가 등장하지만, 영양사가 처음에 지녔던 선입견으로서 무시무시한 이미지가 아니라 엄마로서의 모습만을 보인다. 그러나 아이에게 진짜 문어 대신 만들어 주었던 밀가루 문어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밀가루 반죽 같은 말랑한 모성만으로 끝내지는 않는다. 온 인생을 걸어 사적 복수를 해야만 하는 처참한 현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1213이라는 번호가 사회적 사건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선지해장국’은 반복되는 희생을 통해 탐욕적인 권력이 유지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국회의원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간 보좌관에게 표심을 위해 ‘제대로’ 먹는 연습까지 해야 하는 선지해장국은 빨리 넘기기 어려운 뜨거운 맛일 뿐이다. 이를 애써 먹었던 것처럼, 감옥 안에서 괜찮은 척하면서 보내는 시간은 딸에게는 상처로 남는다. 권력 앞에서 사람들의 표정이 바뀐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딸의 표정이 바뀌는 것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등을 돌리고 있는 딸의 표정을 상상하는 과정을 통해 평행선의 모녀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선지해장국’(좌), ‘펑펑이 떡이 펑펑’(우) 공연사진
‘펑펑이 떡이 펑펑’에서는 강냉이 가루와 물로 만든 펑펑이 떡을 탐한 회장이 죽는 바람에 억울하게 감옥에 간 가정부가 등장한다. 가정부는 ‘식탐이 많다는 것은 남 입으로 음식이 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것’이라고 하면서 식탐의 본질을 꿰뚫는 대사를 한 뒤, 떡을 만들어 관객들의 입에 넣어 주며 ‘남의 입에 음식이 들어가는 모습’을 기꺼이 본다. 눈 대신 내렸으면 좋겠다던 펑펑이 떡을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나누어 주는 장면에서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왕족발’에는 자부심의 기반인 동시에 폭력의 도구인 왕족발이 등장한다. 폭력의 역사가 폭로되는 순간 미래에 잠재된 폭력이 현재의 결혼을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치부를 감추고 예의를 차리며 시작했던 감옥의 상견례는 남편에게 맞을까봐 왕족발을 감추어 두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적당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성사된 만남이 과잉 정보를 교환하게 됨으로써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다를 것’이라고 말하는 남녀가 폭력의 반복성을 벗어나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슬그머니 돋아났다.
네 번째 에피소드인 ‘파스타파리안’은 간주곡처럼 등장하는 카니발이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교(FSM)’를 소재로 한 이 에피소드는 파스타신을 숭배하면서 ‘라멘’을 외치며 요리 도구로 한바탕 난장을 벌이는 장면을 통해 감옥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을 해방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이는 큰 웃음을 주면서 어두운 분위기를 밝게 전환해 준다. 그러나 마냥 즐겁게만 보여도 구원을 받고 싶어 하는 간절함만은 감옥이라는 공간과 결부되어 잘 전달되었다.
‘왕족발’(좌), ‘파스타파리안’(우) 공연사진
마지막 에피소드인 ‘체’ 역시 토사물로 난장판을 만들며 웃음을 유발한다. 웃음처럼 춤과 노래가 결합한 종교 의식은 쉽게 전염되며, 구토도 악취로 인해 전염도가 높다. 커피와 향수의 향처럼 좋은 향도 언급되지만 강렬하게 남는 것은 무대 위에서도 실제로 나는 것만 같은 토사물 냄새뿐이다. 중독자인 재소자들, 미술 치료 강사, 사진작가와 조수 모두 생리적인 작용인 구토 때문에 직업이 무화되고 체면도 벗어던지는 등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 “갇혀 있는 분들”을 사진으로 위로하겠다며 재소자들을 대상화하면서 스스로를 고상한 축에 두었던 사진작가는 자신이 무시했던 조수에 의해 토사물을 뒤집어쓴다. 이렇게 고상함을 추락시키는 과정을 통해 맛의 세계는 ‘비움’이라는 다른 체계로 바뀐다. 시각적인 공간의 문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비웠으니 채워야 한다는 대사를 통해 극은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 자리를 홀가분하게 나서는 재소자들처럼 비워야 비로소 개운해지고, 새로 채울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관객들의 비위까지도 시험하는 ‘체’는 가장 거부하고 싶은 맛일 수도 있지만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리셋 버튼이며 관객들에게도 무엇이 궁극의 맛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궁극의 길이기도 하다.
‘체’ 공연사진
식탁이 된 무대, 한데 모인 식구들
무대에서 배우와 관객은 식구가 되었다. 감옥의 인물들을 재소자뿐만 아니라 교도관, 영양사, 강사, 사진작가 등까지 등장시켜 식구가 다양하다. 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토사물로 뒤범벅된 공간에서도 계약직 강사는 어렵게 얻은 자리를 지키고자 사람들을 나가지 못하게 한다. 그 절박함은 모든 것을 망치는 결과로 이어지지만 책임을 지는 것은 강사일 것이다. 파국의 시작 역시 부담, 긴장, 불안으로 체한 강사가 했다는 점에서 이는 소화하지 못한 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까지도 관객들은 함께하게 된다.
이러한 함께 있음이 잘 체험되는 이유는 무대 덕분이다. 식탁과 의자가 지그재그로 이루어진 삼각형 공간에서 관객들은 식당에서처럼 자유롭게 앉는다. 이는 관객마다 거리 감각이 다르게 생성되는 구조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가운데에 있기도 하고, 가장자리에 있기도 하고, 관객들 사이를 지나다니기도 한다. 관객들은 배우의 얼굴을 볼 때도 있고, 등을 볼 때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움직임은 한집에서 같이 사는 듯한 자연스러움과 부대낌을 느끼게 했다. 식구라는 말이 ‘같이 살며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을 뜻하듯이, 요즘처럼 많은 사람과 맛을 함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식구 되기의 체험이 각별했다는 것도 덧붙이고 싶다. 에피소드가 전환되어도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았던 음식들처럼, 더 머무르며 흔적을 남기고 싶은 공연이었다.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

궁극의 맛
일자
2020.06.02.(화) ~ 06.20.(토)
장소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출연
강애심 이수미 이주영 이봉련 김신혜 신윤지 송광일
원작
츠치야마 시게루
각색
황정은 진주 최보영
연출
신유청
드라마터그
윤성호
조연출
김진숙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강지혜
조명오퍼레이터
김대현
조명팀
김대현 김병철 김병희 손민영 정태진 정호진 최재길
음악ㆍ음향디자인
지미 세르
음향시스템디자인
신승욱 류호성
음향오퍼레이터
장해나라
의상디자인
홍문기
의상디자인 어시스턴트
문혜민 변은아 최미림 김주현
소품디자인
최혜진
소품제작팀
김주영 박정경 이은정 배희정
분장디자인
정지윤
분장
김상민 최윤희
안무
이소영
원작 번역
이홍이
판권계약 코디네이트
원지혜
무대감독
박영규
무대제작
스테이지(대표 심광영 김재인)
무대제작팀장
김정호
그래픽디자인
일상의실천
사진기록
서울사진관
영상기록
다이핀
인쇄
퍼스트경일
관련정보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444

태그 두산아트센터, 궁극의맛, 권혜린

목록보기

권혜린

권혜린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소설과 연극에 관한 글을 꾸준히 쓰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제181호   2020-06-18   덧글 0
댓글쓰기
덧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