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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줄타기, 삶의 진실
[전문가 리뷰] 극단 백수광부 <죽음의 집2>

이진아 _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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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음의 집2>는 고 윤영선 작가의 미발표 작품이다. ‘쥐가 된 사나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작품 원고의 표지에는 “2000년 6월에 제목만 쓰고 나서 게으름을 피우다가 2004년 11월 5일 쓰기 시작하여 동년 11월 11일에 간신히 초고 끝내다”라는 메모가 적혀있었다고 한다. 사실 미발표 작품이기만 한 것인지, 아니면 초고를 대폭 고치려는 생각도 있었던, 말하자면 미완의 작품이기도 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죽음의 집2>의 부제를 그대로 제목으로 달고 있는 <쥐가 된 사나이>라는 작품도 작가는 2005년 6월에 창작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죽음의 집2>와 동일 인물로 생각되는 어머니와 사내, 그리고 여동생이 등장한다. 독립된 작품이라면 적어도 연작인 셈이다.

    죽음의집2

    이번에 이성열 연출로 선돌극장 무대에 오른 <죽음의 집2>는 윤영선의 원작을 최치언이 재창작했다. 다소 추상적이었던 경계 저편이 생동감과 디테일을 지닌 다른 차원의 일상으로 살아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여기에 연출이 만들어낸 강약과 리듬감이 그로테스크와 위트를 더 한다. 노파 역의 정은경과 사내 역의 김학수가 작가와 연출이 만든 공간에 살과 피를 돌게 한다. 그리하여 초현실적 기괴함과 현실적 일상성이 한 공간 안에서 펄떡 거린다. 원작에 없는 두 딸이 등장하여 묘한 노래도 부른다. “여자를 따라서 의사는 빗속을 뛰어왔네. 그러나 환자는 어디에도 보이지가 않네. 언제쯤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까. 돌아갈 길들은 지워지고 어둠만 깊어가네” 그녀들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소동을 만드는 꼬마 악마들 같기도 하고, 서툰 주술을 건답시고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어린 마녀들 같기도 하다. 그 소란스러운 등장이 단박에 백수광부의 전작 <야메의사>의 빨래하는 소녀들을 연상시킨다. 두 딸의 뜬금없는 출현은 집에 그로테스크한 생기를 불어넣고 어머니와 사내의 개성을 부각시키며 문 밖에 와 있다는 아버지의 영혼을 느끼게 만든다. 현실과 환상 사이의 가늘고 희미한 경계가 실은 얼마나 깊고 아득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연극은 관객으로 하여금 모든 감각을 열고 다가가게 만든다.

    진실을 드러내는 그로테스크의 힘

    기승전결이 잘 짜여 논리와 조리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발견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의 삶은 논리도 패턴도 아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사실 얼마나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인가. 사람 사이의 소통과 이해가 협소한 언어와 논리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부조리다. 우리는 항상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타인과 나누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말로 설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잘 짜인 이야기, 논리적 연결, 이런 것을 파열하는 카프카의 작품이 우리로 하여금 어느 순간 섬뜩한 진실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카프카처럼 윤영선의 작품도 그 일을 해 낸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고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가 모호한 시공간, 논리적이고 일상적인 질서가 모두 무너져버린 듯한 그 곳에서 의사가, 또 우리가 마주한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자신의 정체성과 역할이 끊임없이 의심받는 사회, 노력해도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 희생과 예의와 책임이 무한 강조되는 관계, 이런 것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문제가 바로 우리가 처한 상황 그 자체라고 연극은 말하는 듯하다. 의사는 폭우를 뚫고 밤을 가르며 달려왔지만 가족들은 환자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들은 환자를 치료해 달라고 울부짖으면서도 환자를 쉽게 보여줄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의사이지만, 또한 의사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그곳에 속하지 않는, 의사인 것이다. 화전민들의 마을에서 도시에서 온 의사는 낯선 이이다. 사실 그는 그들과 섞이지 않고서도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섞이는 것도 그의 의무이다. 그 밤에 그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일종의 불가항력이다. 그리고 그 속으로 발 디딘 순간, 경계를 넘은 순간, 그는 자신의 세계로, 저쪽으로부터 지켜온 이쪽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의사로서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울타리를 떠난 인물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는 모티프motif 뿐 아니라, 여기에 밤, 비바람, 불길한 말울음 소리를 대신하는 천둥소리, 실제로는 환자에게 소용없는 의사라는 존재 등, 연극은 많은 점에서 카프카의『시골의사』를 닮았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있자면 사실 『시골의사』보다는, 이를 각색했던 백수광부의 <야메의사>에 더 가깝다. <죽음의 집2>의 의사가 대면하는 것은 그의 내면보다는 그를 둘러싼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를 옭아맨 사회, 그에게 불가항력적인 사회이다.
죽음의집2
  • 죽음의 집2


    원작과 재창작의 거리

    연극을 보고 있으려니 원작과 비교하여 크게 달라진 점이 적잖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바위’이다. 원작에도 ‘어느 날 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바위’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모티프로 등장하지만 그것이 물리적 실체로서 시각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창작에서는 그것이 물리적 실체로, 그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집 안으로 더 깊이 들어오는 위협적인 존재로, 나아가 극의 마지막에서 파국을 만드는 역할로 등장한다. 이러한 바위의 존재는 연극에 극적 기승전결을 만들기도 한다. 주인공들의 운명을 극적으로 마무리하고 절정의 순간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기승전결은 여기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을 편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엉뚱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동시에 대단히 상징적이고 사색적 화두였던 ‘돌멩이의 복수’가 매우 구체적 실체가 되어 들어오면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모두 없애버린 것은 퍽 애석한 일이다.

    원작과 달리 재창작 되면서 시각적 실체가 되어 버린 것은 사실 바위만이 아니다. ‘쥐가 된 아들’도 그렇다. 원작에서 아들은 저 쪽 방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되는 막연한 존재였다. 어머니의 손가락에 상해를 입히고 여동생이 제 살을 베어 먹였다 하니 그가 거기 있다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의 말처럼 저 쪽 방에 있는 그것을 정말 아들이 변한 쥐라고 믿어야 하는지는 다소 모호했다. 말하자면 쥐로 변한 ‘아들’보다는 아들이 쥐로 변했다고 믿고 있는 ‘가족들’에 더 방점이 있었다고 할까. 그러나 재창작에서는 쥐로 변한 아들이 등장하여 ‘나를 내버려 두라’며 의사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연극에서도 이 장면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의사의 악몽에 더 가깝기에 쥐가 된 아들에 대한 확증을 주는 장면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무대에 등장하여 대사를 하는 인물의 물리적 현존은 확실히 원작과는 다른 곳에 방점을 찍는다.

    마지막 결론도 다르다. 원작은 다시 자신의 집 거실로 돌아온 의사가 아침을 맞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때문에 태연하게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가 정말 지난 밤 일을 겪은 것인지 아닌지는 퍽 모호하다. 그 일을 겪었다면 의사는 다시 제 일상으로 무사 귀환한 것일 게다. 혹은 다시 반복될 사건의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작과 달리 연극에서는 다음날 아침 진료실 풍경 속에 의사는 없다. 원작처럼 침실로부터 아침을 맞은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남편에게 음악을 틀어 달라 부탁도 하며 남편이 거기 있다 여기며 느긋하게 아침잠을 즐기겠다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말을 듣고 있어야 할 의사는 진료실에 없다. 그는 돌아오지 못한 것일까. 그 대신 그의 의사 가운만이 오래도록 조명을 받고 서 있다.

    꿈과 현실의 경계, 환상과 일상의 경계, 삶과 죽음의 경계, 윤영선의 <죽음의 집2>는 그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그 경계에서만이 엿볼 수 있는 삶의 숨겨진 진실을 드러낸다. 작가는 이 작품을 <벚꽃동산>과 <여행> 사이에서 썼다. 그는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2003년 가을에는 백수광부의 배우들과, 2004년 봄에는 연극원 학생들과 함께 연출가로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2005년 봄에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상복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 <여행>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그 두 작품의 사이 어딘가에 <죽음의 집2>가 놓여있는 것이다. 세 작품을 굳이 이어 놓고 보니 서로 이질적이라 생각했던 그 사이로 이어진 선이 보인다. 우리 삶은 항상 표피적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진제공 : 극단 백수광부]

태그 죽음의 집2, 윤영선, 이성열, 백수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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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이진아 연극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
본지 편집위원 
club.sookmyung.ac.kr/playgoer
웹진 30호   2013-08-1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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