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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긴>과 체홉, 혹은 각색의 문제
[전문가 리뷰] 명품극단 <라긴>

김성희_연극평론가,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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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긴
<라긴> 2013.09.25-10.06
  • 명품극단의 <라긴>(체홉 작, 김태현 극본, 김원석 연출)은 체홉의 소설 「6호실」을 각색한 연극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제목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딴 <라긴>으로 바뀐 것만큼이나 내용도 다르고, 원 텍스트의 주제나 의미와도 상당한 거리를 드러내며, 전체적인 톤이나 분위기도 매우 다르다.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만 유지하고 있을 정도이다.

    각색은 원래 원작과의 유사성을 상정하는 동시에 특수한 차이점도 내포한다. 대체로 각색은 원작에서 본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연극적으로 구성하거나, 혹은 원작을 변조하거나 해체하고 다른 텍스트들을 혼합하기도 하고, 극적 응축과 확산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소설을 각색하여 연극으로 만드는 이유는 그 소설의 서사나 메시지, 작품성, 혹은 시대현실과 통하는 코드, 세계관 같은 것이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 역시 명작소설 각색극에 대해서는 원작의 문학성이나 감동을 연극을 통해 접하고 싶은 기대심리를 갖는다. 연극을 만드는 쪽이나 관객 양자가 모두 원작의 심오한 작품성이나 삶에 대한 성찰이라는 기대지평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김원석 연출은 그동안 일련의 소설 각색 공연을 통해 깊은 인상을 심어왔다. 한 극단이 꾸준히 러시아 소설 각색 공연을 하면서 연극적 실험을 시도하고 극단 특유의 개성을 쌓아올리는 일은 상찬할 만하다. 오늘날 극단들은 너무 많지만 개성을 지닌 극단은 수가 매우 적고, 극단의 철학이나 레퍼토리의 일관성을 보여주는 극단은 더더욱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김원석 연출의 고골리 3부작이나 최근의 <죄와 벌> 3부작은 원작을 해체하여 시각적 미장센과 신체행동 연기가 주축이 된 이미지 중심의 연출이란 특징을 보여 주었다. 특히 <죄와 벌> 3부작은 핵심적인 주제 위주의 장면구성, 심리적인 인물 관계나 갈등에 집중하는 극적 응축, 문학적 대사와 시각적 이미지, 음악적 리듬의 몽타주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적 아우라와 존재론적 고뇌에 대한 성찰을 형상화했다.

    라긴
라긴
명품극단 상임연출 김원석
  • 김원석 연출은 프로그램에서 ‘라긴’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혀 체홉같지 않는 체홉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최초로 말하는 자를 만납니다. 그가 바로 침묵하는 세상에서 처음 말하는 자, 라긴입니다. 라긴은 이 세상을 비정상적인 정신이상자들이 지배하는 ‘병동’이라고 정의합니다.”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몫 없는 자’(랑시에르)로서 항변하는 목소리를 가지지 못했고, 라스꼴리니코프가 몫 없는 자들의 영웅을 자처하다 자멸했다면, 라긴은 세상에 대해 지성인으로서 발언을 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러한 연출의도를 접하면서 의아해졌다. 소설 「6호실」의 라긴에도 상반되는 해석이었을 뿐 아니라 연극에서도 그런 의도를 느끼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설 「6호실」은 잘 알려져 있듯이 체홉이 30세 되던 해 긴 사할린 여행을 하고 돌아와 189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작가의 더욱 깊고 넓어진 시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시골 자선병원 원장 라긴이 자신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유일하게 지적인 정신병동 환자 이반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감금되고 결국 간수에게 맞아 죽는다는 내용이다. 라긴은 부임 직후 불결하고 부패한 병원 실태를 접하고 병원을 폐쇄하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런 현실에 타협하여 무관심과 태만으로 일관한다. 그는 사회적 악에 대한 자신의 무저항을 죽음과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합리화한다. 라긴은 이반에게 이 세상에 고통마저 없다면 삶은 아메바의 생활과 다를 바 없이 공허하다는 ‘고통의 철학’을 피력한다. 이반은 라긴이 이론으로만 현실을 파악하지 실제의 삶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고통에 대해 나는 비명과 눈물로 대답합니다. 비열함에 대해서는 분노로,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구역질로 대답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바로 삶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6호실에는 먹기만 하는 뚱뚱한 농부 환자도 있는데, 그는 간수 니끼타가 때려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반응 능력을 상실한 이 인물은 톨스토이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통을 무시하는 라긴의 더블과 같은 존재로서, 체홉이 톨스토이즘과 결별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정신병동에 자주 드나들던 라긴은 결국 정신병자로 몰려 감금된다. 그제서야 그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되며, 간수의 구타로 사망한다. 체홉은 생활과 유리된 철학을 풍자하고, 지식계층이 사회악에 대해 강력한 저항을 하지 않음으로써 악과 부패에 영합하는 현실을 비판한다.

    라긴


    연극 <라긴>은 지성의 고결함을 숭상하며 지적 대화를 나눌 상대에 목말라 하는 라긴(남명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체홉 작품에서 정신병동이 사회악과 부패를 상징하며 고통과 폭력의 공간으로 그려졌다면, 연극에서는 이러한 상징성이 제거된 일반적인 정신병원으로 제시된다. 고통의 철학, 폭력과 감금의 어두운 분위기는 아예 배제되었다. 원작에서의 폭력적 간수는 배제되고, 동명의 인물은 고시 공부 하다 미친 환자로 등장하여 코믹한 역할을 한다. 인물들은 희극적으로 과장되거나 희화화되어 표현된다. 이반(백익남)은 관습적인 정신병 환자로 표현되는데, 환자다운 장난기와 지적 인물의 명석함, 양극을 오가는 인물로 표현되었다. 그는 라긴에게 자신은 호모사피엔스보다 진화가 더 진행된 종족이지만 소수자이기 때문에 미친놈이란 누명을 쓰고 감금되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의사-환자의 위계적 관계는 이반이 라긴을 가르치는 관계로 전도된다. 원작에서는 둘이 대등한 수준으로 벌이는 지적 논쟁을 통해 현실과 관념의 문제를 사유하게 하는 데 반해 연극에서는 이반의 입담에 설득당하는 라긴을 보여준다. 문제는 시대착오적 수법으로 종의 진화나 DNA를 운위하는 이반의 입담이 희극적 재미는 주지만 지적 담론이란 느낌은 주지 않기 때문에 라긴이 이반의 지성에 감화되는 과정에 공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원작이 라긴의 비극적 죽음이 어떻게 초래된 것인가를 사회적 현실과 철학적 입장과의 상호관계에서 조명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연극 <라긴>은 지적 대화를 갈망하던 의사가 환자의 이상야릇한 논리와 입담에 빠져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으로 몰고 간다. 그 때문에 주제와 인물의 깊이는 평면적으로 피상화 되고 만다. 당연히 이러한 각색으로 인해 공연은 체홉과 무관해지고 말았다. 또한 이 세상을 정신병동으로 비유하고 라긴에게 세상의 전도된 질서에 항변하는 지성인의 목소리를 부여하고자 한 연출의도도 구현될 수 없었다.

    연출은 관습화된 시선으로 형상화된 정신병 환자들과 사건들에 희극적 톤을 입히고 부조리극적 분위기를 가미했다. 인물들이 일그러지게 비치는 아크릴 판, 이동이 가능한 창호지 문, 오리털이 무대를 덮는 시각적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이 극이 내포한 아이러니와 전도된 진실이라는 기의를 표현했다. 그러나 극 전체가 핵심적 주제나 명확한 작품의도를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장식적 효과에 불과할 뿐이다.

    각색 공연은 창조적 해석이나 새로운 글쓰기도 필요하지만 원작의 작품성이나 심오한 성찰을 무시하는 ‘배반’이 과연 유의미한지, 예술적 완성도를 가진 것인지를 먼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연극은 솔직해져야 한다.
[사진제공 : 명품극단 / 사진 : 신귀만]

태그 라긴, 체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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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연극평론가, 한양여대 교수
여석기연극평론가상 수상
저서로 <한국연극의 형성과 쟁점>
<한국연극과 일상의 미학><연극의 세계> 등이 있음.
웹진 33호   2013-10-10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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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디B
각색을 통해 원작의 심오한 깊이나 삶의 성찰을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하는 참신성이나 아이디어에 기대심리가 있었기에 이번 라긴은 잘 알려지지 않은 체홉의 던편에 호기심을 갖게 해주었단 점에서 긍정적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풍자와 패러디가 완전히 체홉적인 이미지에서 자신았게 해방되지 못한점은 아쉬웠습니다.

2013-10-11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