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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권력욕과 여성의 생명력
[전문가 리뷰] 국립극단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김성희_연극평론가, 한양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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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2012.11.26
전규찬, 한종선, 박래군 저


  •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공연 전부터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는데, 극작가 김지훈과 연출가 김광보의 이질적인 개성의 조합이란 점에서였다. 김지훈은 데뷔작 <원전유서>(2008)로 연극계에 메가톤급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4시간 반에 달하는 공연시간, 방대한 서사와 거대담론, 신화적 상상력을 통한 문명비판, 폭포처럼 쏟아지는 사변적 대사의 힘을 보여준 이 연극은 그야말로 인문학적 사유와 독창성이란 점에서 다른 작가와의 비교를 불허하는 대형 신인 극작가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었다. 이후 발표한 <풍찬노숙>(2012)도 4시간 반짜리 대작, 거대담론과 신화적 상상력, 혼혈족의 건국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원전유서>와 같은 계보에 놓인다. 국립극단의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역시 방대한 서사, 거대담론과 신화적 상상력, 건국신화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계보(작가는 이를 ‘수직적 상상력’이란 말로 표현한다)에 속한다. 연출가 김광보는 텍스트를 존중하면서 깊이있는 분석으로 서브텍스트의 의미구조와 상징성의 표현에 능한 연출가이다. 그의 연출은 장치를 최소화한 미니멀리즘의 무대를 근간으로 알레고리적인 함축성과 상징체계를 구축하고, 희극적 유머와 페이소스를 겹쳐놓으며, 반복과 차이를 통한 리듬감의 세계를 구현해낸다. 그래서 김지훈의 거대서사와 김광보의 미니멀리즘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낼지에 대한 기대가 각별했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실제로 공연은 4시간 짜리 분량의 작품을 줄여 2시간으로 압축했다. 그래서인지 전작들에 비해 플롯이나 인물들, 대사들은 좀더 간결해지고 비약과 생략이 이루어져서 맥락을 이해하는 데엔 관객의 적극적인 상상력과 해석이 필요해졌다. 이 연극은 김지훈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주인공의 중심 사건과 갈등을 주축으로 전개해 나가는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리좀형 구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리좀Rhizome은 뿌리이자 줄기를 이루는 식물을 가리키는 식물학적 용어인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리좀이란 비유를 통해 중심과 주변의 구분이 없는 등가의 선들이 자유롭게 교차하며 무한증식이 가능한 구조를 제시했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도 도련님, 화전민 여인들, 대장군, 무당, 병사들 등 다양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많은 장면들을 중심과 주변의 구별 없이 연결해 나가면서 무한증식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 연극은 “새벽밥 먹고 개국한 나라가 저녁밥 먹고 망하는” 난세, 국경 가까운 시공간을 배경으로 나라를 창업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간 도련님(이승주)의 군대를 보여주며 시작된다. 적은 강 너머에 있는데, 봄이 되어 강의 얼음이 녹은지라 건너가 싸울 수 없다. 군대는 도련님을 대놓고 무시하며 대장군의 명만 따르고, 전쟁도 하지 않으면서 밥만 축내고 있다. 도련님과 대장군(이호재)의 권력 투쟁이 희화화되는 가운데, 둘다 상대방을 쓰러트리기 위해 무당의 예언을 이용한다. 무당은 왕이 되기 위해선 배롱나무를 도성에 옮기고, 여인들의 가랑이에 쏟아지는 피가 붉으면 모두 죽으리라는 예언-저주를 남긴다. 남성들의 권력 투쟁, 권력에 대한 욕망, 이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 살상 같은 내용이 뻗어나가면서 많은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한편 화전민 여인들은 농민병사들이 파종하러 고향에 다녀오겠다며 길양식을 빌려달라고 하자 그들의 무기를 담보로 씨종자를 빌려준다. 여인들은 적장의 깃발을 줍자 지붕으로 덮고 농민병사가 돌아올 때까지 진지에서 밭을 일구며 생활하는 바람에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이란 지칭을 얻게 된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작가 김지훈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작가 김지훈 [출처] “어깨 힘 빼고 대중 속으로… 극작가 김지훈 씨” 채널A, 2013.01.07일자

  • 연극은 알레고리적 형식 속에서 이분법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남자들이 전쟁과 권력 투쟁을 일삼고, 가부장적 남성주의를 내세우며 약자에 대한 억압과 횡포를 일삼고 죽음을 가져오는 존재로 그려져 있다면, 여인들은 곡식을 나눠주고, 파종하여 가꾸고, 다람쥐 같은 뭇 동물들과도 조화롭게 공생하는 생태주의자, 모성과 생명력을 표상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 연극은 건국신화와 역사를 패러디하고 희화화한다. 건국의 조급한 욕망, 권력욕에 가득찬 도련님은 가려움증을 고치고자 인육을 먹는다. 개국을 하고 왕이 된다는 것은 민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맘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군림하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 심지어는 생모도 죽이는 존재로 풍자된다. 도련님은 자신이 배롱나무의 열매로 태어났다는 열매론과 여인들의 월경을 금하는 개짐론을 선포하고, 문관에게 기록하게 한다. 이는 난생설화나 짐승양육 신화로 포장된 남성주체의 건국신화, 가부장적 역사를 패러디한 것이다. 또 역사(서술)는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승자의 시각으로 쓰여지고 조작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무식한 칼잡이 무장들과 관념적인 형이상학을 주창하는 유자들의 대립구도도 재치있는 역사 패러디다.

    이렇게 김지훈 특유의 거대 서사와 이야기의 재미, 기발한 상상력, 블랙 유머와 생활정서, 관념과 구체성을 가로지르는 화려한 수사학적 대사의 힘과 에너지가 연극을 추동해 나간다. 그러나 극의 중반을 지나면 서사의 억지스러운 논리와 인물들이 벌이는 사건들이 설득력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하면서 극적 긴장이 풀어지고 메시지가 모호해지고 만다. 인육을 계속 먹는 도련님이란 설정은 권력 욕망의 과도한 희화화이자, 역사 속의 권력자란 보편적 함의와 동떨어지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집단 캐릭터인 병사들과 여인들의 대거리는 입담 싸움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실제 싸움은 여인들이 병사들을 무기로 살상하며 오랫동안 우위를 지키는 점에서 실감이 결여된 병정놀이 같았고 주제적 모티프에서도 빗나갔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무엇보다 이 극에서 억지스러운 설정은 ‘개짐론’이었다. 여인의 월경이 권력자에 역심을 품은 것이라고 조작하고 월경을 금하는 명령으로 강력한 권력 체제를 획책한다는 설정은 이 극의 정치적인 메시지나 알레고리적 성격을 희화화시키고 설득력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광적인 권력의지의 화신이라 할지라도 거느릴 백성이 있어야만 권력 행사와 유지가 가능하다. 그래서 생명의 잉태와 세계의 지속성에 관여하는 여성의 월경을 금한다는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알레고리라 할지라도 설득력이 빈약하다. 또 신궁 ‘투항자’가 권력자의 하수인으로 많은 사람들을 백발백중 쏘아 죽이는데, 이처럼 신이한 인물의 능력으로 사건을 풀어가는 것도 편의적인 발상으로 보인다.(그렇다면 신궁에겐 왜 권력욕망이 없을까?) 매지가 피살된 후 독선생(김재건)이 도련님을 쏘게 하고, 산이 움직이는 것으로 끝을 맺은 것은 서사의 논리에 따른 게 아닌 작위적인 결말로 보였다. 도련님에게 충성했고 권력욕망이 암시되지 않았던 독선생이 권력을 찬탈하려 한 것인지, 이 급작스런 행위는 모호했다. 산이 움직인다는 신화적 결말은 여성의 생명력과 관련을 가져야 할 텐데, 남성들의 극한의 권력욕망이 만들어낸 세계의 균열과 결부되어 있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서사의 빈 구멍과 논리적 파탄 외에도, 알레고리 형식 속에 담아낸 시의적인 문제의식이 빈약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원전유서>에서는 쓰레기산과 내다버린 노인이란 메타포로 시의적인 문명비판을 보여주었고, <풍찬노숙>에서는 다문화사회에서의 인종차별이라는 시의적인 주제를 그렸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남성의 권력욕망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균열, 그 균열을 메꾸는 여성성(작가의 말)을 대비해서 그리고는 있으나, 내용은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대립구도에 머물 뿐 시의적이고 현재화시키는 맥락과 의미 구조가 부족했다. 연출은 복잡한 서사와 인물들, 장면들을 미니멀하게 압축하고 재기발랄한 연극적 장치와 무대약속들로 구현했다. 악사와 배우들은 넓은 무대 좌우에 배치되어 역할이 있을 때 출연하는 서사극적 기법으로 인물과 사건에 대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악사들은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들로 연주 뿐 아니라 다양한 자연의 소리들, 활쏘는 소리 등 음향효과를 만들어냈다. 무대(박동우)는 전면 중앙의 고립된 도련님의 공간을 폐쇄적인 관처럼 표현하여 권력욕망과 죽음을 시각적 메타포로 연결시켰고, 전쟁터 역시 수직적으로 높아지는 공간에 나무 관들을 쌓아 올림으로써 죽음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시청각적인 상징성과 다의적인 울림을 안겨주는 무대, 젊은 배우부터 노년 배우들에 이르는 폭넓은 연령층의 원숙한 연기 앙상블, 공들인 연극미학은 그럼에도 이 공연을 즐기게 한 요소들이었다.

태그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국립극단, 김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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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연극평론가, 한양여대 교수
여석기연극평론가상 수상
저서로 <한국연극의 형성과 쟁점>
<한국연극과 일상의 미학><연극의 세계> 등이 있음.
37호   2013-12-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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