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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과 바닥>에 대한 자기 분열적 평
[색깔 있는 리뷰] 오카다 토시키 & 첼피쉬 <지면과 바닥>

김민승_작가, 드라마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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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공연을 보고 나서 ‘좋다!’라고 말할 때,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 때는 없었나요? 저는 가끔 그런 모순된 심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좋은데 가슴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던가, 가슴으로 확 와 닿았는데 머리에서 납득하기 어렵던가, 그런 심정 말입니다. 저는 오늘 그런 모순된 경험 중 하나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오카다 토시키의 <지면과 바닥>을 보고 나서 바로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거창하게도 자기 분열적인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 리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두 가지 이유에 의해서 자기 분열적인 리뷰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오카다 토시키의 전작인 <현위치>와 자꾸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위치>는 <지면과 바닥>처럼 첼피쉬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통해 3.11 후쿠시마 사태를 다룬 작품입니다. 그러니 작년에 <현위치>를 봐 버린 이상, 두 작품을 연장 선상에 놓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의 연극계에 불고 있는, 다원 예술의 바람에 대한 씁쓸함을 상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역시 생각 안 났다면 모르겠지만, 이왕 떠올라 버렸다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지요. 글쎄요, 어쩌면 일본인 작가가 유럽의 지원을 받아 만든 작품을 한국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는 점 자체가 자기 분열적인지도 모르겠네요.


자기 분열의 증상 1.

3.11 후쿠시마 사태 이후의 일본 사회에 대한 성찰을 담은 오카다 토시키의 <지면과 바닥>에서는, 구체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살아있는 인물이기보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공간으로서 등장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름과 배경을 지닌,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설정해두었다 하더라도 이들의 기괴한 움직임은 현실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굳이 말하자면 초현실적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안한 땅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의 컨셉과, 이들의 움직임의 스타일은 주제 면으로도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첼피쉬는 늘 일상의 행위 요소들을 해체하여 반복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도들을 해 왔고,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시도가 ‘인물이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지면과 바닥>에는 다섯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죽은 자 혹은 일본의 과거를 상징하는 자로서의 무덤 속 엄마, 불안함을 끌어안은 채 혹은 외면한 채 그 안에서 새로운 미래를 일구어나가려는 차남, 이 땅에서 새로운 미래란 없다는 생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는 며느리, 그 사이에서 갈등하며 특별한 입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장남,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극복하지도 못한 채 자신만의 공간에 스스로를 가둬둔 이들의 친구 사토미, 이 인물들은 현재 일본의 암울한 미래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지요.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일본 땅에 대해 가지는 서로 다른 입장, 그 자체가 서로 넘나들 수 없는 각기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좀 전에 언급했던 이들의 기괴한 움직임―이들은 서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대화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각자 파편적, 반복적으로 움직임을 만듭니다―과 관련됩니다. 이들의 움직임은 자신만의 배타적인 공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입장' 혹은 '관점'과 같은 개념들이 어원상 공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겠네요. 입장(立場, position)이란, 결국 내가 서 있는 장소, 즉 공간의 개념을 바탕으로 성립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들의 입장은 하나의 공간이 되어 자신만의 '땅'을 차지합니다. 이들은 동일한 '지면'(ground)에 놓여있는 것으로 보이지만─실제로 관객들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등장해 있는 한 이들을 한눈에 볼 수 있으므로─, 서로 배타적인 방식으로 '바닥'(floor)을 점유합니다. 예를 들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는 물론, 며느리와 장남, 차남 등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에서도 이들은 서로의 말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여하고 있지만, 서로를 물리적으로 의식하는 공간감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인물인 동시에 각기 다른 공간을 대변하는 이들 입장들은, 일본이라는 땅을 대하는 각자의 입장인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은 채 각자의 고립된 공간에서 끝까지 평행선을 달립니다. 즉, 차남이 곡괭이질을 하며 재건해 나가는 공간과, 며느리가 그토록 떠나고 싶어하는 공간은 내내 동일한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면과 바닥>

<지면과 바닥> ⓒHirohisa Koike
[출처]페스티벌 봄

이러한 독특한 공간 인식에는 자막도 톡톡히 하나의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자막을 보조적인 장치로 처리하였던 여타의 공연들과 달리, 모두를 눌러버릴 듯 중앙에 자리 잡은 거대한 십자가―물론 십자가 모양 자체도 이런 운명적인 무게를 의도한 것이겠지요―를 통해 흘러나오니까 마치 자막이 공연의 중심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일본어로 공연을 보여주는 기묘한 상황을 반어적으로 빗대는 동시에, 일본 땅의 불안한 미래를 일본어의 불안한 미래로 연결하는 주제 의식과도 연결됩니다. 히키코모리인 사토미―히키코모리는 은둔형 외톨이를 뜻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사토미가 이 공연에서 가장 말이 많았습니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관객들을 향해 자막이 자신의 말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데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장면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겠지요. 물론 사토미의 입을 통해 연출로서의 말이 너무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만.


자기 분열의 증상 2.

여기까지 저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공연에 대한 생각이었다면, 가슴에서 흘러나온 몇 가지 의구심들이 있습니다. ‘그 의구심들이 무엇이었을까’를 다시 머리로 파헤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저는 어떻게든 설명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니까 그 의구심들의 원인을 나름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단 <지면과 바닥>은 작품 콘셉트부터 다원예술의 성격을 좀 더 강조한 듯 보였고, 실제로 다원예술로서의 훌륭한 면모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작품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작품을 '음악극'이라고 규정했고, 그만큼 음악이 배우의 움직임과 비슷한 정도의 비중으로 구성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전작인 <현위치>에서 음악은 배경이나 조명과의 상호작용을 이루었다면, <지면과 바닥>에서는 음악이 배우의 움직임과 연동되었지요. 말하자면, <현위치>보다 <지면과 바닥>은 적어도 다원예술의 관점에서 진일보한 측면이 있으며 오카다 토시키 역시 이 작품에 대한 소개에서 다원예술의 특성을 강조하여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위치>에서 느꼈던, 저를 서늘하게 관통하는 무언가를 <지면과 바닥>에서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서늘하게 관통하는 무언가’를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굳이 추측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먼저, <지면과 바닥>에서 공간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결부시킨 점은, 시도는 좋지만 허무한 결론으로 매듭지어졌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이들이 무엇을 지키려는 것이고 무엇을 떠나려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일본의 과거와 일본의 언어라는 두 요소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결론이 불분명하여 더욱 불안했던 <현위치>의 문제의식은 <지면과 바닥>에서 더욱 구체화된 셈입니다. 하지만 <지면과 바닥>에서의 구체화 방식은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태에서 연역적으로 이끌어진 것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게임 끝인 상태에서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도덕적인 뉘앙스로 '죽은 자와 산 자의 화해'를 기원하는 결말을 이끌어내다 보니, 이 문제가 극 안에서는 깔끔하게 결론을 지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땅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과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일본의 과거'와 '일본의 언어'라는 민족 정체성의 틀 안에서만 결론 맺어진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은 자인 엄마는 결말 부분에서 "가끔씩 찾아와 소중한 일본어로 말을 걸어주렴. 네가 조금씩 말을 배울 때를 생각하며 엄마는 여기 있을게."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대립 구도, 공간의 소멸과 언어의 소멸 문제의 병치 등 예사롭지 않았던 문제의식은 이렇게 서둘러 봉합된 채 끝을 맺었습니다. <현위치>에서 관객을 감염시킬 정도로 체화되었던 불안의 감각을, 1년 만에 <지면과 바닥>을 통해 성급하게 봉인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지점입니다. 즉, <현위치>가 불안을 감염시켰다는 점에서 연극적으로 탁월했다고 볼 때, 이 작품은 안타깝게도 ─기술적으로는 음악이 진동의 촉각을 불러일으키는 등 더욱 공감각적인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감염시키기보다는 관객들로 하여금 불안을 응시하거나 평가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네요.

<지면과 바닥><지면과 바닥>
<현위치> ⓒTsukasa Aoki
[출처]두산아트센터

페스티벌 봄
2014.03.14~04.13 페스티벌 봄
그러므로 여기서 제가 경험한 평자로서의 자기 분열은, '관객은 무엇을 경험하는가'라는, 고리타분한 질문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다원적 시도의 바람을 의식한다면, <지면과 바닥>은 <현위치>에서 진일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음악과 무용─음악과 죽은 자의 등장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고전 양식인 '노(能)'의 요소도 포함시킬 수 있지요─은 내러티브 자체와 거의 동등한 자격으로 절묘하게 결합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보여주는 공간감은 그 자체로 주제 의식의 일부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절묘한 선택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이되기보다는 보여주기로 의식되는 지점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다원예술을 지향해 마지않는 우리 공연예술계의 거대한 바람을 고려할 때, 저는 그저 "우리는 왜 공연을 보러 가는 것일까?"라는 어린아이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연극계 내외에서 다양한 시도들이, 융합이나 복합, 다원의 이름으로 시행되어 왔습니다. 그 와중에 그러한 타이틀 자체가 목적인 작품들도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면과 바닥>은 어쨌든 좋은 주제 의식―다소 한계가 있기는 하나―에서 비롯된 작품이므로 그런 작품들과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창작자나 관객이나 다원예술에 대한 의식이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몰아가는 부분들을 경계하고 싶을 뿐입니다. 작품에서 우선시 되어야 할 무언가가 그 타이틀 때문에 뒤로 물러나는 일을 경계했으면 하는 바램이랄까요? 그러므로 이 질문은 비단 이 작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8년째로 접어든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에 대해서도 묻고 싶은 질문이며, 나아가 다원예술(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문화예술계 관계자들에게도 묻고 싶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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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승

김민승 작가, 드라마터그
작: <구름>(2013), <원치않은, 나혜석>(2012)
드라마터지: <적벽가>(2014),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2013), <두뇌수술>(2012), <나는야쎅스왕>(2011), <아무튼백석>(2011) 외
수상: 2009년 제6회 젊은비평가상, 2012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두뇌수술>
제42호   2014-04-17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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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철
음 그러니까 빛깔과 몸짓 등 보여지는 것들과 음악 같은 들리는 것들을 신경쓰다가 감동을 주는 이야기를 놓쳤다는 말이죠? 색깔있는 리뷰가 뭔지 기대했다가 넘 어려워서 다 읽기가 힘들었답니다. 쉬운 색깔로 보여주세용

2014-09-14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