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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의 질문 vs 연출가 최진아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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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난번에 이어 ―물론 저의 지난번 리뷰를 기억하시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여겨지지만― 이번에도 자기 분열적 리뷰를 쓰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있었을 리야 만무하고, 어쩌면 그 정반대의 이유에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요즘 시절에 리뷰 따위 잘 읽히지도 않을 거라면 적어도 솔직하게나 써보자는 심정이랄까요? 물론 진정으로 솔직해질 리는 없겠지요. 특히 글쟁이들한테는 어림도 없는 소리일 겁니다. 하지만 제가 자기분열을 억지로 일으키는 동안, 즉, 앞에서 이런 소리를 늘어놓고 뒤에서 또 그 반대되는 얘기를 늘어놓는 동안, 제가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가 고개를 삐죽 내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에게는 중요한―미안하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아니더라도― 무언가가 말입니다.

자기 분열을 꿈꾸는 리뷰 이미지

1. <칼리큘라>를 보러 간 평자의 입장에서

저는 크게 두 가지 점 때문에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카뮈의 텍스트라는 점, 나머지 하나는 그것을 최진아 연출이 공연으로 올렸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최진아 연출이 소위 ‘명작 텍스트’를 공연으로 만든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첫 선택이 왜 하필 이 작품이었는지도 역시 궁금했지요.
출판사 ‘책세상’에서 나온 카뮈전집 12권에는 이 작품의 원작 희곡인 『칼리굴라』와 함께 ‘나는 왜 연극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대담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카뮈는 예술이란 “현실에서 출발한 상상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연극이야말로 작가가 군림하지 않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데서 출발하는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카뮈 생각대로라면 『칼리굴라』는 현실에서 출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여, 연극 본연의 상호의존성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만들어져야겠지요.
‘칼리굴라’는 로마의 황제이자 폭군이며 기행을 일삼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카뮈는 그가 저지른 폭력들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기 위한 하나의 시도인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즉, 결국은 죽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삶에 집착하는 데에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순이 놓여있으며, 이러한 모순은 도덕이나 합리 등의 이름으로 더욱 견고해진다고 본 겁니다. 그런 점에서 일단 희곡 『칼리굴라』가 명백히 당대의 현실에서 출발한 작품이라는 점, 매우 당돌한 질문을 거침없이 던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당시 유럽인들이 엄청난 폭력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불합리함이나 광기와 같은, 우리가 흔히 ‘폭력적’이라고 여기는 요소들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치즘을 비롯하여 수많은 전쟁과 약탈이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카뮈의 질문은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안전을 추구하고 도덕을 세우려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으로 인간성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카뮈는 ‘칼리굴라’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 땅의 ‘도덕’ 혹은 ‘도덕주의자’를 맹렬히 공격하였으며, 여전히 불합리를 합리로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살아있음은 오직 인내의 문제”라고 외칩니다. 아마도 그러한 구조적인 모순은 역설적으로 칼리굴라식의 파괴가 아니고서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공연 <칼리큘라>는 작품이 근본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질문을 무난히 풀어냅니다. 공간은 착실히 활용되었고, 내러티브는 무리하지 않게 짜였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예술가들이 등장해야 할 부분에서 배우들이 갑자기 실제 배우 자신으로 돌아가게 된 장면 역시 의미와 효과 면에서 좋은 시도였다고 봅니다.

자기 분열을 꿈꾸는 리뷰 이미지

2. 굳이 <칼리큘라>를 보러 갈 필요는 없었던 한 명의 창작자의 입장에서

저는 사실 이 공연에 대해 무어라 말한다는 점 자체가 매우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편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같은 배를 탄 입장에서 오는 난처함이 그 하나라면, 나머지 하나는 결국 저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지적이라는 점입니다. 잘 알고 지내는 모 연출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평론가들이 “왜 이런 공연을 하느냐, 관객들이 왜 이런 공연을 봐야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말하는 것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이 질문들이 유효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매우 따분할 만큼 오래되고 그만큼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이 그다지 생산적이지 않은 이유는 모종의 공범자로서의 우리 사이에서 이런 질문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은 새까만 블랙홀만큼이나 공허할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저는 공연을 볼 때마다, 그리고 공연 창작의 일선에서 은밀한 공모를 자행할 때마다, 이 질문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해로운 질문일 수도, 케케묵은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던지지 않아도 될 질문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단, 이 질문은 대답이 필요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그저 품고 있기 위한 질문이겠지요.
이 질문들을 품은 채 다시 공연 <칼리큘라>로 돌아가서, 작품이 쓰인 1940년대의 유럽에서 던질 수 있었던 카뮈의 질문을 현재 우리의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던질 수 있을까요? 물론 인간 삶의 부조리의 문제는 시대를 초월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범인류적인 질문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질문의 무게나 방식이 만만치 않습니다. 특히 2014년의 대한민국이 처한 또 하나의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말입니다. 도덕이 실종되고, 국가가 무법을 자행하는 전제적 폭력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서, 카뮈가 던진 질문을 그대로 던지는 것은 유효할까요? 혹은 이 질문이 또 다른 질문으로 연결될 수는 없었던 걸까요? 그것은 2014년을 오버랩하기 위하여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현재 상정 중인 법안들로 대사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좀 더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봅니다. 공연 <칼리큘라>는 적어도 카뮈가 던진 질문을 잘 붙들고 나아가 주었다는 점에서 미덕을 지닙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작가인 카뮈가 던진 질문을 극단 놀땅에서는 어떻게 받아서 던졌는가에 대해서는 답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공연 <칼리큘라>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제는 슬슬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진: Play for Life 제공]

태그 극단 놀땅, 칼리큘라, 알베르,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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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승

김민승 작가, 드라마터그
작: <구름>(2013), <원치않은, 나혜석>(2012)
드라마터지: <적벽가>(2014),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2013), <두뇌수술>(2012), <나는야쎅스왕>(2011), <아무튼백석>(2011) 외
수상: 2009년 제6회 젊은비평가상, 2012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두뇌수술>
제52호   2014-09-18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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