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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너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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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 극장의 주인. 연극이 있던 자리를 배회하는 존재. 말해졌으나 등장하지 못한 인물들과 잔치를 벌이네. 내가 살피는 건 너의 마음. 연극을 보기위해 찾아오고 떠나간 관객의 얼굴에서 이야기를 찾아내지. 나는 유령. 극장은 나의 집.

그것은 너의 연극

남자가 더 멀리서 왔는데. 남자가 더 오래도록 아플 텐데. 남자가 더 할 말이 많을 텐데. 그런데. 여자는 면목 없다면서. 묻어둔 옛이야기를 꺼내고. 기억할 때마다 마음이 저릿하다면서. 용서받지 못할 사연들을 들춰내고. 그러다가. 작은 잘못을 부끄러워한 요정이 숨어버린 꽃. ‘작약’을 키우고 싶다고 하고. 자전거를 개조해서 휠체어와 붙인 것도 남잔데.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싶어서. 길고 긴 얘기에 입과 목이 쉬어가야 할 때, 물과 껌을 주는 것도 남잔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이렇게 노래해도 들어주는 건 남잔데.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쿵짝짝 쿵짝짝. 3박자의 느린 왈츠. 참전 군인들을 위로하던 여가수 송민도의 옛 노래. 정직한 노랫말이 진한 여운을 남기네. 여긴 내 집. 난 게릴라 극장의 유령. 체 게바라의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관객인 너를 관찰해. 객석에 앉아 무대를 응시하는 너를.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등 뒤에서. 너를.

너에게 연극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것이지만, 나에게 연극은 객석에서 벌어지지. 남자배우(이대연)가 특유의 멋쩍은 미소를 지을 때 너는 따라서 웃고. 여자배우(이연규)가 새침하게 등을 돌릴 때 너는 따라서 입을 다물었어. 즐거운 연극 보러 왔는데 이게 뭐야, 하며 울상을 짓다가도 나중에 훌쩍이며 보러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죄의식, 불편함, 미안함이 범벅된 네 표정을 보는 게 즐거워. 로비가 없어 문을 열면 바로 세상과 연결되는 이 극장. 그 바깥으로 결연한 얼굴의 너를 내보내는 게 큰 기쁨이지.

그것은 너의 연극

너는 ‘남겨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지. 그들 부부는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아파트가 무너져 깔린 거주민들, 중동에 파견되어 모래폭풍에 휩싸인 노동자, 몸에 기름을 붓고 산화한 방직공, 그리고 돌봐줄 사람 없이 죽어간 상이용사.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죽은 많은 사람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다 보니 새삼 알게 됐지. 우린 모두 유가족의 후예라는 걸.

너는 살아서 ‘남겨지기’ 위해 여자가 택했던 외면과 절도, 그리고 도피의 순간들을 천천히 마주하게 되지. 구질구질하게 살기 싫어서. 가난하게 살기 싫어서. 여자는 그렇게 하면 잊게 되고 없어지는 줄 알았다고 했지. 허나 국가에 의해 버려지고, 가족들이 돌보지 않았던 그 존재들은 다시 돌아왔어. 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부르면서. 그래, 네 예감이 맞았어. 이야기의 끝에는 거대한 참사가 있었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이었어.

너가 진심으로 극장을 믿었던 그 순간, 여긴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5-29번지가 아니라 대구의 용수동에 있는 시민안전 테마파크로 변했지. 참사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묘지. 비석도 표시도 없이. 그들 부부의 자식이 묻혀있는 데.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가로등 쪽으로 여섯 걸음. 그마저도 암매장된 것으로 오해를 받는 곳. 그래, 비극적인 사건 그 자체가 ‘끝’ 인거 같지만, 유가족에겐 ‘끝’ 이후도 있었지.

비로소 너는 알았어. 이 연극은 치매에 걸린 그 여자의 ‘업보’ 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는 걸. 인과응보를 깔아뭉개는 국가의 오만을, 윤리를 내동댕이친 인간의 야만을.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의 비참을 전하고자 했음을. 너는 그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로. 상처와 슬픔의 극복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몸을 부르르 떨면서 공감해 주었지. 살고 싶으면 아무도 믿지 말고 달아나라는 절규가 남자의 본심이 아님을. 너는 잘 알고 있었어.

“10년이에요, 10년. 연극을 보고 왔는데 거기서 나온 부모가 다 늙었어요. 죽은 자식을 슬퍼하고 기억할 수 있게 허락받는데 10년이 걸렸어요. 싸우는데 그 시간을 다 보냈어요. 점점 멀어져요. 본질에서 더 멀어지고 있어요.” 난 알아. 네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극장을 나서며. 연극을 보고 왔다고 누군가에게 말하며. 이 연극과 비슷한 현실을 마주하며. 그 남자와 여자처럼 세상에 소리 지르고 싶던 네 마음을.

그것은 너의 연극

네가 해맑게 웃던 장면도 있었어. 월남에서 돌아온 예비역 남자가 독일을 꿈꾸던 간호사에게 다짜고짜 청혼하던 그 시절을 떠올릴 때. “재수 없어, 따라오지 마요!” 단호하게 말하는 젊은 시절 여자의 말엔 까르르. 휠체어와 자전거를 결합한 이동-차가 무대를 돌면서 만남과 결혼 그리고 짧은 휴가를 압축적으로 표현할 땐 하하하. 하지만 중동에서 한국으로, 다시 중동으로 쫓기듯 떠나던 이들의 ‘보름살이’ 사랑은 나중에 너를 애달프게 만들었지.

연극의 마지막. 여자의 독일어 연습은 유난히 너의 귓가를 맴돌았지.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나는 한국에서 왔어요. 아니요. 여기서 멀어요. 나는 먼 데서 온 여자예요. 앙다문 입술 사이로 슬픔이 배어 나오는 남자의 얼굴. 모든 걸 잊고 말겠다는 여자의 천진한 얼굴. 그 얼굴에 얼굴이 겹쳐지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자전거 벨소리. 따르릉 따르릉. 이 소리는 망각된 죽음에 대한 경종일까. 공허한 삶에 대한 비명일까.

자, 여기까지가 너를 지켜본 나의 소감이었어. 내 집을 다녀갔던 네가 느낌을 말해줄 차례야. 어쩌면 시간은 충분하겠지. 먼 데서 오고 있는 이 연극은 아직도 우리에게 도달하는 중이니까. 장내를 가득 채웠던 박수소리. 그렇게 힘껏 두 손을 마주친 너의 감상을 들어볼 거야. 이제부터.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먼 데서 오는 여자 포스터

일시
9월 12~28일
장소
게릴라 극장
배삼식
연출
김동현
출연
이대규, 이연규

태그 그것은 너의 연극,극단 코끼리만보,먼 데서 오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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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세

정진세 극단 문(Theatre Moon) 극작가.
연극원에서 연극이론과 서사창작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주로 홍대 앞에서 공연제작 및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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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호   2014-10-0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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