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top

연극인

검색하기

지적인 유희, 또는 몰라도 웃을 수 있는 연극

목록보기

  • 링크
  • 프린트
  • 페이스북
  • 트위터

연극열전5th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

많은 공연 중에 왜 하필 이 작품을 골랐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솔직히 말해본다면, 우선 토니상을 비롯하여 무려 9개의 작품 관련 상을 거머쥔 연극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연말연시, 유쾌한 웃음과 아련한 추억으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연극’이라는 프로그램 타이틀을 보면서, 도전해 보고 싶은 엉뚱한 치기를 느꼈는지도 모르지요. 종합해 보자면, 제 취향이 아닐 것 같지만 크게 인정받은 작품을 보면서 제가 무슨 소리를 하게 될지 스스로 궁금했던 겁니다.

공연을 보기도 전부터 ‘취향이 아니다’라고 감히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사실, ‘유쾌한 웃음’, ‘아련한 추억’, ‘희망’의 3종 종합 세트라는 점부터 불길한 징조였습니다. 이 3종 종합 세트는 저로 하여금 감성팔이, 근거 없는 희망 노래 등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무엇보다도, ‘곳곳의 체홉 퍼즐을 맞추는 지적인 유희’라면서, 동시에 ‘체홉이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관객도 충분히 웃으며 즐길 수 있다’고 말하는, 모순적인 소개 문구는 매우 불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유형의 관객을 감싸 안겠다는 야심찬 포부인 줄은 알겠으나, ‘모든 것=아무것도 아님’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단, 실제 공연 자체는 연말연시용 감성팔이를 주목적으로 삼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 문구와 공연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이 경우엔 그것이 다행인 셈이지요. 작품의 콘셉트는 오히려 꽤나 과감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체홉의 4대 희곡 캐릭터들이 현대의 코미디로 다시 태어나다니, 자칫 체홉 팬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런 점에서 오히려 재미있는 기획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이 체홉의 캐릭터들과 일대일 대응이 아니라 일대 다 대응이라는 겁니다. 즉, 바냐는 <바냐 아저씨>의 바냐, <갈매기>의 뜨레쁠레프, <벚꽃동산>의 가예프를, 소냐는 <바냐 아저씨>의 소냐와 <세자매>의 이리나를, 그리고 마샤는 <갈매기>의 아르까지나, <바냐 아저씨>의 세레브랴꼬프, <벚꽃동산>의 라네프스카야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인물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바냐와 소냐와 마샤는 남매간입니다. 바냐와 소냐는 부모 병간호를 하다가 어느덧 무력하게 나이만 들어버렸습니다. 배우이자 다섯 번의 이혼 전력이 있는 마샤는 어느 날 스파이크라는 젊고 잘생긴 배우를 애인으로 대동하고 나타나 집을 팔아버리겠다고 선포합니다. 한편, 불길한 예언을 일삼는 가정부 카산드라, 젊고 예쁜 외모로 마샤를 불안에 떨게 하는 옆집 여자 니나 등이 이에 가세하게 됩니다.

연극열전5th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

이만하면, 이 공연이 ‘지적인 유희’가 될 수 있는 좋은 조건들은 충분히 마련된 셈입니다. 실제로 저 역시 여러 캐릭터들이 뒤섞여 있는 데서 마치 퍼즐 맞추기를 하는 듯한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일대 다 대응까지 해 가며 캐릭터들을 뒤섞었는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캐릭터들은 화학적 결합이 아니라 물리적 결합에 그친 듯 보였습니다. 물론 이 공연이 체홉 원작 캐릭터들을 충실히 구현해야 할 의무도, 당위도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컨셉 자체가 체홉의 4대 희곡 캐릭터들을 일대 다 대응으로 구현하겠다는 것이라면, 어찌 되었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겠지요. 비록 어느 누구도 강요한 적 없긴 하지만, 콘셉트라는 것은 일종의 규칙이 되어버리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 규칙은 기발한 착상이었던 동시에, 스스로의 발을 묶는 족쇄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바냐와 소냐는 공연 초입부터 굳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스스로의 입으로 관객들에게 넋두리처럼 전해야 했던 것이고, 뜨레쁠레프―이 작품에서 ‘바냐’의 일부가 되었던―는 그의 내면보다는 그가 겪었던 행위―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타박을 들었다거나, 전위적인 희곡을 쓰는 등―로서만 구현되어 일대 다 대응의 면목을 억지로 세워주었던 것입니다. 특히 바냐가 극중극 공연을 하다가 스파이크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은 이러한 거북한 동거가 산으로 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때의 바냐에게서는, 스파이크에게 육체적으로 끌리던 게이 캐릭터도―이 역시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거북한 동거 중 하나였습니다만―, 열등감에 휩싸인 뜨레쁠레프도, 자신의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사라져 버린 희망 등에 괴로워하는 바냐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파이크가 극중극 공연 중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고는 폭발하여 사라져버린 과거의 추억과 아름다움들을 토로하기 시작하는데, 이 장면에서는 ‘요즘 것들은’으로 시작하는 꼰대스러움 이상도 이하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러한 감정적 폭발이야말로 앞서 어설프게 버무려졌던 캐릭터들을 화학적으로 뭉치게 만들 수도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더욱 아쉬웠지요.

연극열전5th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

어쩌면, 한 편의 발랄한 연극을 보고 나서, 이리도 발랄하지 못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이 더 우스꽝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자고 하는 말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답답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 작품이 ‘지적인 유희’와 ‘몰라도 웃을 수 있는 연극’을 동시에 표방한다고 보았을 때, 적어도 두 목표가 동시에 가능할 수는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동시에 저로 하여금, 두 목표는 사실상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한 편의 연극을 보면서 지적인 유희를 느끼려는 것과, 아무 생각 없이 웃고자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다른 목표는 아닌 것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꼰대스러움’이 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날입니다.

[사진: (주)연극열전 제공]

연극열전5th <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 포스터

일시
2014년 12월 5일~2015년 1월 4일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원작
크리스토퍼 듀랑
연출
오경택
출연
서현철, 김태훈, 서이숙, 황정민, 김찬호, 김보정, 임문희

태그 연극열전5th,바냐와 소냐와 마샤와 스파이크,김민승

목록보기

김민승

김민승 작가, 드라마터그
작: <구름>(2013), <원치않은, 나혜석>(2012)
드라마터지: <적벽가>(2014), <빨갱이. 갱생을 위한 연구>(2013), <두뇌수술>(2012), <나는야쎅스왕>(2011), <아무튼백석>(2011) 외
수상: 2009년 제6회 젊은비평가상, 2012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두뇌수술>
제59호   2015-01-08   덧글 1
댓글쓰기
덧글쓰기

혜인
아... 보고 싶은데 끝났군요... ㅜㅜ

2015-01-12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