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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의 거짓말은 숲으로 너희들을 데려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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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 빛을 보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시 ‘비정성시(非情聖市)’ 中

<맨 프롬 어스>

다윈은 진화의 개념에서 자연도태와 최적자 생존이라는 두 갈림길에 오래 서 있었다. 자연도태의 경우 인간 <종>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도태하게 될 경우 먼저 우연한 자연에 의해 도태가 선행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강했고, 최적자 생존의 경우는 기후나 생활변화가 변이성을 증가시키는 경향에 개체는 우선작용 될 수밖에 없다는 의견역시 강했다. 그렇다면 다윈은 이 연극의 주인공 존 올드맨, 즉 1만 4천 년을 살아남은 이 개체를 어떤 종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존 올드맨은 뱀파이어도 아니고 하이렌더도 아니다. 게다가 신이 점지해주신 신령도 아니며 다른 행성의 유전자로 조직된 괴질체도 아니다. 어떤 유전적 돌연변이로 그가 오래 살아남았는지에 대해서 연극은 태동을 갖지 않는다. 역사는 늘 비어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심리학자 윌그루버역)는 전사적 관점에 기댄다면 갖가지 상상력을 동원한 전사라는 개념으로 이 해괴망상한 인체에 대해 덧씌울 수 있는 생물학적 정보는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1만 년을 넘게 생존해온 한 인물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나 불편함 없이 그의 생존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면 이 연극의 개연성은 오히려 우리의 정신분석을 의심해 보기 위해 시도된 것일 지도 모른다. 자연이라는 개념은 스스로 이루어진다는 말뜻이 아니던가? 어쩌면 오랫동안 살아남은 한 남자의 큰 축을 끌고 가는 이 이야기의 긴장점과 매혹은 개연성의 측면에서 ‘그럴듯하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측면인 ‘그럴 수밖에 없는 것’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개연성을 찾으려 노력하며 살지만 실상은 그럴 수밖에 없는 지점에 닿아가면서 화해를 해왔고 스스로를 글썽거리기도 하며 자신 안의 구체성으로 녹아들어 오는 타인의 진실과도 닿게 마련이다. 우리는 플롯 없이 참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과 내가 경험한 사랑은 누군가의 개연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았던가? 당신의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우리는 목마르고 글썽여 온 것에 주목한다면(연구실조교 샌디 역) 이 연극의 메시지가 지식이나 진리보다 새로운 진실의 체험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에 가득 쌓인 한 사내의 고독은 거기서 발생한다. 자신만이 다른 시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맨 프롬 어스>

이 이야기는 살아남은 자와 사라지는 자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은 한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한 공간에서 1만 년에 관한 시간에 관해 자신의 진실성을 보태기 위해 서로 애쓴다. 미술사를 전공한 교수와 생물학을 전공한 교수, 정신분석을 담당한 교수까지 자신들이 일생을 바쳐 수치와 통계로 축적해온 설계의 도면 위에 이 생명체 조각을 맞추어 보려고 한다(분명 그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의심이라기보다는 분방한 호기심 같은 성질이다) 하지만 존 올드맨은 고작 자신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를 점점 의구심으로 가득 차게 한다. 사람은 살아온 만큼 사라지는 것이 보편적인 인과율로 적용되는 인간계의 이야기에서 1만 4천 년을 살아남은 사람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독백은 점점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절망하게 만든다. 그의 이야기가 단지 논리적이기 때문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유한자인 우리는 살아온 만큼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정말로 맞는다면 그들이 쌓아온 지식은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존 올드맨은 그들에게 신을 의심하는 지점까지(자신이 예수라고 발화해 버림으로서) 궁지에 몬다. 우리는 어디서 발생했는가? 에 대한 거창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존 올드맨은 분명히 하고 있다. 단지 남보다 오래 살아남았기 때문에 역사를 모두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어떻게 한 남자가 이사를 하기 전 내뱉는 고백사가 모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진실은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보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들이 부정하고 싶은 ‘자연’에 가까운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이란 우리가 세계의 진실을 탐구하고 싶어 하는 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진실이 나의 것과 어떻게 닿아 있을 수 있는지를 묻는 병리적이고 생리적 증후군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는 할 수있는 모든 것이 절망에 닿았을 때 신을 찾는다. 그에게는 믿음만이 그를 지탱해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진실한 고백은 때로 어떤 음악보다 울림이 크다. 어떤 것이 가짜이고 누가 진실이냐를 묻는 쪽이 진실게임이라면, 그것이 우리의 가난한 삶이라면 우리는 매일 거짓말을 하며 눈물을 흘려야 한다. 그분의 가난한 거짓말에 목이 마르는 자들처럼.

<맨 프롬 어스>

[사진: 드림컴퍼니 제공]

<맨 프롬 어스> 포스터

일시
11월 7일~2월 22일
장소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극작
배삼식
연출
최용훈
출연
여현수, 문종원, 박해수, 김재건, 최용민, 이대연, 이원종, 손종학, 서이숙, 김효숙 외

태그 맨 프롬 어스,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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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김경주 시인, 작가.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데뷔했고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 작품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를 올리며 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여러 필명으로 야설작가, 방송작가, 영화사, 카피라이터 등 여러 장르의 글을 써 왔다. 현재 다양한 독립문화작업과 시극운동을 하고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singi990@naver.com
제60호   2015-01-2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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