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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움과 미끄러짐  -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를 감각하게 하는 두 ‘양 배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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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연극in ‘색깔 있는 리뷰’의 개편으로 조금 ‘새로운’ 글을 써 줄것을 의뢰받았다. 필자는 여기에서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입체적인, 열려있는, 질문하는, 그래서 사라지는’이라는 화두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다른 필진과 함께 손쉬운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리뷰 할 공연을 보고, 공연의 창작자들과 함께 인터뷰를 빙자한 술자리 대화를 한 번씩 가지는 것, 그리고는 그것을 리뷰의 내용에 녹여내는 것이었다. 아직 공연의 기운이 섞인 이들이 모여 테이블 위에서 나누는 대화는 금방 열리고, 금방 섞이며, 금방 사라져버리고, 다시 곧 되풀이된다는 장점이 있다.
‘재미있는’ 리뷰를 쓰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무언가를 자꾸만 남기려 하여서, 그래서 무언가를 고집하여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실은 연극을 찾고, 연극을 기억하고, 그리고 연극을 꿈꾸는 행위는 무언가를 남기고, 고집하고, 그리하여 무언가로 존재하기 위함보다 무언가를 떠나고, 유랑하고, 그리하여 무언가를 향해 사라지기 위함이 아닐까. 필자가 연극을 찾는 여정을 여행을 떠나는 기행의 과정으로 여기고 싶어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양손프로젝트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와 두 ‘양 배우’의 힘

양조아 배우의 스토리텔링은 넘나드는 힘이 있다.
양종욱 배우의 스토리텔링은 파고드는 힘이 있다.
양조아 배우의 스토리텔링에는 이음새 없이 온 이야기의 시점과 풍경들을 넘나드는 매끄러운 유려함과 유창함이 있다.
양종욱 배우의 스토리텔링에는 이야기의 흐름 밑으로 미끄러지는 고독감이 있다.
매끄러움과 미끄러짐

두 ‘양 배우’가 드러내는 이 조금 다른 에너지는 모파상이 세계를 보는 시선과 교묘하게 접합된다. 모파상은 시종 세상의 팽만한 풍경에 치중하고 있는 듯하나, 그 표면에 집중하는 치열함은 정도를 지나쳐 이내 그 이면에 있는 빈 공간을 보듬어내고 만다. 이것이 모파상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공기’이다. 흔히 19세기 말 자연주의 소설 계열에 속한 작가로 인정받는 모파상은 ‘깊은 정신성보다는 치밀한 표면성’으로 평가받아 왔다. (톨스토이도 모파상의 재능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의 지나치게 외설적이고 표면적인 기치를 비난하였다. Leo Tolstoy, “The Works of Guy de Maupassant”, 1894) 그러나 현재의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모파상은 오히려 치밀한 표면성보다 ‘그것으로 인해’ 유발되는 것들이다. 모파상이 묘파해내는 풍경에는 표면의 어엿함과 더불어 그 풍경의 밑으로 흘러가는 조금 지친 풍경이 함께 드러난다. 이를테면 한적함, 지침, 무료와 같은 공기들.

풍경의 표면적 전모와 그 풍경의 이면적 잔여가 함께 드러나는 모파상의 문장들이 양손프로젝트의 두 배우에 의해서 연극이라는 육체로 구현된다. 소설 텍스트를 연극이라는 육체로 구현하는 일. 이것은 올해 3회 차를 맞이하는 <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에 속한 모든 공연들이 저마다의 화법으로 고민해 온 일이다. 이 공연에서는 두 배우 사이의 공기와 텍스트와 연극 사이의 낯선 비틀림이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를 시각화한다.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가 공연 안에서 육체화되는 지점은 이를테면 이러한 것이다. 두 번째 단편 <29호 침대>는 양종욱 배우의 1인극으로, 세 번째 단편 <전원비화>는 양조아 배우의 1인극으로 구현되었는데, 이 두 단편이 빚어내는 공기 사이에는 이상한 간극이 있다. 양조아 배우의 감각은 투명하고 구체적이어서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음이 없다. 그리고 양종욱 배우의 감각에는 어떠한 숭고함이 있다. 그리하여 공연의 공기 속에는 이 두 배우가 빚어내는 투명함과 숭고함이 비틀리는 각도 같은 것이 보인다. 이는 풍경의 표면과 이면을 동시에 오가는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를 두 배우가 빚어내는 방식으로 엿보인다. 이렇게 연극 안에는 보이지 않는 공기가 비틀리는 지점이 있고, 그래서 오히려 명확한 소재들(언어나 육체)이 불명확한 공기에 압도당한다.

양손프로젝트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는 두 배우의 사이에서 뿐 아니라 한 배우의 몸속에서도 표현된다. <29호 침대>에서 양종욱 배우가 이르마와 알베르를 동시에 표현하며 빚어내는 감정의 충돌적 연쇄는 가장 모파상‘적’인 구현이 아니었나 싶다. 이 단편은 양종욱 배우가 1인극으로 표현해 내었는데, 이는 1인극이었기에 가능한 집중력의 강도를 보여준다. 그는 이 장면을 구성해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양종욱
두 번째 단편 <29호 침대>에서 알베르와 이르마가 병원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하이라이트이고, 이 장면은 실제로 대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인극으로 만들어 보았었다. 그러나 결국 이 대화 장면을 혼자서 연기하게 되었는데, 이미 2인극으로 재현한 감각의 체득이 있어서 그 감정을 내 안에서 입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결과물은 다르더라도 시행착오 안에 있었던 체득이 다 녹아나게 되는 것 같다. 많은 시도들을 통해서 이야기를 다양하게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것들이 재료로 쌓이게 되었다.

사실 이러한 시행착오의 과정은 이 단편 뿐 아니라 이 공연 전체의 준비 과정 속에 녹아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양종욱
공연 전체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어서 시행착오가 매우 많았다. 작품을 어떤 형식에 담아낼 지에 대해서 고민을 매우 많이 했다. 모든 에피소드를 1인극과 2인극의 형식을 오고 가며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이 이번 작품 안에서 유독 시행착오를 많이 한 까닭은 모파상의 ‘이상한 공기’를 더듬어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들이 인식한 모파상이라는 작가의 정체성에 관해서 물어보니,

박지혜
모파상의 작품들은 우리가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유형의 텍스트였다. 우리한테 쉬운 작업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우리가 그동안 썼던 툴(tool)들이 쉽게 적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 때부터 시행착오를 가졌던 것 같다.
양종욱
조아가 볼 때, 모파상은 연기‘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텍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예를 들어 김동인이나 현진건은 연기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는 텍스트인데. (…) 모파상이라는 작가는 우리가 기존에 작품화했던 작가들-김동인, 현진건과 비교해 볼 때 ‘나’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다. 모파상의 ‘나’는 이제까지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나’였다.

이들이 모파상의 ‘나’를 더듬으며 쌓아나간 많은 시행착오들은 모파상의 글이 그러했듯 풍경의 표면과 심연 사이를 서로 서로 감돌며 어떤 공기를 형성한다.

<29호 침대> 이 단편에서 양종욱 배우는 이야기의 흐름 가운데 음영이 짙어지는 골격을 놓치지 않으며, 때로는 서사에 박력 있는 방점을 찍어 연극적 육체를 과감하게 빚어내기도 한다. (조명의 전환과 조명이 전환되는 순간마다에 멎어지는 공기의 연출!) 그러한 연극적 골격들을 형성함으로 명랑함과 숭고함, 그 사이를 오가는 법을 안다. ‘그럼으로’ 결국에는 숭고함을 조리해낼 줄 아는 것이다. 텍스트에 맺혀져 있는 기운이 (원전 텍스트의 필치 혹은 정서보다는) 에너지‘감’으로써 그 사상과 정서가 표현되고, 그래서 그것이 기어이 재창조된다.

이 단편에는 숭고함을 빚어내는 지점들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아니, 장면이 전환되는 칼날 같은 지점들이 있고, 그 지점마다에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첫 구성 ‘나는 잘생겼다’, 중간 구성 ‘어느 날 아침’, 마지막 구성 ‘다음날, 나는 이르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놀라운 것은 이 지점들에 공기가 진공 상태로 바뀐다는 점이다. 공기 속 먼지의 흔들림이 청각적으로 전달되는 듯한 고요와 긴장이 있다. 조명의 전환이 일어나지만 그것만으로 전환해낼 수 없는 공기와 뉘앙스와 정서의 비틀림이 있다. 이야기의 전반이 흔들리고 비틀리는 지점이다.

특히 마지막 구성 ‘다음날, 나는 이르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에 고여 있는 정적감, 그 공포에 이르는 정적감이란. 이미 소설 텍스트에서 “다음날 그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지점에서 단편이란 그저 짧은 이야기가 아니라 짧은 이야기로 기술된 세계상이며, 동시에 그것을 조명케 하는 힘이라는 것을 느꼈다. 소설의 문장이 빚어내는 적막감을 연극의 공기가 빚어낼 때에 어떠한 힘으로 드러나는가를 보여주는 명료한 지점이었다.

양손프로젝트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반면 양조아 배우의 스토리텔링에는 능수능란함과 자연스러움 위에 정성과 재미가 담겨 있다. 세 번째 단편 <전원비화>에서 양조아 배우는 1인극을 선보였다. 한 아이에게서 여러 명의 얼굴이 보이게끔 하는, 다양한 힘을 넘나드는 스토리텔링. 재현과 구연을 넘어 선 상상력을 자극케 하는 힘. 그리하여 결국 자신을 부잣집에 팔지 ‘않은’ 것을 두고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는 샤를로의 감정, 샤를로의 감정을 둘러싼 서사의 부피가 소설 텍스트에서보다 더욱 잘 보인다. 그러나 양조아 배우의 표현은 소설을 ‘온전히’ 극화시키는 일을 존중한다. 소설을 극으로써 잘 보이게 하는 정도까지의 일만을 한다. 결코 샤를로의 감정에 집중하여 소설의 서사를 연극적 감정으로 치환시키지 않는다. 그럼으로 그녀가 구현하는 연극적 힘은 다시금 소설 속의 힘을 감지하게 한다. 이 단편의 연극적 힘과 소설 속 힘은 모두 어떠한 이상함의 기류로 연결되어 있다.

양조아
이 이야기를 읽고 ‘당연함’이 뒤집어지는 것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그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에 다시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지 않나.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아이를 빼앗는다는 거. 너무나 황당한 일인데도 그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더 이상했던 건 이야기의 마지막에 샤를로가 자신을 팔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게 되는데, 그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인데도 그것이 이해가 된다.

그 이상의 것

무엇보다 이 공연을 가장 돋보이게 만들었던 단편은 “네 명의 단원들에게 가장 먼저 몰표를 받은 작품”, 공연의 네 번째 순서로 선 보인 <목가>였다. 이 단편은 모파상의 작품들 가운데 이미 텍스트에 내포된 감각의 유입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텍스트 속의 기술과 관찰이 연속된 회화의 정서를 이루고, 그럼으로 (호흡이 축적된) 부피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연극‘화’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큰 작품이다.

공연에서 이 단편을 표현하며 시종 집중한 것은 어떤 나른함 혹은 나른함으로 빚어진 아름다움 혹은 어떠한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 부드러움의 뉘앙스에 대해서 단원들과 나눈 이야기를 잠깐 써 본다.

박지혜
관객들이 앞의 세 단편을 보고 나서 마지막에 <목가>를 볼 때 조금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실 모파상의 이야기들은 사람을 꼬집는 기분이 있다. 조금 차갑고 서늘한 단면들. 그런데 우리는 관객을 꼬집고 싶지는 않았다. 관객에게 그런 기분을 안고 집에 돌아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양종욱
‘우리가 너무 착한가?’ (웃음) 모파상을 할 때 사실은 정말로 더 세게 갈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정진세
그 지점에서 궁금한 점이 있다. 좀 더 세게 가는 것, 조금 더 극단적인 실험성, 다시 말해 실험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어떤 것을 표현해낼 마음은 없는가?
양종욱
만약에 내가 배우가 아닌 연출을 하게 된다면 어떤 강력한 폭력성을 배제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설 때에는 관객 앞에서 연극은, 배우는 어떠해야 한다, 라는 스스로의 관념이 생기는 것 같다. 사실 그런 점에서 (폭력성/실험성이 더욱 발현되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시점이 되면 그러한 표현들도 기꺼이 관객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목가>의 풍경 속에 담긴 그 나른함, 아름다움, 부드러움은 시간이기도 풍경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시간도 풍경도 비껴가는 것. 분명 시간과 공간 속에 있던 것이었으나 기억 속의 시간과 공간으로는 결코 복구해낼 수 없는, 이를테면 여행 같은 것. (그렇다.) 여기에는 여행적인 정서가 녹아 있다. 마치 여행을 회고할 때 그 어떠한 여행적 단서들로도 그 여행 자체를 회고해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여행 속 풍경에 녹아 든 때늦은 그리움, 무형체의 실체 같은 것이 장면들 속에 있다. 그것은 이미 기억 속의 시간이 되어 버린 공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나른함을 지켜보게 하는 시간의 경험이 독특하다. 이 나른함은 그렇다고 어떠한 이미지 내지 정서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어떤 희한한 것이었다.

정진세
그 에로틱함이 좋았다. 연극에서 볼 수 없는 종류의 에로틱함. 연극에서 해낼 수 없는 종류의 정서로 여겨졌다.

그 나른함과 노곤함이 멈추어져 있는 풍경이 아니라 살아있는 공기로 다가올 수 있었던 것은 그 풍경 안에서 두 남녀가 만들어내는 끊임없는 작은 율동들 덕분이었다. 자꾸만 조는 두 사람, ‘흩어지는 꽃가루’를 바라보는 두 얼굴의 세심한 각도들, 눈을 감았다 뜨는 율동의 호흡마저도 서로의 기운을 살피는 양태.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작은 율동들의 조화는 마치 세심하게 연쇄된 회화 이미지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이 풍경은 나른함이 전부가 아니다. 그 속에는 관능과 고통과 고요가 있다. 점차 젖이 차오르는 여자와 (알고 보니) 이틀을 굶은 남자. 이윽고 남자와 여자가 합의에 따라 서로를 돕기로 하여, 여자는 고통에서 안정으로, 남자는 갈구에서 절정으로 치닿는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결국, 평화로워진다. 소설 텍스트에서 그려진 이 희한한 구원의 장면이 연극의 육체로 어떻게 표현이 될까, 더구나 이 단편의 표현이 이토록 ‘목가’적인 장면으로 지속되는 내내 필자는 그것이 궁금했다.

나른함과 느릿함의 공기를 시종 세심한 율동들로 타던 두 배우는 이 장면에 이르러서도 역시나 그것을 깨뜨리지 않는다. 작고 끊임없는 율동의 조화를 유지한 채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 세심하나 거침없이. 조심스럽게 시작되어 점차 강해지고 그리하여 각자 서로의 고통을 평화로 일구고, 각자 자신의 고통을 구원으로 이끌어간다. 그 부드러움과 점증이 공존하는 이 장면의 정서란! 절정의 평화를 이룬 직후 남자는 어느 새인가 일어 선 채로 다시 작게 흔들리고 있었고, 서서히 원래의 자리로 내려온다. 단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서고 다시 앉는 동작일 뿐인데, 이 세 행위에 녹아 든 어떤 것. 아니 이 세 행위가 지속되는 동안에 녹아 든 어떤 것. 그 안에는 어떠한 사건도, 정서도, 관계도 들어있었지만, 그것들이 전부는 아닌 느낌이다. 오히려 그 안에는 사건으로도, 정서로도, 관계로도 다 감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인다. 나른하면서도 아주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두 인물이 기차의 움직임을 몸으로 타면서 시종 가늘고 지속적으로 수긍하고 있던 조용한 무언가가.

양손프로젝트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공연의 몸체를 이루는 원초의 힘이 배우들의 정신과 몸에서부터 형성되어 오롯이 그것이 배우의 몸과 정신을 통해 전달되는 것. 양손프로젝트의 공연에 거는 기대감이란 이러하다. 배우의 몸으로부터 발산되는 해석, 배우의 몸으로부터 발현되는 텍스트, 배우의 몸으로부터 돋아나는 순간.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의 몸으로 빚어낼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보인다. 마지막 단편 <목가>에서 보여준 감각의 힘, 그것은 이번 공연에서 양손프로젝트가 선보인 또 다른 가능성이었다. 이 글을 나오며 기대의 여지를 한 가지 보탠다면, 두 ‘양 배우’의 힘과 모파상의 기운이 (개개 단편들 안에서 섞여 있는 것을 넘어) 전반적인 공연의 구조 안에서 더욱 거시적으로 혼합되었더라면 하는 것이다.

<2014 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 김동인 단편선-마음의 오류>와 이번 공연의 구조는 비슷하게 읽힌다. <사진과 편지>, <태형>, , <감자>로 이어지는 김동인 단편선과 <크리스마스 이브>, <29호 침대>, <전원비화>, <목가>로 이어지는 모파상 단편선은 모두 꽁트의 명랑함으로 시작해서, 내면으로 잠식했다가, 유려함으로 무장한 후, 감각으로 열리는 구조로 다가온다. 공연의 거시적인 구조 속에 원작의 작가만이 지닌 고유한 색감이 형상화되었더라면, 에피소드 식으로 연쇄되는 것 이상의 구조적 감각이 빚어졌더라면 하는 상상을 보탠다.

[사진: 소극장산울림 제공]

태그 양손프로젝트,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이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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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이예은 공연 기획자, 드라마터그
국문학, 철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공연, 방송 현장에서 제작 프로듀서로, 기획자로, 혹은 아티스트들의 술친구로 10년 간 활동했다. 지금은 문예창작과, 사진예술과, 영화예술과, 연극과 등을 떠돌며 무언가의 창작과 감상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산학협력 교수로 재직 중이다.
metaism@naver.com
제61호   2015-02-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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