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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본 적도 없는 곳으로 돌아가라고 강요받는, 우리 모두의 애매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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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연극을 필진들이 함께 보고, 그 연극의 깊숙한 창작자와 대화를 나누며 보다 자유롭고 성긴 글쓰기를 시도하는 ‘색깔 있는 리뷰’. 세 번째 작품은 ‘2014 서울연극센터 유망예술지원 New Stage’로 선정된 구자혜 작/연출의 <디스 디스토피아>이다. 이 연극을 함께 본 정진세와 이예은, 그리고 이 연극을 창작한 구자혜가 대화를 나누었다. 이 글의 필자인 이예은이 이 대화를 되살피며 느낀 점은, 고작 세 명에 불과한 우리는 ‘디스토피아’라는 단어 혹은 화두 혹은 세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혹은 지니려고 애쓰는) 의미와 욕망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그것은 각기 가장 잃어버리고 싶은 세계에 대한 욕망이었으므로 그 형체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각자의 디스토피아는 저마다 다르기에 불완전하며, 저마다 불완전하기에 어긋나고 그래서 불현듯 교차하고, 다시 곧 결별했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디스 디스토피아>

* 세대와 계급에 대한 이야기?

정진세
또래의 연출가 가운데 국가나 세대와 같은 것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 그 문제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문제의식을 드러낸 작품이어서 반가웠다.
구자혜
나한테 가장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라서 계속 이야기하게 되는 것 같다. 다음 작품도 세대와 계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러한 말을 하더라, 이러한 식의 세대 담론은 납득할 수 없다고. 예를 들면 운동권에 대한 시각이 나의 작품에서는 기존의 시각을 따라가지 않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나 나는 기성의 시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뒤틀어진 면을 바라보고 싶어 한다.
이예은
기성세대를 바라보는 시각의 ‘잔여’ 시각을 내세우는 느낌이다. 즉 어떠한 계급을 내포한 모든 담론들을 모두 내려놓고 그것을 ‘관찰’하는 것과 같은 시각. 사실 우리 학교 교실에서는 (구자혜와 필자는 같은 학교 같은 과 동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세대적인 격차랄지 비틀림 같은 것을 어떠한 ‘입장’에 속하여 바라보지 않고, 변두리에서 관찰하는 시선을 많이 배우지 않았나. 그런데 그러한 시각이 어떠한 ‘입장’을 지닌 일인칭적 자각을 원하는 이에게는 안일함이나 사치스러움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구자혜
혁명이라는 센 단어가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이 비단 1세대 운동권 그리고 2세대 운동권을 지칭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세대적인 것이기는 하나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세대 감각. 이를테면 이런 식의 세대 감각. 1세대는 ‘몸성’이 중요해서 몸이 드러나는 의상을 입었고, 2세대는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세대여서 그토록 말을 많이 늘어놓게 하였고, 3세대는 사실 무엇도 없는, 텅 빈 세대. 몸과 말이 텅 빈, 이를테면 SNS로 대유되는 비어있는 감각을 대변하는 세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정진세
그렇다면 ‘언저리’는?
구자혜
‘언저리’는 정말 모든 것이 없는, 어쩌면 가장 건강한 생명체를 뜻하고 싶었다. 수정, 착상은 됐는데 부모한테는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태어나지 못한 존재. (나는 불교여서 윤회를 반드시 믿는데,) 이를테면 에필로그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콩도 안 깠는데 태어난 ‘무성 세대’의 탄생 같은 것이다.

** 어쩌면 그 ‘이상’의 이야기?

이예은
그러면 ‘언저리’는 어떠한 상상적 생명체가 아니라 실제적 생명체인가?
구자혜
나는 ‘언저리’가 가장 현실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언저리’는 상상 속의 인물이 현실 속의 인물로 연결될 수 있다. 라는 믿음을 확신시켜주는 존재이다. 현실과 맞닿아 있는 환타지.
이예은
비현실이 현실과, 상상과 현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라고 믿는 철학이 반갑다. (나도 종교인이라서) 그 연결의 고리를 논리로써 해독하지 ‘않으려’ 하는 태도에 공감한다. 그 구분된 논리를 내려놓으려고 하면서 보았다. 그래서 오히려 해독이 가능했던 것 같다.

우리 대화의 시작은 세대나 계급과 같은 다소 피상적인 담론에 대해 운을 떼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결코 이 연극에서 담아내고 있는 것은 그러한 담론의 차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연극을 보는 시간 동안 그리하여 결코 연극은 어렵지 않았다. 철학자들의 이름과 철학적인 문구들이 도처에 드러남에도 이 연극이 향하는 방향은 어떠한 담론이나 지성, 발화, 입장을 고수하는 그래서 어떠한 목표 지점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필자는 안도감을 느꼈다.

구자혜 연출과의 대화에서 ‘언저리’라는 존재는 어쩌면 (유일하게) 진정으로 살아냄을 살아내고 마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어떠한 의미에서든 누구나, 버려진 채로 살아간다. 연극 안에는 그 버려진 ‘채’의 지속, 더 나아가서는 버려진 ‘채’의 보편성을 열변하고 있는 느낌이 있다. 그리하여 결코 현학적이지도, 어렵지도, 자폐적이지도 ‘않은’ 온건한 느낌. (여기에서 ‘온건’이라는 단어로 보듬고자 하는 뜻은 이러한 것이다. 외로움을 너무도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어서, 오히려 외로움의 냉기보다는 외로움을 바라보고 있는 그 정확한 시선이 발하는 다른 기운. 냉기를 에두르는 온기. 이렇게 조금 복합적인 뉘앙스로 ‘온건’이라는 단어를 읽어주었으면 한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디스 디스토피아>

*** 지속을 지속시키는 자세

필자는 연극이 ‘온건’한 느낌을 발산하는 지점을 두 가지 면에서 짚어 보려고 한다. 하나는, 어떠한 버려‘진’ 것에 머무르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채’로 여전히 삶을 지속시키는 존재를 바라보는 점이다. 그것은 소외된 것(버려진 것)보다는 애매한 것(버려진 채로 남아있는 것)을 보듬어 내는 시선이다. 연극은 버려짐 ‘그 이후’의 이야기(기존의 드라마에서 대부분 생략되어 온 이야기)를 연극의 주된 내러티브로 그려낸다. 그래서 버려짐 이후에도 살아내야만 하는 삶의 지속에 집중한다. 고로 버려진 것이 버려진 것으로 결론이 나지 않을 수 있다는 어떠한 가능성. 그것이 미약하나마 전반적으로 감각해 낼 수 있는 이 연극의 온건함이다.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 가운데 하나가 연극에서 강조된 ‘공놀이’ 이다. 공을 놓치면 공이 오가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 공은 양쪽의 플레이어 손에 맞고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을 반복하는데, 이 공이 양쪽의 라켓에 맞는 행위의 의미란 사실 허공을 오가는 공의 지속성이 없다면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표면적으로는 끊임없이 양쪽의 탁구 라켓, 테니스 라켓에 맞아 떨어지는 공 소리(“공!”, “공!”)와 그 행위를 강조하지만, 정작 이 연극 안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은 그 공이 허공에서 그려내는 보이지 ‘않는’ 궤적, 들리지 ‘않는’ 소리이다. 허공 속의 공의 움직임이 없다면 손에 맞아 떨어지는 공의 질감과 소리, 그 의미는 사라진다. 공의 의미는 결국 허공 속의 율동으로 인해 지탱되는 것. 극의 오프닝에서부터 공을 허공 속에서 놓치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율동들이 표현되는데, 이러한 움직임의 지속은 마치의 고도(Godot)의 끝나지 않는 기다림처럼 실물화 된다.

1장에서 “테니스만 치다가 죽는 건가?”라는 대화를 나누는 남자(할아버지 세대)와 여자(할머니 세대)는 결국 “순전히 쾌락을 위해 하는 거야”라고 결론을 내린 남자(아버지 세대)와 여자(어머니 세대)로 이어지고, 이 둘은 탁구 운동을 잠자리로 이어낸다. 운동에서 잠자리로 행위가 이어지면서 신음이 지속, 변주되는 지점은 기묘하게 ‘어떻게든’ 삶이 지속되는 감각을 만든다. 다시 자식 세대를 창출한 남자(아버지 세대)와 여자(어머니 세대)를 바라보며, 그들의 윗세대인 남자(할아버지 세대)와 여자(할머니 세대)가 하는 말은 바로 “뭐든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다.”이다. 연극은 이 ‘열심히만’이라는 부사를 강조하는 인물들(부모, 선생, 기성세대, 혹은 어떤 ‘추상적인’ 강압)을 강조하는데, 이는 ‘열심히만’이라는 부사로 인해 늘 밀려나 있던 목적어의 의미를 역으로 질문한다. 결국 ‘열심히만’이라는 부사에 밀려 ‘뭐든지’라는 의미로 치부되어 버린, 정작 우리가 잃어버린 ‘의미’의 몫에 대해서. 우리의 유년과 성장기, (그리하여) 청년기와 장년기에 이르러서도 늘 일정 부분 공동(空洞)으로 밀려나 있던 (사실은) 궁극의 질문 대상인 그것. 까닭모를 경기를 지속해야만 하는 몸들의 움직임과 이 움직임들이 빚어내는 열성적인 동선으로 인해 연극은 그 ‘무’의미의 ‘지속성’을 끈질기게 표현한다.

**** 우리 ‘모두’의 변방성

이 연극의 ‘온건’함을 감각하게 하는 두 번째 지점은 이 연극에 어떠한 보편성이 두텁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연극이 향하는 변방(이방/경계)은, 사실 우리 모두의 존재들이 품고 있는 선택받지 못함이다. 어떠한 주제나 표현을 형상화하고 있는 부분적 지점들을 넘어서, 이 작품의 전체가 빛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연극은 시종 ‘언저리’의 모호함을 붙들고 있지만, ‘언저리’가 느끼는 모호함이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속한 세계 자체도 모호한 것임을 시종 놓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이상한 또라이로 취급받는 아이의 외로운 서사이면서도 그 이상한 또라이를 소외시키는 세계의 이상함을 함께 다루고 있기에, 그 외로움의 서사는 자가 치유적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상한 세계로부터 소외당한 이상한 아이가 이상하지 ‘않다’는 반대 급부적 주장에 이르지는 않는다. 단지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상하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외된 것이 아닐까 라는 당연함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이 연극에서의 변방은 ‘모두’라는 존재로 확산되는 느낌이 있다. 이 모든 방황과 디스토피아, 그 ‘전체’를 다룬다. 우리 모두의 것이어서 그 소외감이 보다 커다란 지대 안에서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는 느낌. 외로움조차 보편적인 느낌 속에 있다. 그래서 그 외로움과 (디스토피아라고 지칭되는) 모든 불완전과 흔들림이 보편의 틀을 입고 있다. 그것이 어떠한 위안을 준다. 우리는 모두 손을 잡은 채 저 너머 의미의 진동선 위를 밟고 있다.

이 연극은 변방을 다루고 있다기보다 그것을 ‘변방’이라고 발설하는 것에 대함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변방’이라고 발설하는 것에 대한 ‘이상함’을 다룬다. 다시 말해 이 연극은 경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계의 보편에 대한 이야기이다.

***** ‘때늦은’ 디스토피아

그리고 이 연극의 변방은 공동(空洞)으로 밀려났던 ‘의미’를 ‘이제야’ 질문하게 된 어른들의 변방이기도 하다. ‘열심히만’ 하면 된다. 라는 사실의 허망함을 깨달은,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일정량의 인생을 이미 살아버린, 그래서 ‘이제야’ 버려진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연극의 제목에 ‘디스(This)’라는 지시대명사가 붙은 이유는 연극에서 바라보는 디스토피아가 ‘이제야’ 버려진 자들임을 알게 된, 어른이 된 아이들의 우주를 지칭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때늦은 디스토피아가 필자에게는 왜 그토록 알맞게 다가왔을까? 이것은 어쩌면 매우 개인적인 감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삼십대 여자 싱글이 되어 ‘처음으로’ (사회적, 개인적) 소속감 전반에 대한 위태로움을 느껴본 ‘뒤늦은’ 이방-감, 개인적으로 경험한 이러한 종류의 이방-감 같은 것으로 연극의 디스토피아를 이해하였다랄까. 그것은 매우 불편하고도 시시한 경계인 의식 같은 것. 당연하기에는 위협적이고, 위협적이라고 말하기에는 시시한 어떠한 피곤함. ‘그러한 정도’로서의 경계 의식 같은 것이다. 그 보편적인 시시함. 연극의 어느 지점인가에서부터 그러한 정도의 경계성으로 연극의 디스토피아를 체득하고 있었다. 이토록 삼십대 여자 싱글을 들먹이는 이유는 언젠가 구자혜 연출이 자신을 ‘삼십대 독거 노처녀’라는 단어로 자기소개를 한 것을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 2014 ‘화학작용-선돌편’ 인터뷰집)

재미있는 지점은 이 연극이 (이를테면) 삼십대 독거 노처녀와 같은 어떠한 상태의 경계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삼십대 독거 노처녀의 의식을 경계성이라고 발설하는 것 자체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 연극은 삼십대 독거 노처녀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경계 의식으로 좇아가 보니 연극의 디스토피아에는 ‘이제야’ 버려진 것을 자각하는 ‘때늦은’ 자각이 있다.

이것은 때늦은 자각이기에, 한편으로는 남자/여자 사이의 버려짐 같은 것이기도 하다. 성적 정체성을 확보해나가는 시기에 자각되는 버려짐(혹은 애매함)은 그것이 성적인 자각이기에, 사춘기 이후에야 도달하는 때늦음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는 ‘콩/팥’이라는 단어가 대구 반복되는데 이것은 어떠한 이분법적인 종자에 대한 구분(남/녀)으로도 읽힌다. 특히 ‘ㅋ’과 ‘ㅍ’으로 연쇄되는 폭력적 파열음이 강조되는데, 이것의 강조는 역으로 이분법적인 결과물(남/녀)이 되는 것에 대한 강력한 거부 의지를 표명한다. 그래서 “콩 심은데 팥 난다.”라는 도발적인 대사가 그 명쾌한 의미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대와 성 담론 안에서 때늦은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야기를 표현함에 있어 ‘이리’(언저리 분)라는 배우가 해 내는 몫은 매우 크다.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세대의 구획, 남자와 여자라는 성의 구획을 모두 중립적인 비주얼로 무력화시키는 배우. 갓 탄생한 아가의 얼굴과 세월의 노련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듯한 ‘이리’라는 배우가 해 내는 이 투명한 몫에 박수를 주고 싶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디스토피아라는 세계에 때늦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소용)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하는 순간, 어떠한 결과(세대의 문제이든, 성 정체성의 문제이든)가 형성되는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대, 그 선형적 시간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연극이 신경 쓰는 시간대가 있다면 그것은 (콩, 팥과 같이) 결과론적인 대상을 둘러싼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대가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를 둘러싼 ‘사이’의 시간, 매우 모호한 시간대이다. 그것은 어쩌면 경계의 시간대.

이 연극은 ‘언저리’라는 아이가 떠도는 모호한 시간대의 흐름을 타고 구성이 진행되는데, 그 흐름은 이러하다. 선형적인 시간대에 소속되지 못한 어느 변두리의 시간대, 동시에 그 태초의 불완전함으로 회귀하는 순환론적인 시간대이다. 1장이 선택받지 못한 채로 태어나는 탄생기라면, 2장은 선택받지 못한 채로 자라나는 성장기이며, 3장은 선택받지 못한 채로 윗세대의 죽음을 맞이하는 교체기이고, 4장은 그 죽음을 맞이한 윗세대를 아우르는 순환기이다. 시간을 이토록 순환케 하고파 하는 그 욕망 속에는 ‘언저리’라는 존재를 유일하게,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로 품어 안고 싶어 하는 작가의 끈질긴 애착이 엿보인다.

여기는 당연히, 극장 <디스 디스토피아>

***** 표현의 ‘적정함’ : ‘구자혜의 형식성’

이예은
이 공연의 형식에 대해서는 어떤 말이 하고 싶은지?
구자혜
왜 꼭 ‘스타일’을 찾아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이게 컨셉츄얼한 공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심플한 연기를 좋아한다. 스타일을 강조하는 것은 연출이 만들어 놓은 형식에 갇혀 있게 만든다, 라는 말로 읽혀서…
이예은
이 공연의 낭독공연 버전을 보았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대본이 딱 낭독공연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언어적 미감이 탁월했다. 그런데 이것이 연극으로 구현되자 그것이 연극적 몸으로 바로바로 입체화되는 느낌이 있었다.
정진세
그러한 언어적 미감을, 텍스트를 쓸 때 특별히 신경을 쓰는가?
구자혜
“뛰어나왔어”를 “뛰쳐나왔어”라고 수정할 정도로, 말의 미감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쓸 때부터 거의 연출 대본이다.

필자는 작년 11월, 이 공연의 낭독 버전을 본 일이 있다. 이 공연 안에는 (낭독버전에서 보았던) 텍스트적 상태를 연극의 몸체로 키워내는 빼곡한 공법들이 녹아 있다. 그 공법이란, 텍스트의 질감을 살려내면서도 그것을 연극적 부피감으로 빚어내는 식이다. 이를테면 이 연극에는 대사의 ‘표면들’이 물질적으로 표현되는 장면이 있다. “콩/팥”으로 대구되는 오프닝의 대사, 1장에서 아이들이 탄생하며 “응애”라는 의성을 연쇄적으로 뱉어내는 대사, 2장에서 반복되는 “난 왜 이 나이 먹도록 가슴도 안 나오고 생리도 안 하지?”, 3장에서는 “밥상머리에서 다리 떨면 안 된다.” 이와 같은 대사들은 점차 반복, 증강되면서 문장 전체가 마치 하나의 의성어인 것처럼 명료한 물질적 리듬을 만든다. 그 리듬은, 맞으면 아픈 주먹처럼 둔탁하기도 하고 통각처럼 전해지기도 하는 감각을 만드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그 대사들이 품어내는 내용이 비로소, 실질적으로 드러난다. 매우 물질적인 텍스트를 직접 발설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연극적인 호흡으로 구현시킨다. 그 연결이 신기하다. 매우 텍스트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연극적이다. 연극적인 발화, 육체화가 텍스트적 내용을 깊숙이 보듬고, 그럼으로써 내용과 그 내용의 형식(언어, 육체)이 서로에게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렇게 이 공연은 내용과 형식이 각자 과잉 없이 서로를 긴밀하게 맞잡고 있는 형국인데, 이 긴밀한 유대로 인해 시종 이 연극의 표현 화법은 적정한 선을 내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연극에는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어떠한 아낌도, 낭비도 없다. 무언가를 폭로하지도 않고, 그래서 자폐적이지도, 강압적이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불친절하지도 않다. 차갑지도, 공격적이지도, 음흉하지도 않다. 이 연극의 형식은 위협적이지 않고 약간 ‘온건’하다. 형식적으로 어떠한 중립성을 지키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말한) 이 연극이 지켜내고자 하는 내용적 ‘온건’함과 함께 간다. 이러한 적정한 표현감이 내용과 형식 사이의 평형점을 이룬다. 균형점을 이룬다. 어떠한 지점들을 지키고 있다. 그렇기에 ‘알맞다’고 여겨진다. 그 알맞고 적당한 것들이 어떠한 진실을 둘러싸고는, 사방에서 장력을 이루고 있다. 공을 들인 표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데, 그 표현들은 하고자 하는 말의 진실을 중심에 두고 탱탱하고 끈기 있게, 다발적으로 장력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극의 가장 빛나는 미덕을 꼽으라 한다면, 이렇게 작품 속 모든 내용이 적정한 톤으로 형식화(형태화, 형체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형식들이 내용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형식 미덕을 추구하는 연극과 주제 미덕을 추구하는 연극이 마치 서로 다른 영역에 속한 것인 양 편파적인 양상을 만들고 있는 요즘의 연극 조류 안에서, 바로 이러한 지점이 필자가 이 연극에 박수를 주고 싶은 이유이다. 필자가 굳이 ‘구자혜의 형식성’이라는 키워드를 만들어 발설하고, 또 기대해 보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나오며

경계를 다룬다면, (어떠한 명백한 담론이나 결과론적인 입장으로 무장하기보다) 이러한 시각과 이러한 습기로 다룸이 ‘알맞다’라고 여겨졌다. 경계란 어떠한 적확한 것일 수 ‘없다’라는 것에 대한 동의, 경계란 어떠한 ‘의미’나 ‘위치’가 아니라 ‘상태’라는 것에 대한 동의, 그래서 어떠한 ‘부분’적 드라마로 ‘외화’된 것이 아니라 이 연극에서 다루고 있듯 우주로 확장되는 ‘전체’라는 시선의 용량, 그리고 그러한 시선으로 (다소 표면적이지 못한) ‘내면화’에 집중하는 것이 와 닿았다. 그래서 그 우주라는 확장된 배경 자체가 허망하기보다는 아주 실질적인 배경으로 다가왔다.

물론 하나의 작품을 보고 그것의 의미 혹은 표현의 방향과 뉘앙스를 온전히 읽어내는 일은 늘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작품 안에서 작가 혹은 연출자 혹은 배우는 무엇을 말하거나 무엇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디스토피아’라는 방향 ‘상실’, 목표 ‘상실’, 의미 ‘상실’을 전면으로 표방하고 있는 이 작품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 불완전함이 중요해진다. 그렇다면 작품이란, 예술이란 무엇을 위함인가? 예술의 의미란 그 질문이 기다리거나 지칭하는 답의 내용이기보다 오히려, 그 질문이 답을 향해 비트는 공기의 형태와 질감. 그것에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 질문을 하게 하는 원동력 안에 이미 답이 있는 것일지도. 결국 대답과 질문의 위치가 모호해지는 힘 속에 진정한 무언가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정진세
영어 제목이라 매우 있어 보인다. (웃음)
구자혜
저희 극단 이름도 영어로 theatre definitely이다. 너희가 무얼 보든지 간에 이것은 연극이다, (혹은) 이것은 연극일까? 라는,
이예은
대답인지 질문인지를 모호하게 하는 단어?

[사진: 김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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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이예은 공연 기획자, 드라마터그
국문학, 철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공연, 방송 현장에서 제작 프로듀서로, 기획자로, 혹은 아티스트들의 술친구로 10년 간 활동했다. 지금은 문예창작과, 사진예술과, 영화예술과, 연극과 등을 떠돌며 무언가의 창작과 감상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산학협력 교수로 재직 중이다.
metaism@naver.com
제63호   2015-03-05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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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모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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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6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