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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찾아드는 나이, 서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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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집단 LAS <미래의 여름>

신명민
(연출가)
작년 스물아홉이었을 때 느낀 점들이 있었어요. 저는 아직 애 같은데, 밖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뭐랄까 아저씨 레벨로 올라가 있더라고요. 서른이면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나이이기도 하고. 어른이 되어 간다라는 것이 뭘까 라는 것에 대한 질문을 두고 팀원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결국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어요.
- 관객과의 대화 中에서
이예은
아까 연출님이 관객과의 대화 할 때 나이를 밝히셨잖아요, 저도 스물아홉 때 엄청 제 나이를 밝히고 다녔거든요. 이제 인생의 결정적인 절기이다 막 이러면서... 생각해보면 스물아홉이라는 서사를 스스로 만끽하면서 그 시절을 상징적으로 보내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신명민
스물아홉, 서른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대해서 어떤 결정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 부여되는 시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연극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감을 했으면 좋겠어요. 어린 친구들이 와서 재미있게 보고 가는 것도 좋고, 우리보다 더 나이가 많은 세대의 관객들이 오셔서 한 때 어른과 어린이 사이의 시절을 뜨겁게 고민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보듬을 수 있는 그런 공감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서른이 되기 몇 해 전, 도리스 되리 감독의 1994년도 작 <파니핑크>를 보았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파니는 누구하고라도 열렬히 사랑을 하고 싶어 하나 결국 영화가 끝이 날 때까지 사랑을 할 만한 그 누구도 찾지 못한다. 그러는 가운데 파니는 스물아홉에서 서른이 되어 간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작품의 원제가 사실은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Keiner Liebt Mich, Nobody Loves Me)”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친구의 뒤늦은 부음이라도 들은 것처럼 엉엉 울었다.
영화는 온통 분주하게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는 한 편의 장송곡 같다. 검은 옷과 검은 악세서리로 온 몸을 치장한 파니이며, 온 몸에 해골 분장을 하고 떠돌아다니는 파니의 유일한 (그러나 다소 비현실적인) 친구 오르페오는 끊임없이 무언가의 죽음을, 혹은 누군가의 죽고 싶은 욕망을 장면 안에 분사한다. 실제로 오르페오는 영화가 끝나기 전 달빛을 온 몸에 담아내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파니는 한 세계를 떠나보내고, 다른 한 세계를 맞이한다. 그리고 서른이 된다. 다소 신화적인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이들이 그토록 장중하게 맞이하고 싶어 했던 그 열렬하고도 허망한 죽음이란 이십대로 빗대어진 세계 전체의 죽음을 말하는지 모른다.
나 역시도 서른이라는 나이가 나 자신에게 엄습해 올 즈음, 그 나이를 지극히도 신화적인 것으로 절감하고 싶어 했다. 세상 밖의 모든 것들에 나는 바쁘게 스물아홉‘적’인 정의를 내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 때까지 아직, 채, 나의 공책에 사유의 화두로 떠오르지 못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이십대의 마지막 시선으로 보듬어 내야 한다는 절박한 의무감 같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대한 명료한 사유와 표현을 발휘하여 그 시기를 다 지내버리고 나면, 다시는, 결코, 살지 못할 이십대라는 청춘의 도장을 팔 수 있는 만큼, 다, 파내고 싶었다. 지금 쓰여진 이 몇 줄의 문장들에서처럼 그 시기는 끊임없이 쉼표들로 난무했다. 그 시기 나는 어느 문장의 뒤에도 채 마침표를 찍을 정신없이, 열렬히 장엄하고 싶었다. ‘서른’이라는 절기는 그렇다. 우리는 그 절기의 순간, 어떠한 장엄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서른이라는 단어를 쉽게 발설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만만하게 떠들어 대던 첫사랑의 깨어진 신화처럼, 서른이라는 신화 역시 깨어지고 난 후에야 그 모습이 서서히 바라보인다. 서른이라는 나이는 그 나이를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천천히, 지속적으로 찾아드는 나이 같다. 그래서 <파니핑크>를 포함하여 스물아홉과 서른 사이의 경계를 뜨겁게 다루는 숱한 문학, 영화 작품들 속에는 묘한 비현실이 섞여 있다.

창작집단 LAS <미래의 여름>

그러한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이 지닌 정반대의 힘, 현실적인 힘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 연극은 서른한 살이 된 미래가 열한 살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 시절 친한 ‘어른 친구’였던 고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고모는 서른한 살이 되도록 시골 동네에 혼자 살며 이미 떠나간 옛 연인의 가족을 보살피며 산다. 미래의 아빠, 그리고 동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사는 고모를 ‘비정상’이라고 보고 못 마땅해 한다. 그러나 어린 미래에게 고모는 누구보다도 자연스러운 친구이다.
이 연극은 얼핏 보면 어린이와 아이의 뜨거운 경계(앞에서 말한 그 ‘비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 경계를 에두르는 조금 부드럽고 허름한 공기를 보듬고 있다. 이 연극은 스물아홉과 서른에 대한 이야기를 부러 에둘러 가려는 듯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서른 ‘한’ 살이 된 미래를 극의 내레이터로 지정한다.
서른한 살이 된 미래가 관객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이야기 속 ‘연극’으로 들어가면 미래는 열한 살이 된다. 열한 살의 미래는 그 당시 서른 한 살이었던 고모와의 추억을 장면들로 더듬어낸다. 그 장면들은 추억을 더듬는 연극이면서 동시에 이제는 고모와 같은 나이가 된 미래가 들려주는 그 시절의 이야기(서사)이다. 이 작품은 연극과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 사이를 끊임없이 즐겁게 오고 가는 힘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결국은 연극도 이야기도 ‘아닌’, 열한 살도 서른한 살도 ‘아닌’ 지대에서 여전히 어딘가를 보이지 않게 떠다니고 있을 무언가를 바라보게 한다.
캐릭터와 내레이터를 오고가는 미래의 연기로 인해 이 연극의 모든 장면 속에는 열한 살과 서른한 살 사이의 시차가 두껍게 놓여진다. 이 연극이 쉬우면서도 뻔한 것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두께감 덕분이다. 이십 년의 시차가 미래의 몸속에 겹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관객은, 연극의 장면들이 이제야 다시 보여지는, 그래서 이제야 보듬어지는 장면들임을 안다. 이제야 돌아보아지는 것들의 때늦은 실체감 같은 것이 연극의 장면들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두께감이 엔딩에 이르러 합쳐진다. 엔딩에서 미래는 열한 살에서 서른한 살로 이십 년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창작집단 LAS <미래의 여름>

“방학이 끝난 이후 고모는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고모의 글씨는 국민학생인 저 보다 더 삐뚤빼뚤했죠. 그 편지를 끝으로 고모와는 소식이 끊겨버렸습니다. 어쩐지 조금 서운하기도 했고 조금 시원하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고모는 제 기억 속에서 빠른 속도로 사라졌습니다. 유치하게만 생각했던 친구들과도 잘 지내게 되었죠. 서로의 첫 사랑을 나누며 설레어 하고 때론 마음을 합쳐 누군가를 열렬하게 미워했죠. 어떤 대학에 진학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 인생을 설계하고 뿌듯해 하며 ‘아, 우리 이만큼 잘 해왔어. 뒤처지지 않고 잘 자랐어.’ 안도하면서 오늘까지 걸어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안도감이 미안해지는 거예요. 고모한테요. 울타리 밖에 있는 고모에게 왜 거기 있느냐고 이리 들어오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 같아서, 고모는 거기서 혼자였을 텐데 난 이 울타리 안에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어서…”

열한 살에서 서른한 살까지, 스무 해라는 시간의 두께가 이 몇 문장의 내레이션으로, 그러나 매우 담담하고 느릿한 속도로 통합된다. 정작 이 연극 안에서 (가장 화려하거나 열렬했을) 이십대라는 시간은 통째로 사라져 있다. 단 이렇게 몇 줄의 서사로 고요하게 상상될 뿐이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서른한 살이 된, 엔딩에 이르러서야 시차가 사라진 미래가 된 그녀는, 조금 허름해져 있다. 아니 조금 허물어져 있다. 어른과 어린이, 정상과 비정상, 잘 된 것과 잘 되지 못한 것, 잘 될 법한 것과 잘 되지 못할 법한 것, 그 사이의 벽이 허름하게 허물어져 있는 풍경. 그것은 어린 시절을 향수하는 낭만도, 현재의 낯선 현실에 맥을 풀어버리는 자조도 아니다.
시차라는 가상을 벗고 엔딩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사람’이 되어 관객 앞에 선 미래는, 이제야 한 세월을 살아내고 있는 중인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 연극에는 미래의 서른한 살과 열한 살, 그리고 고모의 서른 한 살의 표면들이 내비쳐 보이지만, 결국 이 모든 시기들에 대한 정의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뭉쳐진다. 마치 이 연극에서 생략된 미래의 이십대나 고모의 오십대 같은 시간들이 관객에게 모르는 시간대로 남겨진 것처럼. 사라지고 끝이 나도 지속되는 시간, 지나고 나서야 서서히 찾아드는 나이. 그것은 비단 서른이라는 나이 뿐 아니라 서른에 빗대어진 모든 절기들이 그러할 것이다.

[사진: 창작집단 LAS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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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이예은 공연 기획자, 드라마터그
국문학, 철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공연, 방송 현장에서 제작 프로듀서로, 기획자로, 혹은 아티스트들의 술친구로 10년 간 활동했다. 지금은 문예창작과, 사진예술과, 영화예술과, 연극과 등을 떠돌며 무언가의 창작과 감상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산학협력 교수로 재직 중이다.
metaism@naver.com
제65호   2015-04-02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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