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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과 나와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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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국서
그런 참사는 도저히 영감을 얻어서 머릿속으로 작품 쓰고 상상을 하는 게 안 됩니다. 이 사건이 극화로 문학으로 예술로 나올 것이라 기대하고 생각해야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도저히 못하겠어요. 공백상태가 됐습니다.
김소연
지난해 본 공연 중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하지만, 작가나 연출가 등 창작자가 자기 분노의 감정을 관객에게 강요하는 공연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세월호를 다루고 기억하는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대화는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이하여 열린, <세월호 3차 연장전 연극인포럼>(2015년 4월 11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필자가 느끼기에도 한국의 연극계에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그 작품의 경향이 나누어진다. 작년 하반기에 <먼 데서 오는 여자>와 <노란봉투>라는 연극이 세월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작가로부터 연출과 배우에 이르기까지 차분하게 무대화 되었고 이는 관객으로부터 진실한 반응을 이끌어내었다.
이번 [색깔있는 리뷰] 코너에서 살펴볼 작품은 앞서 설명한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무대화 되었던 또 한편의 세월호 ‘이후’ 연극이다.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조용히 분노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 이 작품은 극단 해적의 <콘크리트 벽 틈에서도 꽃은 핀다>. 아직 대학로에서 생소할 수 있는 젊은 팀이지만 작년 밀양연극제 젊은 연출가전 작품상 및 연기상을 수상했던 <형민이 주형이>와 올해 서울연극제에 당당하게 입성한 <휘파람을 부세요> 등의 창작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있는 젊은 ‘게릴라’ 집단이다.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참사를 ‘맞이’ 했을까. 혈기 왕성한 젊은 연극인들은 한편으로 그 비극을 어떻게 무대화 했을까.
무대를 상상할 수도 없으며, 한편으로 분노를 강요할 수도 없는 “세월호 이후” 의 연극은 어떻게 관객과 만나야 하는가. 그에 대한 일련의 고민과 연극 만들기의 과정들을 겪어온 <콘크리트 틈에서도 꽃은 핀다>의 황선택 연출을 함께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극단 해적 <콘크리트 벽 틈에서도 꽃은 핀다>

정진세
이 작품은 참사 이후에 무대에 올리신 작품이죠?
황선택
네. 참사 이후에 연극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이 작품은 작년 10월에 공연되었던 작품입니다.
정진세
세월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나의 연극을 어떻게 구상할지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때를 기점으로 세상에 대한 불화와 분노(혹은 슬픔)를 어떻게 풀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황선택
시작의 첫 의도는 ‘우리 모두 출연하자!’였습니다. 전에 공연할 때 스태프하고 고생했던 친구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출연하는 것이 첫 번째 의도였고요, 그 다음으로 연극을 하기 위해 ‘이야기’ 를 만들었습니다. 그 전에 일단 극장을 잡고 배우들과 같이 만들게 되었어요.
정진세
기존의 연극 만드는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네요? 일단은 무엇을 할지 준비하고, 출연진을 섭외하고, 극장을 잡는데... 이 작품은 ‘이야기’가 가장 늦게 나왔습니다. 결국, 관객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주제 또한 최종적으로 나온 셈입니다.
황선택
저는 사실 정치색이 없는 편이에요. 하지만 연극은 시대를 이야기해야할 의무가 있잖아요. 박근형 선생님께서 항상 신문을 보라고 하셨거든요. 언론을 접하고 보니 저도 모르게 이 사회와 권력, 현실에 분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이야기를 강자와 약자의 권력관계로 설명해서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콘크리트’와 ‘틈’ 그리고 ‘꽃’이 들어간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척박하고 야만적인 한국사회와 그에 저항하는 낭만을 그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허나 마냥 그러한 정서에 호소하는 작품은 아니다. 간단한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복잡한 한국사회의 권력관계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이를테면 최상위의 기득권과 최하위의 기층민이 서로 만난다면? 이라는 가정으로 드라마는 구성되어 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양아치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병원 원장의 이야기가 극 초반에 등장한다. 일견 싸구려 러브스토리 같기도 하고 로맨틱한 나쁜 남자 이야기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낭만’은 포장지에 불과하다. 남자는 구속받길 원하는 여자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면서, 입에 발린 멘트들을 남발한다. 귀를 의심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저질스러운 애정 사연에 거부감이 들 법도 하건만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불안요소들을 잠재운다. 양아치에게도 비뚤어진 배경이 있을 터이고, 병원 원장도 사랑받고 싶을 테니까.
곧바로 이어진 이야기는 집단 자살을 예정한 자들의 마지막 모임. 종교인을 사칭한 전직 사기꾼, 연극배우를 지망했지만 딱히 출연을 못해 답답한 남자, 여자를 좋아하지만 친구도 인기도 없는 찌질이, 술에 취해서 세상에 불만만 쏟아내는 주정뱅이 여자 그리고 입을 앙다문 묘령의 젊은 여자. 혼자 죽는 건 무섭고, 그나마 집단으로는 해볼만해서 모인 이들은 여전히 죽기 직전까지 철딱서니 없는 대화를 나눈다. 입에다 약을 털어 넣으려는 순간, 젊은 여자의 숨겨둔 사연이 드러난다. 5명이나 되는 캐릭터가 모두 돌아가면서 자기 이야기를 하건만 지루할 틈이 없다. 이들의 개성이 빛날수록 관객들이 알게 되는 것은, 이 모임이 결국은 사회 부적응자들의 집합이라는 점.
다시 이어진 병원원장과 양아치 남자의 장면. 알고 보니 이 남자는 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한 환자를 죽게 만든 살인범이고, 죽은 환자의 애인이 바로 자살직전의 여자였던 셈. 죽음을 잠시 미루고(?) 병원 앞에서 진상규명 시위를 하는 ‘미개한 루저들’의 소란을 뒤로, 뭐든지 막아주겠다는 병원장과 기자회견 시뮬레이션이 한창이다. 환자를 죽인 것은 남자지만 외려 기세 등등, 말실수 하는 병원장을 다그친다. 들어보니, 왠지 익숙한 말이다. 구명조끼는 입었나요? 병원을 해체하겠습니다. 중동으로 가면 되죠, 등등등. 닭대가리라고 병원장의 머리를 내리치는 양아치 남자에게도, 떼를 쓰면서 병원으로 진입하는 자살자들에게도 감정이입이 쉬울 리 없다. 그래서 이 연극은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진상규명을 포기한 경찰 대신, 정의구현을 위해 스스로 나선 루저들은 병원장과 양아치가 밀회를 즐기는 별장으로 난입하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모조리 사로잡히고 만다. 죽기로 각오한 성인 남자 세 명에 술고래 한명, 미친녀(?) 한명이 한패를 이뤘지만, 건장한 남자 하나를 당할 수가 없다. 이들은 무릎이 꿇린 채 저마다의 입담을 뽐내지만, 그 웃음이 지속될수록 허탈함의 크기는 더욱 커진다. 자신들을 불태우기 위해 뿌려대는 기름에 대고 “휘발유 버킷 첼린지”라며 깔깔대는 이들이 모습은 얼마나 ‘노답’인가. 한편으로 무능하고 무력한 선의를 단숨에 짓이기는 악당들의 자기합리화는 어찌나 ‘소름’인가.
주제를 숨긴 채, 혹은 상징을 뒤죽박죽 배열한 채 달려가던 연극은 마지막에 이르러, 원장의 입에서 속내를 드러낸다. 욕망에 눈이 멀어 푼수 같던 원장도 이때만큼은 비열하리만큼 냉정하다. “다음 세상에는 병신처럼 살지 말고 나처럼 살아라” 말하며 퇴장한다. 니체가 설명한 ‘권력에의 의지’가 곧, 인간 삶의 방향성임을 선포한 것이다. 약자들이 발버둥 쳐도 기득권의 힘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뜻을, 극장 안의 모두가 이해했고 이내 객석과 무대는 다 같이 잠잠해졌다. 실상, 그 뒤에는 뻔했다. 씁쓸했고, 허무했다. 유예된 죽음을 이제야 당당히 맞자며 각성한 루저들이 뭔가를 외쳤을 것이지만 그 외침은 그보다 앞선 권력층의 ‘경고’를 넘지 못했을 것이다. 콘크리트 틈에서도... 꽃은 필까, 과연?

극단 해적 <콘크리트 벽 틈에서도 꽃은 핀다>

정진세
저는 연극을 보면서 기득권이든 혹은 약자든 그들이 갖고 있는 허위의식에 대한 비판의식을 느꼈습니다. 혹시 그러한 부분에 관심 갖게 된 배경이랄까, 공연작가로서 그것에 주목하는 이유랄까 하는 지점들이 궁금합니다.
황선택
이 작품을 하면서 권력이라는 단어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봤습니다. 권력이란 무엇일까. 예전에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도 왜 권력을 쥐면 사람이 변할까, 대체 권력이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권력을 쥐려고 하는 것인가. 단순지 ‘분노’에 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깊은 사유로 나가고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거죠. 그러고 보니, 권력에 저항하는 자는 자연스레 권력을 얻기 위해 저항하는 모습이 되고, 또한 저항의 무리 내부에서도 권력관계는 존재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권력은 우리 생존의 의지이며, 삶의 원동력일 수 있다는 시선이 생겼고요, 이것이 작품 안에서 삐딱하게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에피소드 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강자의 에피소드와 약자의 에피소드를 먼저 정렬한 뒤, 그것을 서로 마주치게 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인간 심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대사와 질퍽한 상황 때문인지, 관객들은 악하든, 멍청하든, 저질이든 무대 위 인물에게 금세 빠져들 수 있었다.
이른바 ‘박근형식의 연극무대’와 비슷하면서도, 한편으로 그 실감나는 ‘경험치’들이 젊은 관객과 더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다. 즉, 이 연극의 동력은 ‘역사의식’과 더불어 ‘동시대 감수성’에서 근거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빈번히 나타나는 B급의 정서 처리방식이나, 뜬금없는 대사들은 ‘코미디’로 귀결되면서, 웃기지만 씁쓸한 동시대를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병신 같지만 멋있는’ 혹은 ‘너무 병신 같아서 웃기거나 슬픈’ 모습들은 현재의 무기력한 우리를 너무나도 적확하게 묘사한다. 결국, 이러한 권력지향의 씁쓸한 인간의 초상은 계층과 계급에 대한 이야기이며, 참사 뒤에 명백히 도사리고 있는 사회구조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잘 들여다보면, 이 연극에선 등장인물 모두가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흥정을 하며, 그 ‘죽음’이 야기한 ‘고통’에 대해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지와 무감각이야말로, 젊은 연극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세월호 이후 비감(悲感)의 정체가 아닐까.

정진세
연대가 불가능할 것 같은 모자란 무리들이 저항을 하고, 나중에 사악한 강자에게 몸을 던져 달려듭니다. 하지만, 그 목숨 건 저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는 결말입니다.
황선택
엔딩부분에 순수한 무리들이 죽고 악당이 살잖아요? 심지어 악당들이 자기 입장에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저는 관객이 -해피엔딩이 아닌- 약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불공평한 현실을 인정하고 관객이 보면서 분개하길 바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리 내고, 저항함으로써 최소한의 것을 찾기를 바랐습니다.

황선택 연출이 그려내는 세계는 ‘인간의 처절한 밑바닥’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러 갖춘 스타일이기 보다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할 수 없는 ‘냉소와 무감’ 의 세월이기 때문이리라. 따라서, 차갑게 식어버린 인간의 ‘서정’ 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배우는 삭발을 하고, 무대 위에서 ‘안 되는 딕션’으로 소리를 지르고, 선정적이고 노골적인 단어들로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연극이 분노표출을 위한 연출의 자기만족으로 전락할 수도 있고,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한 풍자장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다행히 극단 해적이 보여준 이번 작품은 뜨거운 분노감정 만큼이나 차가운 고발의식이 자리하고 있었고, 기괴한 방식으로 조합된 연극적 상징은 나름의 탄탄한 논리를 구축해내고 있었다.
이는 아마도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자책했던 젊은 연극이, 자성하고 자구하면서 전진했던 과정에서 발견한 나름의 방법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나가 겪은 ‘사건 이후의 연극’을 해내는 것. ‘나’로서 그 사건을 체험하고 복기하는 것. 어쩌면, 세월호 이후에 우리가 연극을 사용하는 방식은 아닐까 한다.

극단 해적 <콘크리트 벽 틈에서도 꽃은 핀다>

황선택
앞에 작품들은 어두워요. 이번 작품은 연극의 풍자기능? 그 부분을 좀 재미있게,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게 해보자,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정진세
그에 대해서 관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편인가요.
황선택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해요.(웃음) 하지만 재미있어 해요. 원래 해적의 이야기가 시궁창까지 가는 스타일이에요. 근데 이 작품은 재미의 요소들을 포진하고 있어서인지... 결국은 권력층의 자기 합리화 인데 저는 그 부분을 폭로하고 싶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하고자한) 비판의 지점은 분명히 있는 거죠.
정진세
연극을 하는 연출로서,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복잡한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황선택
작품을 하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에 고민이 많습니다. 저는 정직한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자문했습니다. 죄책감이 밀려 왔지만... ‘조금 뻔뻔하게 힘이 없으니까 소리치자! 시장 리어카 꾼의 험상궂은 욕설같이!’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 극단 해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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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세

정진세 극단 문(Theatre Moon) 극작가.
연극원에서 연극이론과 서사창작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주로 홍대 앞에서 공연제작 및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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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6호   2015-04-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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