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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것은 ‘반드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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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막 변형 중에 있는 위태로운 얼굴의 생김새를 본 일이 있나. 마치 공기 중에 노출된 사과의 표면이 하루라는 시간의 흐름을 증명해내듯, 그 질감과 색감을 적나라하게 ‘변성’시키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얼굴. 어젯밤 사귀기로 약속을 하고는 그 다음 날 막 해후한 연인들의 눈빛 사이에서, 기밀한 정보라도 염탐하고 있는 듯 핸드폰 액정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의 얼굴에서, 이제 막 마음속에 솟아오른 꿈의 형체를 손끝으로 더듬어내는 청년의 생기어린 얼굴에서
그 절정의 순간,
안타까운 순간,
부서지는 순간,
기어이 변형이 될 순간

그 모든 뜨거운 것들은 결국, 변한다.

“세상에 안전한 것은 무엇도 없다” - ‘알퀴오네와 케윅스’ 중에서

노네임씨어터 <변신 이야기>

# 변형*이라는 모티프

(* 이 글에서는 ‘metamorphoses’를 - 그 본질적인 의미에 더욱 집중하고자- ‘변신’이 아닌 ‘변형’, 때로는 ‘변성’이라는 단어로 사용하였다.)

이 연극은 로마 시대의 작가 오비디우스가 서사시의 형식으로 정리한 <변신 이야기 Metamorphoses(A.D. 2~8)> 가운데 10개의 에피소드를 (천지창조, 마이다스, 알퀴오네와 케윅스, 에뤼식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포모나와 베르툼누스, 뮈라, 파에톤, 에로스와 프시케, 바키우스와 필레몬) 현대적으로 각색한 메리 짐머만의 희곡 <변신 이야기(1997)>를 연극화한 작품이다.

이 연극에서의 변형은 단 하나의 메타포도, 또한 단 하나의 방향성을 지닌 어느 계기점도 아니다. 작품 속 변형의 순간들은 무에서 유로 생명체를 탄생시키기도 하고(천지창조), 살아있는 것을 다시 죽은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금’이 되어 죽고 마는 마이다스의 딸). 혹은 팽만한 것을 허기진 것으로, 그래서 오만을 절망으로 벌하며(‘허기’가 된 에뤽시톤의 오만함), 광기를 자연의 힘으로 치유한다(‘나무’ 혹은 ‘녹는 것’이 된 뮈라의 광기). 또는 빛나는 것에는 사늘한 것을(사라지는 것으로 변하는 오르페우스의 사랑), 혹은 절망 속에는 고요를(‘새’로 재탄생한 알퀴오네와 케윅스) 침투시키기도 한다. 마치 사랑이나 굳셈과 같은 성경 속의 주제어처럼, 작품 속에서 변형이라는 키워드는 그 해석의 깊이와 방향성이 끝이 없다.

많은 에피소드들 가운데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변형은 결국, 어떠한 새로운 세계로 탄생‘되고 마는’ 순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는 탄생 이후에 어떠한 의미로든 맞이하게 되는 구원이나 새로이 다시 시작되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모두의 탄생처럼, 탄생하기에 이른 ‘힘’에 집중한다.

※ 사소하기는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변신을 하지 ‘않는’ 힘에 대한 관심 역시 기울이고 있다. 포모나에게 구애하는 베르툼누스 에피소드에서 변‘장’(물론 이것은 변신이라기보다는 너무도 ‘인간적’인 변신, ‘얄팍한’ 변신, 즉 변신의 ‘패러디’이기는 하지만)이 변‘장’하지 ‘않음’에 지는 것을 보여준다.

# 변형이라는 운동감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공연에서 변형의 형체가 물속에서 모아졌다가 다시 흩어지는 시각적 이미지들로, 혹은 음악이 사운드로 해빙되는 지점에 맺혀지는 청각적 질료들로 힘을 발휘한 점이다. 감각의 힘으로 그려지는 변형의 순간들이 어찌할 수 없는 육체의 지점들인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럼으로 이 공연에서 변형이라는 모티프는 문학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고, 감각의 힘들로 ‘표현’된다. 시각으로, 청각으로, 혹은 그 결합 감각으로 표현되는 변형이란 어떠한 ‘힘’으로 구현되고 있었다. 그 힘은 공간의 운동감으로도, 시간의 운동감으로도, 음악의 운동감으로도 표현되고 있었는데 그 힘들의 세부를 들여다보고 싶다.

노네임씨어터 <변신 이야기>

## 공간의 운동감

이 공연에는 공간의 운동감, 하나의 장면 안에 서린 정지된 이미지의 운동감 같은 것이 들어 차 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무대의 구도를 읽어내려 가자면 다음과 같다.

신의 세계

음악의 세계

물의 세계

그리고 그 주변을 서성이는 세계 (이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 언어의 세계, 가시적인 세계, 그리하여 인간의 세계이다. 다시 말해 가장 ‘시시한’ 세계가 이곳에 있다.) 연극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하는 인간들’(=언어를 지닌 인간들)의 세계는 가장 ‘시시한’ 세계 안에 속해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하는 내레이터들의 입지에 대해서는, 다시 말해 이 연극의 형식이 오비디우스의 신화를 모티프로 한 서사시의 소산이니 하는 등의 시시한 분석은 건너뛰자. 이야기의 이야기, 서사시라는 스토리텔링, 그것의 고백성, 이야기의 이야기가 해빙되는 듯한 ‘형식’보다는, 이 이야기의 내레이터들이 집중하고자 하는 이 작품 본연의 것-물의 세계, 물속에서 빚어진 감각의 세계, 그리하여 이 작품이 ‘믿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무대에서 그려내는 이미지의 구조화가 강인하다. 이를테면 케윅스의 망령이라도 부여잡으려 알퀴오네가 물속의 케윅스의 다리 사이를 힘없이 유영하던 그 나약하고 깊은 동선. 그 이미지의 구조. 그리고 에뤼식톤과 굶주림신이 한껏 포옹을 하며, 기어이 한몸으로 겹쳐지던 이미지의 구조.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 일화에서 해설자가 보면대를 물속에 넣는 박력 넘치는 액트 또한 강렬하다. 물이라는 구조를 중심으로 무대 이미져리에 다양한 변형 감각을 부여하는 장면들이 알차다.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케를 뒤에 둔 채 걸어가는 장면에서 부여된 이미지의 구도는 사진으로 찍어놓고 싶을 정도로 그 아름다움이 명확하다. 뮈라가 물속에서 아버지와 정사를 벌이는 장면에서는 그 느릿함, 정적인 속도감이 구슬프다. “죄책감은 있었으나 수치심은 없었다.”를 구현해내는 듯한 움직임의 이미지. 파에톤이라는 캐릭터를 땅에서는 심리치료사와, 하늘에서는 아버지라는 신과 연결된 구조 속의 인간으로 해석해낸 이미지의 구도 또한 재미있다. 그것은 땅에서는 단순히 환자, 보다 궁극적 영역에서는 이상한 이해가 가능한 질펀한 존재일 수 있으리라는 한 인간의 구도를 그려낸다.

### 시간의 운동감

하나의 장면에 서린 공간적 운동감과 함께, 장면과 장면이 이어지는 ‘사이’의 운동감, 다시 말해 이미지의 템포가 만들어내는 형태감 같은 것 또한 재미있다. 장면과 장면 사이의 운동감,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전환에 깃든 율동감이 살아있다. 그 율동감의 탄력이 좋고, 그것이 음악이라는 전환적 힘과 결합하여 새로이 탄생하는 지점이 좋다.

이를테면 케윅스의 격렬한 폭풍 씬 끝에 그의 죽음을 알퀴오네에게 알려야 하는 잔혹함을 ‘잠의 신’의 힘에 빌리게 되는 지점. 여기에 서려 있는 격렬함과 나른함의 대비 같은 것. 그 격렬한 것 끝에 찾아오는 느릿함의 마비 같은 것이 극의 공기를 변형시키고 만다. (이 전환의 지점에는 고래야의 <자장가>가 뜨거운 역할을 해낸다.) 장면과 장면 사이, 그 안에는 시간이 녹아 있다.

그리고 에뤼식톤이 급기야는 자신이 스스로를 먹는 것으로 마감되는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본 아페티 Bonne appetie’라고 외치는 함성. 허기에 시달린 걸신들이 모두 한 데 나와 죽음의 춤을 추는 것과 같은 이 미친 함성 씬 바로 이후에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한 인간이 한 인간을 그토록 잊지 못하는 이야기-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의 첫 장면인 것도 재미있다. 특히 오르페오가 뱀에 물렸을 때 연주된 대금 소리의 고단함과 고요함(고래야의 <이제 가면 언제 오나>)은 바로 앞 장면에서 남기고 간 파괴력 짙은 함성의 여운과 대비되어 매력적이다.
이미 한 번 잃은 연인을 다시 한 번 잃는 이야기를 형상화한 이 에피소드는 그 ‘다시 한 번’에 초점을 모았는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한 번’ 에우리디케를 잃는 오르페우스를 보여준다. “안녕”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몇 번이고 사라지는 에우리디케. 이별의 순간이란 단 한 번 이루어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 같으나, 이토록 무한 반복되리만큼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순간이든, 다시 한 번 맞이하게 되는 순간이든,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무언가 끈질긴 시간 같은 것이 엿보이는 장면 속의 정성.
이어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 헤르메스>의 해석이 덧대어지는데, 오르페오의 시점에서 에우리디케의 시점으로 일화를 재편하는 이 부분은 바로 앞에서 제시된 이야기가 얼마나 다른 이야기로 변형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의 변형, 장면과 장면 사이의 변형. 공연에는 이렇게 사이와 사이의 것들이 비틀리고, 충돌하고, 또 연결된다. 그 율동하는 감각으로 연결된 ‘사이’의 것들이 공연의 섬세한 근육을 이루고 이것이 비로소 이 공연의 ‘전체’라는 육체를 ‘metamorphoses’로 육화시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노네임씨어터 <변신 이야기>

#### 음악의 운동감

음악이 사운드로, 사운드가 스토리텔링으로, 분해되고 방황하는 지점이 있어서 좋다. 음악이 군데군데 ‘안전하게’ 사용되고 있는 부분들도 많지만, (※ 옴브레 (밴드 ‘고래야’ 리더) : “B.G.M이기에 튀어서는 안 된다. 다만 ‘공들인’ BGM 이고 싶었다.”) 음악이 B.G.M을 넘어서는 지점, 자유로움을 획득하여 비로소 연극의 감각을 해방시키고 해빙시키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러한 지점들. 오르페오가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하데스에게 가는 길에 고래야의 보컬(권아신)이 일어나 노래를 한다. 음악의 세계가 극의 세계로 유입되는 이 지점이 아름답다. 이 장면은 비로소 ‘아름다우리만큼’이다. 비로소 노래 할 수 있는 순간 같은 것. 하데스의 마음을 움직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의 아름다운 음악 연주만큼이나 아름다워야 했을 노래였다. 아름다울 수 있는 힘의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 이 노래는, 아름다움의 가능성으로써 신‘적’인 힘-인간의 죽음조차도 되살릴 수 있는 힘-을 부여잡고자 하는 이미져리 같다.

그러나 음악이 장면을 창조해낸 순간은 무엇보다 바우키스와 필레몬 이야기에서이다. 거지로 변신한 제우스, 헤르메스가 고개를 숙이고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이들이 두 신에게 온갖 정성어린 음식을 내어 주는 부분에 음악은 줄곧 잼(jam)으로 연주된다. 이 장면은 두 인간이 단지 방랑자인 줄로만 알았던 두 신을 집에 들여 정성껏 대접을 하는 장면이다. (* 대개 신은 인간 세계에 ‘이방인’의 모습을 띠고 온다.)

정진세
이 공연의 음악 작업을 하면서 특히 흡족했던 부분이 있는가?
옴브레
바우키스와 필레몬 이야기에서 신과 인간이 만나 대화하는 장면. 이 장면은 철저하게 잼(jam)으로 연주했다. 그래서 매 공연 때마다 다른 음악이 나왔다. 철저하게 즉흥이면서도 앙상블을 잘 만들어낼 수 있는 악기를 구성하였다. (타악기에 타블라, 관악기에 소금, 현악기에 기타)
이예은
이 장면은 이 공연에서 보기 드물게 무언가, 안전하고 따듯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 특별히 잼을 부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옴브레
이 장면에서조차 무언가 계산된 연주를 하고 싶지 않았다. 이 장면은 ‘자연’을 닮은 장면이라 생각한다.

이 장면은 전체 이야기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안전해’ 보이는 장면이다. 행복의 가능성을 믿는 인간과 그러한 인간을 바라보는 신들 사이에 어떠한 충돌도 없어 보이는 것만 같은 유일한 장면. 그것은 어쩌면 바우키스와 필레몬의 소원이 너무도 소박한 소원이기에 그러한지 모른다. 신이 인간에게 소원을 말하라 했을 때 그저 ‘저희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죽게 해 주세요.’를 소원으로 빌 수 있는, 인간의 소박할 수 있는 힘. 그 허름함. 그 힘이 칭찬받는 장면이라고 해야 할까. ‘늙은 거지’로 변신한 신들과 누구보다도 보잘 것 없고, 늙고, 허름한 모습의 두 인간이 조우하는 장면에서야 비로소 세계가 안전해지는 이유는 뭘까? 그토록 강렬하고 오만한, 치열하고 치욕스러운, 치명적인 세계의 변형담들 끝에 이토록 허름한 변형담에 이르는 이유는?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세계가 조금 안전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 속에 비로소 어떤 한 인간의 아리아가 터져 나올 때, 신의 목소리로 무장한 미사 가운데 “평화를 빕니다.”를 나누는 어느 허름한 사람의 손등을 볼 때, 그 온전하고자 했던 힘은 비로소 진짜의 것으로 다가온다. 결국 뭉클함을 자아내는 것은 인간의 몸이다. 그것도 가장 허름한 인간의 몸. 그 몸은 초라하고 허름하고 질박할수록 가슴을 울린다. 완전하지 못한 몸이 지닌 힘.

노네임씨어터 <변신 이야기>

# 에필로그

그 모든 뜨거운 것들을 변한다. 그러나 그 변형의 순간이란, 그것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지극히 그 방향을 알 수 없고, 그것이 당도하고 난 이후에도 그 의미를 깨닫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그러한 채로 끊임없이 지속되는 삶을 산다. 하여, 변형의 순간이란 그저 마치 우리들 인생의 매 순간들 같다.

그래서 변형담이란 비단 신과 연결된 인간, 혹은 탄생을 둘러싼 존재와 같이, 강렬한 것을 둘러싼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변형이란 어느 날 문득 길거리에서 마주친, 변성의 순간을 한껏 겪어 내고 있는 어느 청년의 얼굴이나 옆 테이블에 앉은 들뜬 연인의 모습 그 전체에 담겨 있다. 그 지속의 시간 속에서 소소한 죽음을 경험하며, 소소한 전이를 맞이하는 삶, 그 전반에서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변형의 순간들이 거세된, ‘평온한 7일 간 (할시온의 주간)’과 같은 시간은 오히려 삶에서 동떨어진 ‘죽어 있는’ 시간일 것이다. (cf. 영화 <미스터 노바디>에서 신의 세계가 그 어떠한 변수도 작용하지 않는 진공 상태의 세계였던 것처럼)

그러하기에, 살아있기에, 끝나지 않는 일. 혹은 살아있는 한, 끝나지 않는 일. 이를테면 인간의 정신이 특별한 이유는 인간의 몸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는 역설 같은 것. 그 이상한 연결처럼 끝나지 않는 힘. 고난이 끝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행복도 귀결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힘. 무언가가 계속 연결된 힘에 의해서, 세계는 조금 ‘이상한’(≠ linear, well-made, 매끈한, 명쾌한) 형태로 지속된다. 그래서 자꾸만 형태가 이상해지는 것을 되풀이하게 되는 우리의 삶 전체를 ‘metamorphoses’라는 모티프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 Francis Bacon,

노네임씨어터 <변신 이야기>

‘(앞의 글) 그것도 가장 허름한 인간의 몸. 그 몸은 초라하고 허름하고 질박할수록 가슴을 울린다. 완전하지 못한 몸이 지닌 힘.’ 이를테면 이러한 힘을 필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본다. 그의 그림에는 ‘힘’에 의한 뼈와 살의 분리로 낭자하다. 그래서 살과 뼈가 분리된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리하여 중력의 본질에 더욱 밀접하게 다가 선 어떤 형체를 그린다. 그는 힘의 흐름에 집중하여 사물의 새로운 질서를 포착해내는데, 그 안에는 결코 추상으로 전락하지 않는 긴장과 충돌이 있다.
중심을 이탈하고 있으면서도 결단코 중심에 매달려 있는 힘. 뼈대가 녹아들어가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온 힘을 다해 그 뼈대에 붙어 있는 살점들이 춤을 추는 힘. 이것은 가장 뜨거운 순간에 변형이 되는 힘, 그리고 그 변형의 순간에도 온 힘을 다해 뜨거움에 매달려 있는 힘과 같다.

[사진: 노네임씨어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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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은

이예은 공연 기획자, 드라마터그
국문학, 철학, 연극학을 전공했다. 공연, 방송 현장에서 제작 프로듀서로, 기획자로, 혹은 아티스트들의 술친구로 10년 간 활동했다. 지금은 문예창작과, 사진예술과, 영화예술과, 연극과 등을 떠돌며 무언가의 창작과 감상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산학협력 교수로 재직 중이다.
metaism@naver.com
제68호   2015-05-21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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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나 참.

2015-05-22댓글쓰기 댓글삭제

어렵다
어렵다. 글이 어렵습니다. 이 연극이 이렇게 어렵게 봐야하는 연극이었단 말인가.

2015-05-26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