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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몸과 나와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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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연극제 폐막작 - 극단 동 <게공선>

1.

공장에는 노동자가 있다. 극장에서 배우가 있다. 두 문장이 절묘하게 겹쳐지는 곳에서 극단 동의 <게공선>이 닻을 내린다. 공연을 올린 '인디아트홀 공'은 본래 금속성형을 다루던 공장이었다. (지난 5월에는 양손프로젝트의 <여직공들>이 상연되었다.) 자본의 예술공간에 침투해 온갖 자리를 다 내어준 예술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쇳냄새가 남아있는 통로를 지나, 홀에 들어서니 무대를 사납게 밝힌 '형광등'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배우들이 열을 지어 등장하고, 무대보다 먼 곳에 하나둘씩 쭈그리고 앉는다. 게공선은 배우와 관객의 사이에 자리하였다.

<게공선>은 원작 소설이 있다. 극단 동은 - 그간 해왔던 대로 - 연극적으로 '각색된' 무대를 선보인다. 역사적 맥락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1920년대, 질주하는 근대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인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다. 제국의 식민지로써, 자본의 착취 대상으로써 이중으로 배제된 이들은 국민도 아닌 '예외상태'의 존재로 서서히 몰락해간다. 그 처참한 '침몰' 과정을 극단동의 배우들이 몸으로 그렸고, 여백은 관객들의 상상으로 채웠다.

고통이 일상화되면 말을 잃어버린다. 첫 장면에서 연기는 그렇게 각인된다. 배우가 말이 없는 건, 설정이 아니라 ‘실재’ 같다. 배우가 입을 다무니, 관객도 표정이 무겁다. 노동자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관객 앞에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여주기도 하고, 보여준 것을 다 거두어 가기도 했다. 그 연기는 느린 호흡의 ‘마임’ 을 연상시켰고, 굴신(屈身)을 장착한 ‘춤’ 처럼 보였다.

변방연극제 폐막작 - 극단 동 <게공선>

그물을 잇는다. 배를 띄운다. 바다에 뿌린다. 게를 잡는다. 으스러뜨린다. 살점을 발라낸다. 배우들은 관객들의 머릿속에 하나의 문장으로 기입될 만큼 섬세하게 동작들을 선보인다. 대사는 아주 가끔씩, 작업의 내용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전부. 관객들은 오로지 배우의 몸에만 쏠린 연극적 집중을 감당해내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기하거나 극적인 느낌은 별로 없다. 게공선 위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일상이 ‘연기’ 의 전부다.

중반이 넘어가면, 극장에 존재하는 사람의 반 이상이 지쳐있다. 노동과 이를 모방한 연기와 이를 응시하는 관람이 서로를 닮은 까닭이다. 무심히 비껴가던 노동자들의 관계는 그제야 조금씩 눈에 들어온다. 이들은 조별로 경쟁하면서 점차 노동의 강도를 높여나간다. 컨베이어 벨트처럼 분업화된 어부들은 옆줄을 의식하기도 하고, 바로 앞의 동료를 추궁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김없이 바다에서 찾아오는 풍랑과 그로 인한 침몰. 그리고 동료의 죽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연극이지만, 노동자들이 장송곡을 웅얼거리는 장면에선 서글픔이 밀려든다. 이윽고, 노동하는 몸은 두 갈래로 난 길 앞에 선다. 죽음으로 굴종할 것이냐, 연대함으로 저항할 것이냐.

참고로 이 작품은 변방연극제를 거쳐 혜화동 1번지에서 동인들이 주관한 <세월호> 무대에서 다시 볼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맥락에서 달라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허나 변치 않는 점도 있다. 국가는 재난에 빠진 이들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

변방연극제 폐막작 - 극단 동 <게공선>

2.

부당함을 고발해야 하는 창작자와 다양한 입장을 균형 있게 보고자 하는 수용자가 함께 머무를 때, 이러한 파도(波濤)를 어떻게 통과해갈 것인가. 분명, 우리는 단숨에 게공선의 '노동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감각을 예측하는 감응력과 잠시나마 그들이 되어볼 수 있는 상상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관객의 능력이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주체들을 일시적으로 경유해 본다. 창작자의 눈으로 게공선을 보고, 그 안에 타고 있는 노동자를 살피고자 하는 이유에서다.

소설가의 눈으로 게공선을 본다. 스물일곱 살의 은행원이었던 고바야시 다키지의 눈에 비친 노동현실은 암담하다. 1920년대 북해도의 항구에서 떨어진 캄차카 반도에서 노동자는 '떠다니는 공장'에 탑승한다. 지옥행 슬로보트에서 극악한 인간, 사나운 자연은 모두가 노동자가 맞서야할 상대다. 나약해진 마음을 허리에 붙들어 매고 어부들이 한데 모였을 때, 그제야 진정한 사건인 '연대'가 발생한다.

연출가의 눈으로 '게공선'을 본다. 르포 형식의 소설을 재현하기 위해, 연극은 그저 배우의 몸을 '빌린다'. 말하지 않는 대신에 보여줄 것은 무엇인가. 게공선에 탄 이들은 마땅히 선(善)하거나 혹은 악(惡)하거나 하지 않았으리라. 이념도 이상도 상관없다. 어떤 성격을 가졌고 어떤 마음을 품는지 중요치 않다. 개인에게 성격을 허락하지 않았던 소설처럼, 연극도 개인의 심리에 의거하지 않는다. ‘연대’ 라는 유일한, 그리고 유의미한 사건도 연기(演技)될 수 없다.

배우의 눈으로 게공선을 본다. 저기에 어부를 연기하고 있는 배우가 보인다. 더 멀리엔 관객이 있다. 무언가 벌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시선들과 아무것도 벌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시선들. 이들은 서로를 보며 대치중이다. 그러나 사건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이 연극의 참된 참여가 된다. 오히려 시간의 지루한 흐름을 이겨내는 것이야말로, 이 노동하는 연극의 본질이 아닐까. 반복과 반복으로 숙련된 연기는 이내 노동과 다르지 않음을, 배우의 ‘몸’ 이 말하고 있다.

관객의 눈으로 게공선을 본다. 게를 낚는 어부를 본다. 노동자가 보인다. 그들의 노동하는 ‘몸’ 을 보고 ‘마음’ 은 동요한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부동과 침묵의 몸들 또한 감당해야 한다. 시선의 부대낌 속에서, 어김없이 자의식이 발동한다. 살벌한 표정을 하고 욕을 내뱉는 거친 어부에게 어떻게 마음을 주어야 할까. 하지만 저 이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산업재해를 몸으로 받아내는 노동자의 이야기다.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대신할 뿐이다.

변방연극제 폐막작 - 극단 동 <게공선>

비평가의 눈으로 게공선을 본다. 게공선의 노동자들은 자연과 싸우고, 조직과 싸우고, 사회와 싸운다. 추가적인 것이 있다면, 자기자신과 싸운다. 태업하고 파업하면 이길 수 있을까? 연대하면 세상이 바뀔까? 게공선 노동자들의 쟁의와 연대는 소설에선 빛을 발하지만, 연극에서는 암담하게 제시된다. 패배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지금, 여기의 실상임을 알기에. 연극과 현실에서 공통적으로 발생된 하나의 사실이 아득하게 몰려든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어지는 게공선의 뱃고동은 마치 살려달라는 손길을 거부하는 국가의 단호한 대답처럼 들려온다.

90여분에 달하는 시간동안,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가, 연출가가 되었다가, 다시 배우를 보고,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을 살피다가, 또 다시 나로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배우들의 흥건한 땀은 이 곳이 ‘바다’ 였다는 것을 재차 증거했다. 극단 동은 시종일관 그들의 몸을 학대했으나, 폭력적이지 않았다. 최근의 한국연극에서 보여준 이유 없는 자극과 미친 육체의 들이댐을 벗어났다. 노동자로 현신한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이 구역의 정직한 몸은 바로 이들이었다.

[사진: 극단 동 제공]

태그 변방연극제,극단 동,게공선,정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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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세

정진세 극단 문(Theatre Moon) 극작가.
연극원에서 연극이론과 서사창작을 공부했으며, 현재는 주로 홍대 앞에서 공연제작 및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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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호   2015-08-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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