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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인생이라니
불 좀 꺼주세요

박일호_경제단체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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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좀 꺼주세요

맛집만 원조가 있는 게 아니다. 연극에도 원조가 있다. 20년 전 대학로를 뜨겁게 달궜던 한국 연극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다시 무대에 섰다. 1990년대 연극계를 주름잡았던 명콤비 강영걸 연출가와 이만희 작가가 뭉쳐 연극 <불 좀 꺼주세요>를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 이 연극은 지난 1992년 대학로극장에서 초연 당시 장장 3년 6개월 동안 롱런하며 20만 명이 넘는 최다 관객을 동원한 대학로의 역사가 된 작품이다. 막 20대를 지나 서른을 바라보던 나 역시 20만 명 중 한 명으로 그 극장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젊은 산골 여교사와 학교 농장 일꾼이 서로 사랑하지만 결국 헤어졌다가 10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다. 여자는 학교도 그만두고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질질 끌고 있고, 남자는 부유한 집 딸을 만나 그 배경으로 국회의원까지 됐다. 어쨌거나 그 둘은 각자 배우자가 따로 있는 유부남과 유부녀다. 두 남녀의 불륜은 씨줄과 날줄로 견고한 매듭처럼 얽혀 있는 삶의 굴레를 끊어내는 칼이 된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고, 그들의 사랑이 전혀 변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위선과 허위 속에서 살아가던 가면을 벗고 본래의 자기 모습을 찾기로 결심한다.

<불 좀 꺼주세요>는 불륜을 소재로 19금(禁) 팻말을 단 데다 여배우 신체노출 등에 따른 외설시비까지 하나같이 화제의 연속이었다. ‘불 좀 꺼주세요’라는 제목 역시 야릇한 상상과 왠지 모를 기대를 불러 온다. 말초신경을 짜릿하게 자극하는 농염함과 아울러 아침 드라마의 단골 소재를 닮은 진부함이 함께 녹아있다. 비록 잔잔하긴 하지만 가정이 있는 중년남녀가 서로를 탐닉한다는 선정적인 줄거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구사하는 어휘나 장면들이 1970년대 흑백텔레비전을 보는 듯 농도가 짙지는 않다. 정작 연극은 인간이 얼마나 이중적인 존재인지, 또 제도 속에서 운명에 예속되어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삶과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적인 사랑을 끊임없이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연극은 이러한 인간의 이중적인 면을 정면으로 치고 들어가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게 아니고, 영리하게도 ‘분신’이라는 장치를 이용한다. 이들 남녀의 뒤얽힌 인연을 겉모습인 본신(本身)과 속모습인 분신(分身)의 4중주로 풀어낸다. 세상 살만큼 살고 알거 다 아는 중년 남녀가 왜 이리 뜸을 들이나 싶은 그 순간 젊은 남녀가 각각 내면의 분신으로 등장해 상반된 서로의 속내를 까발린다. 그러다보니 관객들은 고리타분한 대사를 주고받으며 안쓰러움을 연출하는 두 남녀 주인공보다도 발칙하지만 솔직한 20대의 분신 모습에 호기심과 공감을 표시하게 된다.

  • 불 좀 꺼주세요 불 좀 꺼주세요
  • 대부분의 장면에서 4명의 남녀배우가 한 무대에 거의 동시에 등장해 호흡을 맞춰 연기를 해야 하는 게 녹록지가 않았을 텐데, 끼어들고 빠지는 타이밍이 절묘하고 무대 사방을 들고 나는 동선이 깔끔하다. 6명의 배우들이 무대 구석구석을 고르게 차지하고 안정감 있는 연기를 펼친다. 특히 두 남녀 주인공은 물론이고 더블캐스팅 된 남자다(多) 역의 신승용이 쉴 새 없이 유머러스하고 능청스런 연기를 펼쳐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장면 곳곳에서 웃음을 끌어냈다. 암전 없이 오버랩으로 장면이 40번 넘게 바뀌는데도 부자연스럽지가 않을 정도로 무대전환에도 공을 많이 들인 것이 표가 난다.

    마침 극장을 찾은 날은 태풍 볼라벤이 전국을 강타한다고 예고된 날이어서 그런지, 20여명에 불과한 관객들이 VIP좌석을 중심으로 옹기종기 몰려 앉아 편안하고 쾌적한 관극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객석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 극장구조는 관극하는데 문제가 될 듯 싶었다. 120분의 공연이 끝나고 멋진 무대를 보여준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막이 내린 후에도 관객들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던 것은 극장 밖에 쏟아지고 있는 비바람 탓만은 아닐 것이다. 한참동안 여운이 남는 무대였다. 그나저나 20년 전에 대학로극장에서 연극을 함께 보았던 그녀가 누구였는지가 도대체 기억이 안나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혹시 불을 끄고 생각하면 생각이 나려나?


    [사진출처] 극단 완자무늬

태그 불 좀 꺼주세요, 강영걸, 이만희, 극단완자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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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

박일호 경제단체 근무
대학 때 잠시 연극반 활동을 했다. 그 인연으로 지금도 가끔 대학로를 찾는다. 낭송하는 독서모임 ‘북코러스’에 참여하고 있고, 서평 쓰는 블로그(blog.naver.com/ik15)를 운영하고 있다.
서평 외에 영화평이나 연극평도 쓰고 싶은 욕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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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7호   2012-09-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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