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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극장이 주도한 변화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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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지난 10월, 영국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의 프로듀서 루시 데이비스(Lucy Davis)와 한국공연예술 자치규약(KTS) 워킹그룹의 배우 겸 연출가 박영희가 나눈 대담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연극in의 이슈 코너를 통해 본 대담의 내용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 편집부
루시
오늘 대화에 비키(Vicky Featherstone, 로열 코트 극장 예술감독)가 참석하지 못했다. 한국 연극계에서 당신과 함께 분투하는 모든 동료에게 비키의 연대와 지지를 전한다.
영희
이메일로 소개한 바와 같이 지난 8월 KTS 워킹그룹의 동료들과 한국의 공공극장 및 문화예술 공공기관의 자치규약과 행동강령을 살펴보다가, 한국연극협회가 지난해 홈페이지에 공유한 로열 코트 극장의 행동강령(번역, 번안, 수정한)을 접했다. 한국 현실에 맞게 수정한 내용이라고는 하나, 몇 가지 항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상당했다. 결국 우리는 영어 원문의 로열 코트 행동강령과 규정 전체를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로열 코트와 같이 영국 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공공극장에서 어떻게 이렇듯 단순하고, 명료하고, 즉각적으로 실천 가능한 행동강령과 규정들을 먼저 선언하고 공연예술계의 변화를 ‘주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 주목했다. 민간영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변화에 더디고 수동적인 한국의 공공극장과 기관들을 떠올릴 때 로열 코트의 사례는 우리에게 강한 영감과 질문을 던졌다. 처음 Policy를 발표했을 당시 영국 공연계 반응은 어떠했는가?
루시
어떤 이들은 우리의 행동강령 발표에 다소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고, 흔들리지 않는 조직(로열 코트 극장)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와 비키는 대부분 프리랜서 지위인 한국의 예술가들이 겪고 있을 어려움에 깊이 공감한다. 변화를 꾀하는 일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영희
지난해는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이제는 쉬이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것만으로 감사하다.
사진출처: royalcourttheatre.com ⓒHelenMurray
루시
사실 로열 코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을 한 것이다. 영국은 이미 문화예본문1사진출처: royalcourttheatre.com ⓒHelenMurray술계를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시스템 즉, 예술인 노동조합(Union), Equity for Actors, Technical Crews, directors and Creative Unions 등과 같은 조직이 뒤를 받치고 있다. 조합들은 큰 힘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매우 중요한 ‘동맹’들이다. 더하여 강력한 협력 기관인 소사이어티 오브 런던 극장(Society of London Theatre)이나 UK 극장(UK Theatre) 등은 우리의 일에 매우 협조적이며 적극적이었다. 올드 빅(The Old Vic Theatre)과 같은 극장은 기존의 행동강령 모델을 극장 운영진, 스태프들과 함께 공유하고, 더는 현 시대에 유효하지 않은 부분들에 열린 논의를 거쳐 일종의 HR(Human Resource:인사부) 수준의 부드러운 개혁을 꾀했다. 나는 이 모든 기관, 극장들과 협업하여 정말이지 열심히 일했다. 나는 로열 코트의 수석 프로듀서뿐 아니라, 런던 내 40개 극장 프로듀서 협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우리 협회원들 전원은 로열 코트 극장의 행동강령을 준수할 것에 모두 서명하였다. 이러한 업계의 반응은 우리가 가진 ‘재생력’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당신과 한국 예술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가늠할 수 있다. 영국과는 반대로 공공기관들로부터의 변화가 미미하다는 점은 예술가들을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위치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영희
로열 코트 극장의 행동강령과 규정의 실제 글쓰기 작업은 누가 주도하였나?
루시
이 모든 것은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할리우드의 미투 뉴스를 접하고 시작되었다. 비키는 미투는 할리우드와 같은 영화 산업만의 문제가 아닌 공연계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트윗을 올렸고 곧바로 반응이 왔다. 비키는 당시 국외에 있던 나에게 전화하여 열흘 뒤 '행동의 날 A day of action'을 열자고 제안했다. 나는 즉시 동의하였다. 비키는 트위터로 공연계의 성희롱, 성폭력 사례를 별도의 이메일 계정을 개설하여 접수받겠다는 공개 글을 띄웠고, 그날부터 정말 많은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에는 나와 비키 그리고 다른 여성동료까지 총 3명이 접근권을 갖고 접수 상황을 공유하고 사연을 익명화 하였다. 우리는 ‘행동의 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로열 코트만의 행동 코드와 규정을 만들기로 하고 이를 위해 총 네 차례의 워크숍을 가졌다. 이 중 3회 차는 나와 비키가 ‘괜찮은 행위’와 ‘괜찮지 않은 행위’들을 분류해 기록하였다. 워크숍 4회 차에는 극장 직원들과 내용을 공유하고 그들의 의견과 제안을 구했다. 극장 내 여러 여성 동료들과 우리는 직원들이 제출한 의견과 제언 내용을 모아 검토, 정리하여 최종 수정하고 다듬는 작업을 거쳐 행동의 날이 있은 뒤 닷새가 지난 수요일에 전문을 공개 하였다. 주도적인 글쓰기는 나와 비키가 하였다고는 하나, 여러 여성 동료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 이었다. 다시한번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영희
‘행동의 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루시
비키가 트윗을 올린 지 열흘째 되는 날, 155통의 이메일 가운데 영화나 방송 등 공연계 밖에서 일어난 사례를 제외한 총 126개 사연을 추렸다. 이 사연들을 완전히 익명화한 다음, 로열 코트 극장에서 약 5시간에 걸쳐 돌아가며 낭독하는 <행동의 날>을 열었다. 모든 이를 위해 무료로 진행되었으며, 관객들은 자유로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극장에 머물며 낭독을 듣고 돌아갔다. 사연들을 분석하니 몇 가지 패턴이 드러났다. 가령 50% 이상의 부적절한 행위가 연습실에서 일어난 점,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일어난 점 등이다. 명백한 범죄 행위인 성희롱, 성폭력 사례도 있었지만, 타인을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드는 일상의 부적절한 행위들에 대한 사례가 상당했다. 우리는 바로 다음 주 금요일 로열코트 행동코드를 발표했는데 이는 우리의 제안이지 강제안이 아니었다. 우리의 관심사는 역사 속 가해자를 끝까지 추적하고, 망신 주고 커리어를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인식의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었다. 꽤 많은 수의 남성 예술가들이 사례 낭독을 들은 뒤 이 모든 것이 심각한 시스템의 문제이며, 낮은 권력 관계에서부터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우리의 이러한 조치와 행동은 결국 업계의 인식을 높이는 ‘훈련’의 기회를 만들었다. 예술학도와 갓 대학을 졸업하고 커리어를 시작하는 20대부터 명망 있는 연출가와 배우, 피디 등 공연예술계의 모든 이가 이러한 문제를 인지하게 만든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우리는 로열코트 극장이 이러한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영희
실제 글쓰기가 그토록 빠른 시간 안에 진행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루시
우리의 최종 목적은 예술가들이 작업하기 안전하고 평등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비키는 행동코드의 핵심이 매우 단순하고 명료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번은 이런 행동을 하지 말 것, 2번 이런 행동을 경험하는 즉시 말하고 알릴 것이었다. 코드에서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이며 이것이 코드의 핵심이다. 사실 1번이 제대로 준수된다면, 2번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프리랜서든, 단체든 로열 코트에서 작업하는 예술가들은 이 규정들을 통하여, 로열 코트가 지향하는 창작 문화를 직접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로열 코트뿐 아니라 수많은 기관과 극장들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이다. 나에게 로열 코트 행동강령과 규정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메시지라도 봐도 좋을 것 같다. 로열 코트와 작업하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메시지 말이다.
영희
로열 코트 내부로부터 구체적인 변화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루시
가령, 로열 코트 행동강령을 발표한 이후 비키는 작품 연출하는 과정에서 성폭력 장면을 연출하는데 커다란 부담을 느꼈다고 했다. 우리의 행동강령은 그녀가 기존의 연출 방식을 완전히 바꾸도록 했다. 물론 비키는 연출가로서 도전을 피하지 않을 사람이다. 우리는 연극이 관객을 자극하는데 지나친 예민함을 경계한다. 연극은 진정으로 두려움이 없어야 하지 않나. 다만, 우리의 도전은 작품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안전하다’ 느끼는 가운데 과감하며 관객을 자극하고, 동시에 창작자와 관객 모두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핵심이고 전부이다. 창작의 자유를 가로막는 도에 지나친 예민함과 조심스러움은 로열 코트의 지향점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의 목표는 극장에서, 창작 과정에서 성적 학대와 폭력, 차별을 멈추는 데 있다. 나보다 힘이 센 사람에게 ‘그런 것은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편안하고 평등하고 창의적인 환경과 문화를 만드는 일 말이다.
영희
지난 1년 반 동안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내가 만났던 사람들 모두 공통으로 한 말이 ‘창작환경이 안전할 때 예술가는 더 높이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루시
정확하고 완벽한 표현이다. 안전한 환경은 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들게 한다. 행동강령은 창작의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접근방식을 제시하고, 새로운 연극적 미학을 실험을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예술창작의 기풍(Ethos)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영희
행동강령과 규정을 적용하기 위한 별도의 실행계획이 존재하는가?
루시
음...강령이 실행계획 자체가 아닐까. 일단 로열 코트의 연습실, 복도 곳곳 눈에 잘 띄는 곳에 행동강령이 부착되어있다. 로열 코트에 작업을 하러 온 극단이 도착하면 비키를 비롯한 로열 코트 스태프들이 함께 첫 미팅에서 행동강령을 설명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가진다. 로열 코트의 모든 계약서에는 행동강령이 반드시 첨부된다. 즉, 로열 코트와 계약한 모든 이는 로열 코트의 행동강령을 준수하겠다고 서명한 것이다. 우리가 이 행동강령을 공표한 이후 단 한 건의 ‘문제적 사건’도 보고되거나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단 한 건도 없다. 행동강령과 규정들은 작동되고 있다. 사람들은 행동강령의 존재 의미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페미니스트라고 비난하던 중견 남성예술가들은 이제 입을 다문다.(웃음) 분명한 건 폭력적이고 위력 행사를 즐기던 사람들은 행동강령 공표 이후 로열 코트 극장에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매우 진보적이고, 자유에 대해 관대하며, 상당히 급진적이지만, 동시에 공연예술계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는 로열 코트가 그런 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확고한 한국 문화 안에서 이러한 대화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영희
이따금 절대로 깨지지 않을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루시
세대를 거슬러 문화를 바꾸는 일은 당연히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미 지금 한국에서 당신과 동료들이 하는 일은 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영희
로열 코트의 사례는 끊임없는 혁신과 변화를 요구받고 있는 한국의 공공기관과 협회, 공공극장들에 좋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혹시 내년 한국의 여성의 날 주간에 한국 방문을 고려해 볼 수 있겠는가?
루시
변화를 만들기 위해 당신들이 매일 마주하는 장애물이 무엇일지 짐작이 간다. 공공이 변하면 변화의 속도는 훨씬 빨라진다. 분명한 것은 지금 당신들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연락해 달라. 가능할 것 같다. 내년도 한국행에 대하여 앞으로 계속 논의를 이어가 보자.
#한국연극협회

공연제작현장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및 예술가 권력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행동지침
http://ktheater.bravod.co.kr/notice_view.html?pid=2783&page=&search_type=&search_txt=
#영국 로열 코트

A CODE OF BEHAVIOUR
Preventing Sexual Harassment and Abuses of Power
(An offering, a provocation, a hope for CULTURE CHANGE)
https://royalcourttheatre.com/code-of-behaviour/

Bullying, Harassment and Unwanted Sexual Attention Policy
https://royalcourttheatre.com/bullying-harassment-unwanted-sexual-attention-policy/

태그 박영희,영국로열코드극장,행동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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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박영희
극단 민들레 창단 공연으로 배우 데뷔한 후, 극단 목화에서 20대를 보냈고, 라트 어린이극장 예술감독과의 만남으로 독립예술가로서 영역을 넓혀갔다. 지난 10년 간 주로 호주와 한국에서 배우와 창작자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극단 잼박스와 한호공동창작집단 컴퍼니배드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본업인 연기는 주로 해외에서, 한국에서는 연출과 극작을 주로 하면서 한국 공연예술 자치규약(약칭 KTS) 작업에 착수하여 건강하고 안전한 공연예술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분투 중이다.
제173호   2019-12-05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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