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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 사랑의 소멸 불가능성에 대하여
밤으로의 긴 여로

백수진 _ 입시준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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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과거를 같이 공유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상처가 될 때가 있다. 너무 끔찍해 지우고 싶은 과거의 기억이 상대방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생생하게 재생되고 있다는 비밀. 그것만큼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그래서 때때로 가족은 서로에게 가장 큰 짐, 치명적인 독이다.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고 어떤 것도 쉽게 지울 수 없으므로.

  • 메리가 마약을 다시 시작했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큰아들 제이미다. 제이미는 이 사실을 토씨 하나 숨기지 않고 동생 에드먼드에게 말한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끝까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남편 제임스는 누구보다도 그녀를 믿었지만 차츰 메리의 행동과 눈빛을 보면서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다. 메리는 요양원에서 약물 치료를 받고 퇴원한 지 겨우 2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모두들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희망을 품었다. 메리도 영원히 마약을 끊고, 남편과 두 아들도 각자 새로운 삶을 꾸려나갈 벅찬 삶의 희망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되질 않는다. 절박해진 에드먼드는 그래도 아직 희망은 남아 있는 거 아니냐며 형과 아버지에게 간절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제이미와 제임스. 과거가 서로의 가슴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한,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 폭풍처럼 닥쳐오는 순간이다. 때문에 메리를 믿었던 세 남자는 그녀에게 원망과 증오의 한을 품는다. 한편, 병원에서는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에드먼드가 폐병이란다. 이번에는 메리가 이것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죽음의 공포가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메리는 세 남자가 에드먼드의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시내로 나간 사이 하녀 캐슬린을 데리고 약국에 다녀온다. 가족들 몰래 모르핀을 구입하기 위해서.
    이들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어떻게든 자신의 불행을 비껴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을 옭아매는 고통의 그물은 각자가 자율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의 운명이 이들을 자꾸만 단단히 묶어두기 때문이다. 티론 가의 사람들은 '집다운 집'을 꿈꾼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애정이 넘치는 가족적인 공간을 원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허름하고 캄캄한 여름 별장, 이 곳 하나뿐이다. 안개 속을 헤매는 사람들. 그들은 절망적인 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안개, 마약, 술로 대변되는 환상을 갈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결국 모두들 별장으로 다시 돌아온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게 빠져들게 되는 이 역설의 논리야말로 바로 이들, 가족 공동체의 본질인 것이다.
공연 포스터
  • 이들은 메리의 마약 중독을 두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두 아들은 메리에게 싸구려 돌팔이 의사를 대주었던 제임스를 비난한다. 그러나 질투에 눈이 멀어 동생을 죽게 한 제이미나, 출생 자체부터 메리에게 고통을 안겨준 에드먼드는 물론, 가족들 몰래 다시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메리 역시 가중한 책임을 면치 못한다.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해체하고 도려내며 끝없이 분열한다. 공동의 책임은 결국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것이 된다. 모든 것이 풀리지 않는 저주요, 받아들여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깊은 절망의 동굴에서 끝내 제 빛을 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의 감정이니, 이 사랑의 소멸 불가능성이 그들을 아주 미치게 만든다. 그들은 서로를,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존재론적 인식이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고 감정을 뒤틀리게 한다. 증오와 한을 뚫고 나오는 이런 사랑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피를 토하게 하고, 영혼을 난도질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많은 말들, 그 모든 비난과 공격의 말들 안에서 상대방의 진심을 발견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사랑이 일방적인 것이 아님을 상대방의 눈빛을 통해 확인해야 하고, 서로에게 매달려야만 한다. 진실한 사랑을 끝까지 어떻게든 지켜내기 위해서, 이 사랑의 감정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얼마나 비참하고 아름다운 사랑인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감정이란, 각자의 씻을 수 없는 고통인 동시에 그 반대로 어둠을 밝히는 작은 불씨가 되기도 한다. 떠나온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안개 사람들. 이들에게 사랑은 깊은 절망에 잠식당하지 않고 온갖 침묵을 견뎌낼 유일한 희망이자 존재 이유인 것이다. 결국 어둠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현실과 (어쩔 수 없이) 화해해야 한다. 이것이 유진 오닐이 죽기 전 내린 존재론적 고뇌의 결론이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서 소리 없이 타들어가는 촛불의 작은 흔들림이, 운명적으로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유진 오닐이 그제야 비로소 건네는 연민과 화해의 손길이라고 생각한다. 촛불이 스러져갈 때 즈음이면 서서히 동이 터올 것이다. 이 어둠이 끝나면, 어쩌면 이들에게도 밝은 아침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이 말이 떠올랐다.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어떤 응어리들이 기억을 부르고 감정을 내리누르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묻고 싶다. 과연 가족이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고백컨대,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상처가 될 줄 알면서도 상대방의 진심을 발견하기 위해 독설을 퍼붓고, 단단하게 가로막힌 안개 벽을 뚫고자 무진장 애를 쓰던 아뜩한 시절. 가족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아무리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결국에 남는 것은 사랑이더라. 그러니 끊어낼 수 없다면 용서하라.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해주자. 가족 공동체의 본질, 우리들의 본질은 영원한 너와 나의 사랑이므로.

    [사진제공] 국립극단

 

태그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쿠리야마 타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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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진

배수진 입시준비생
연극 연출가와 비극 작가를 꿈꾸는 '일단은' 연극 초짜. 연극이 너무 좋아요!
이메일 minjunsooj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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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13호   2012-12-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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