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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수밖에 없고, 묻을 수밖에 없는
<사랑을 묻다>

백요선_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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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에 지친 중년 남자 명호에게, 모든 게 거기서 거기 같은 잿빛에 갇힌 그에게 고유의 빛을 발하는 여대생 희연이 찾아든다. 아니, 엄밀히 따지자면 하나의 질문이 다가온다. 허울뿐인 겸임 교수로 강단에 서는 강사 명호와 생기발랄하고 도발적인 여대생 희연의 첫 만남은 그렇게 질문으로 시작된다.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고백과 이해가 필요하다는 배우론을 떠드는 명호에게 희연은 교수님부터 고백해보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명호는 말한다. “난 네가 싫어.” 하지만 희연은 그건 모두가 아는 팩트fact이지 진실이 아니지 않느냐는 질문을 또 한 번 던진다. 이번엔 답한다. 진실이다. “난 내가 싫어.” 명호는 모멸감을 느끼며 이 자리에 서있는 지금이, 간신히 몸뚱아리만 건사하는 일상이 싫다. 그는 일상을 바꿀 수 있는 탈출구는 사랑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갈망한다. 20대 때의 열정을 되새기며 연극도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다.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생기발랄한 희연도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았던 경험이 있다. 그녀는 아직도 자기를 대신해 자신의 발이 되어준 아빠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이 명호에게 끌리는 이유 역시 명호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명호에게서 보이는 아빠에 대한 환영 때문이라고까지 한다. 당당했던 그녀의 발걸음이 멈칫거리는 순간이다.

    연극은 이렇게 상반되는 두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극의 제목을 보면 좀 더 이해가 쉽다. 묻는다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질문하다의 뜻을 가진 ‘묻는다’와 파묻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묻는다’. 언뜻 보기에 상반되어 보이는 저 두 의미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함께 묶일 수 있게 된다.

  • 사랑을 묻다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질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를 좋아할까? 왜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을까? 어떤 사람을 좋아하려나? 나는 어떤 사람이지? 상대방에 대한 궁금증과 그를 향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시 나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사랑이 대단한 이유는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그냥 좋고 들뜨고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바뀌고 꽃이 자라나는 모습에 들떠하면서도 희연은 자신이 꽃을 보는 게 아니라고, 꽃이 피어나는 광경을 자신은 볼 수도 없고 봐서도 안 된다고도 한다. 그녀는 그저 자기가 그것들을 ‘발견’할 뿐이라고 한다. 명호 역시 그녀에게 무얼 보냐고 ‘질문’한 덕에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아니 실은 무수히 봤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꽃을 이제야 ‘발견’하게 되고, 들뜬 걸음으로 당당하게 걷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은 파묻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명호와 희연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은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이며 콩깍지가 쓰이는 게 아니라 ‘나를 덮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과 먹고 사는 문제, 주변의 시선과 평판은 그리 쉽게 벗어던져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을 파묻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전자의 ‘묻는다’가 가진 의미이다. 질문하게 하는 힘은 지리멸렬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이전에는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들을 회의하게 하기 때문이다. 명호는 사랑이 무엇인지 묻고,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이 누구인지 묻는다. 자기가 하고 있는 연기가 무엇인지 묻고, 그렇다면 연기와 연극은 백퍼센트 가짜인지 묻는다. 희연 역시 자신이 하는 이야기가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인지 묻고,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이 대체 누구인지 묻는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자신의 기억 속의 아버지가 실제로 죽었는지도 이제는 의문이라고까지 한다.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게 하는 사랑!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이 휘발되고 남은 자리는 허망하다. 지리멸렬한 일상만 공유하는 명호와 명호의 와이프도 한때는 짜릿한 사랑을 했었다는 사실이, 죽어가는 명호의 누이도 바람난 남편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했지만 분명히 그녀에게도 반짝이는 한때가 있었음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허망하다고 해서 그 감정 역시 퇴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극이 사랑을 가슴에 ‘묻는’ 명호의 모습으로 끝났다 해도 내가 이 연극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묻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물을 수밖에 없기도 한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셰익스피어의 말을 빌려 연극의 시작을 알렸던 게 흥미로웠다. ‘막이 내릴 때까지 연극은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막이 등장하지 않았던 공연을 더욱더 의미심장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연극의 막은 끝까지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아직도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질문은 계속될 것이기에.



    [사진출처 : 극단 이루, 선돌극장]

태그 사랑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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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요선

백요선 대학생
연극을 좋아하는,
엄밀히 말하자면 연극적인 순간을 꿈꾸는 22살 여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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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5호   2013-06-05   덧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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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0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