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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같은 무대, 희극 같은 인생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박일호_ 서평가, 생활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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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교 때 전공은 무역학이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연극반에서 한 탓인지 경상대학 보다는 문과대학 벤치에서 어슬렁거렸던 기억이 더 많다. 자연히 아담 스미스나 케인즈 보다는 셰익스피어나 안톤 체호프 또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책을 더 많이 끼고 다녔다. 당시에도 체호프 희곡은 여기저기서 꾸준히 무대에 올라갔고, 문과대 학생들이 1년에 한번 씩 공연하는 원어연극의 단골 작품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히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기론 같은 책들은 도통 어려워서 분명 끼고만 다녔지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는 왠지 찔리는 게 사실이다.

    체호프의 희곡을 읽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독자의 상상력이 까다로운 도전을 만나기 때문이다. 체호프는 의사였다. 의사 특유의 초연함과 인간 마음에 대한 진실 탐구라는 목적에서 비롯한 그의 글쓰기는 어느 한 인물에 치우친 이야기가 아닌 각각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성 있는 캐릭터를 갖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이 참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리얼리티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연극 속에서 표현했다. <바냐 아저씨> <세 자매> <벚꽃 동산> 등 무대에 오르는 그의 작품들을 봐도 배우들이 소화해 내야 하는 엄청난 대사의 양에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대화들은 등장인물들의 내면 깊숙이 감추어진 모순, 혼란, 좌절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6월 마지막 주,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벚꽃 동산>을 원작으로 한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라는 다소 긴 제목의 연극을 보았다. 배경은 20세기 초 러시아로 1861년 농노제의 폐지 이후부터 시작된 변혁의 기운이 기존의 질서 체계를 뒤흔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마저 변화시키던 시대다.

4막으로 구성된 표면적인 사건은 벚꽃동산을 추억하며 지키려는 사람들과 현실을 직시해 동산을 ‘돈’의 가치로 보는 자의 대립이다. 대대로 내려오던 영지와 벚꽃동산을 방탕과 낭비로 인해 팔 수 밖에 없게 된 소지주 집안의 몰락과 그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단순한 과정을 보여준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물들 간의 섬세한 감정을 통해 현실의 한계에 직면한 인간군상의 다양한 면을 조명한다.

이들의 몰락과 상실을 지켜보는 관객의 시선은 분노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깝다. 자신의 지병인 폐막염의 진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체호프는 <벚꽃동산>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을 예견하면서 완성한 이 작품에 ‘4막의 코미디’라는 부제를 달았다. 몰락한 인간이 하롱하롱 떨어지는 벚꽃을 바라보며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지난 시절을 추억하는 일을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개운하지가 않다. 그러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내일 떠오를 태양이 오늘 지는 저 태양이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인간은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노래하는 것은 아닐까.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벌어지는 한 가문의 몰락사

연극에 등장하는 출연진 16명은 모두 창작공동체 아르케의 배우들이다. 역사가 짧은 극단에서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연극을 외부 배우 없이 소화한다는 것부터 놀라운 일이다. 특히 이들의 앙상블이 돋보이는 부분은 두 번의 합창 장면이다. 1년 전부터 매주 합창 공부를 해왔다는 배우들이 피아니스트의 연주에 안무를 곁들여 가며 부르는 노래는 자칫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 110분의 공연시간을 훌륭하게 끌고 가며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연극을 보기 전에 원작인 <벚꽃 동산>을 다시 찾아 읽었다. 거의 30년 만이다. 놀라운 것은 연극의 시대적 배경이 20세기 초 러시아이지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충분히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기존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혹시나 벚꽃동산을 잃은 상실감에 젖어 좌절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상실과 몰락은 그것대로 담담히 받아들이고 서로 위로하며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지. 인생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여전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극장 문을 나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할 수 없이 비를 피해 뛰었다. 분명한 건 오늘도 일기예보가 틀렸다는 것인데, 이건 비극인지 희극인지?



[사진출처] 창작공동체 아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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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

박일호 북칼럼니스트
출판서평전문잡지<기획회의>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으며, 읽고 쓰고 걷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 서울에서는 주로 북촌, 남산, 대학로에 있을 때가 많다.
blog.naver.com/ik15(구름을벗어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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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27호   2013-07-04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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