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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나의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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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원고는 본지 53호 [색깔있는 리뷰] “그것은 너의 연극, 극단 코끼리만보 <먼 데서 오는 여자>(글_정진세)”의 메타 리뷰임을 밝힙니다.

진심으로, 나의 연극

나는 학생, 나는 딸, 나는 여자, 그리고 나는 관객. 극장의 주인. 내가 편안하게 자리를 잡은 후에야 공연은 시작하지. 극장의 유령, 나는 너를 닮아가고, 너는 나를 흉내 내지. 만나서 반가워.

기다린 건 여자니까. 나무에 홀로 붙들린 채 누구라도 기다려야 했으니까. 식어가는 군인의 그림자를 흘낏거리며 엄마를 기다렸으니까. 기다린다는 건 도대체가 움직일 수가 없는 거니까. 시간을 씹고 또 씹으며 그저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기억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아뒀던 거야. 기다림이 끝나면 할 말이 그렇게 많은 거야. 벌써 모아놨던 저 멀리 어딘가에서부터 차곡차곡 다시 밟아 오는 거야. 그래서 훨씬 먼 데서 올 수밖에 없는 거야.
회사 간 엄마가 돌아올 그 시간을 향해 내 입속의 말들과 기억은 몇 번이고 다시 줄을 섰었어. 멀리 있는 남자친구에게 얼른 건네리라 마음먹었던 발견과 기쁨, 또는 슬픔의 파편들은 설렘이었다가 무심해졌다가 나중엔 원망이 되고 말았지. 나는 바로 그 기다림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여자에게서 보았던 거야. 여자는 남자가 들어줄 그 노래를 수백 번 혼자 되씹었던 거야.

나는 그 노래를 몰라. 베트남이나 사우디, 독일로 먼 여행을 떠났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기록한 사실, 가난한 국가가 휘두른 폭력에 앞서 희생된 사람들의 투쟁 또한 단지 지나간 한 시대의 표상처럼 여겨졌지. 다만, 나는 기다림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었어. 그 기다림이 어디서 비롯되었든 간에.
하지만 연극은 나를 그저 감상에 빠져들도록 두지 않았어. 결국, 내가 피부로 실감할 시대로까지 말을 이어갔지. 그래, 네가 지적했듯이 나는 예감했는지도 몰라. 잔인하지. 그 노부부에게 더 이어질 슬픔이 있을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다니 말이야. 2003년, 그때 나는 고1. 이미 너무나 수험생이었지.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었어. 한 글자 더 할 수도 뺄 수도 없었던 그 마지막 문자 메시지들을. 그래서 나는 다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진심으로, 나의 연극

극장은 나에게 회피해버린 세상을 다시 환기하고 빨간 피가 돌게 하는 곳이야. 나는 연극을 보면서 세상을 만나지. 매일, 여기 이 동네에서 바다 넘어 어딘 가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양의 이야기들 사이에서 나는 세상도 사람도 아닌, 속도와 숫자를 봐. 찰나의 감동과 충격은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오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보다 중요한 상념 거리는 없는 자가마취상태가 되지. 극장은 그렇게 나도 모르게(또는 의도적으로 또는 외압에 의해) 외면해버린 것들의 얼굴을 다시 그리고, 내 생각과 감각에 자극을 가하지. 잊고 싶었는데. 사실은 정말 잊고 싶었던 이야기를 기억나게 하기도 하지.

그래, 나는 네가 말한 ‘죄의식, 불편함, 미안함이 범벅된 표정’으로 공연을 바라봐야 했어. 슬퍼하는 것조차 통제당해야 했던 부부의 10년, 몸서리쳐질 만큼 차가운 사람들의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분노와 함께 죄책감을 느꼈어. 여전히 동일한 사건과 동일한 부조리가 버젓이 반복되는 바로 지금의 이야기이기에, 나의 무력함 또한 그때와 다름없기에.

진심으로, 나의 연극

고백할게. 나는 그날, 극장의 열린 문으로 보이는 바깥의 세상으로 ‘결연한 얼굴’을 들이밀며 나가지 못했어. 달아나라는 남자의 말이 귓가를 자꾸 맴돌았어. 나는 정말로 달아나고 싶었어. ‘국가의 오만’과 ‘인간의 야만’에 베인 뚜렷한 상흔을 마주하고, 나는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고 있는 듯했지만 사실 도저히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무력감에 떨고 있었던 거야. 흐르는 눈물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냥 울어버리고 만 것이기도 했지. 나는 저 멀리 나의 친구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어. 여기로 돌아올 생각 말고 다른 곳으로 달아나라고.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팔이 끊어져라 무겁게 맥주를 사 들었어. 나는 그날 밤 다시 잊고 싶었던 거야. 정말 달아났던 거야.

네가 듣고 싶었던 나의 감상이란 뭐였을까? 여전히 먼 데서 오고 있는 이 연극은 언제쯤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달아날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멈춰 서서 그 기억의 본질을 마주할 수 있을까.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먼 데서 오는 여자 포스터

일시
9월 12~28일
장소
게릴라 극장
배삼식
연출
김동현
출연
이대규, 이연규

태그 먼 데서 오는 여자,극단 코끼리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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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영

유혜영
뮤지컬 공연장에서 일하다가,
음악보다는 이야기가 더 좋아 올해부터 연극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원에서 연극학을 전공하고 있다.
yoohy_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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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호   2014-10-1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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