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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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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9월의 마지막 일요일 오후, 대학로 게릴라극장을 찾았다. 연극 <먼 데서 오는 여자>를 보기 위해서다. 추분도 지났으니 절기상으로는 가을이 맞다. 그러나 올 봄에 일어난 엄청난 일이 아직 제대로 진정되지 못해서인지 한낮으로는 아직도 화火 기운이 성한 것이 가을이 좀처럼 머리를 내밀지 못하는 듯하다. 마지막 공연이라 그런지 극장 밖에는 미처 예매를 하지 못해 대기표를 구하기 위한 줄이 제법 길었다. 우리 일행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다행히 보조석을 구해 연극을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에 빛나는 이연규와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이대연 두 명품 배우의 2인극으로 꾸며진 작품이다. 단출하면서도 정갈한 무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공원벤치, 빨간 단풍이 든 나무 한 그루, 가로등, 그리고 휠체어와 연결된 자전거. 남녀 노인 두 명이 정물 속 그림처럼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무심하게 나눈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인 듯 하지만 가만히 듣다보면 자신들의 이야기이다.

여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계속 생각에 잠겨있다. 옆에 있는 남자에게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를 건넨다. 남자는 오래 전 중동으로 일하러 떠났던 그녀의 남편이다. 그러나 여자는 치매 때문인지 과거의 일을 제대로 기억 하지 못한다. 남편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가여워하며 아내의 기억이 돌아오게 하려고 무던히 애쓴다.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려고 애쓰지만 조각난 기억들이 드문드문 이어질 뿐이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삶이 그러하듯이 기억도 변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망각이 좋을 때가 있다. 삶의 지문에 따라 어떤 기억은 차라리 잊혀지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어릴 적 보육원에 남기고 온 남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에서 일어난 방화사고가 그렇다. 이날 사고로 192명이 죽고 14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부부는 늦게 낳아 애지중지 키우던 딸을 이날 사고로 잃고 말았다. <먼 데서 오는 여자>는 고통을 잊기 위해 또는 한웅큼의 평안을 얻기 위해 망각의 심연으로 빠진 한 여인과 그 여자를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 노부부가 살아 온 수많은 기억들의 파편은 어쩐지 우리가 살아 온 삶의 그림자와 너무도 비슷하게 겹쳐진다. 아니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ㅅ’으로 시작하는 그 어떤 대사도 없고 팜플릿에서도 그에 대한 단 한 줄도 발견할 수 없지만 연극을 지켜 본 사람들은 안다. 그것이 지난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일어난 끔직한 사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라는 것을 말이다.

“당신은 기억 못하는 게 아니라, 잊지 못하는 건지도 몰라. 당신은 잊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아픈 거야.”

그렇다. 연극은 우리에게 기억을 너무 먼 데로 보내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면 돌아오기 힘들다고, 되돌리기 어려워진다고. 관록 있는 두 배우가 만들어 내는 기억과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관객들은 순간 먹먹해진다. 비록 두 명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나지막하지만 힘찬 연기의 앙상블이 무대를 꽉 채운다. 한 순간도 무대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게 한다. 마지막 무대이기도 했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가을 단풍보다 손이 먼저 붉게 물들었다.

* 제목은 장석남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에서 따옴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먼 데서 오는 여자 포스터

일시
9월 12~28일
장소
게릴라 극장
배삼식
연출
김동현
출연
이대규, 이연규

태그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먼 데서 오는 여자,박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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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

박일호 북칼럼니스트
출판서평전문잡지<기획회의>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으며, 읽고 쓰고 걷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쓰고 있다. 서울에서는 주로 북촌, 남산, 대학로에 있을 때가 많다.
blog.naver.com/ik15(구름을벗어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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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호   2014-11-06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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