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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 이바노프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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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씨어터 <잉여인간 이바노프>

손창섭이 1958년에 쓴 <잉여인간>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잉여인간이라는 단어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좌절을 상징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것들을 포기하는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잉여인간’들에서는 서글픈 ‘보편’을 보았다. 여기에 더해 ‘확장된 보편’으로서 연극 <잉여인간 이바노프>를 통해, 120년 전 러시아에도 사회적으로 필요 없게 된 잉여인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안톤 체홉 전용관인 아트씨어터 문에서 [숨겨진 4대 장막전]이라는 주제로 공연되었는데, 특히 체호프가 27세 때 열흘 만에 쓴 초기작이라고 한다. 스토리의 전개는 막장 드라마처럼 보일 수 있지만, 흡인력 있는 캐릭터들의 열전과 배우들의 열연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었다.

또한 잉여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잉여라는 말 자체가 ‘쓸모 있음/쓸모없음’으로 사람을 재단한다는 것이며 그 쓸모는 대체로 사회가 원만하게 유지되기 위한 동력으로서 열심히 노동하고,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을 뜻한다. 이바노프는 놀라울 정도로 이 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서른다섯에 이미 권태와 무기력, 우울함에 침잠된 것이다. 반대로 이바노프를 제외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한다. 폐결핵에 걸린 아내 안나와 친구의 딸인 사샤는 끊임없이 사랑을 요구한다. 친척 보르낀은 사기에 가까운 사업을 추천하고, 사샤의 엄마인 지나이다는 빚을 갚을 것을 독촉한다. 이바노프를 질타하는 의사 을보프와 이바노프를 도우려는 친구 레베제프조차 이바노프를 아내를 위한 남편이나, 열정을 가졌던 젊은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 애쓴다. 이바노프가 거부할수록 그 강도는 더욱 커져 이바노프의 ‘잉여’스러운 면이 더 두드러졌다.

애플씨어터 <잉여인간 이바노프>

이의 연장선에서 연극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바노프의 원인 없는 우울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위에 가까운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늘 피로에 찌든 모습이 정신병원을 연상할 정도로 흰 무대와 어울렸다. 그러나 극에 몰입하면서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바노프의 절실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바노프는 처절할 정도로 자신의 무기력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바노프가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은 수치였다. 반대로, 다른 인물들은 수치가 없으므로 이바노프는 더욱 허공 같은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참금, 결혼 사업, 도박, 소문이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바노프에 대해 소문을 퍼뜨리거나, 아니면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려 한다. 이것은 양쪽 다 이바노프에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해결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를 괴롭게 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바노프가 어떤 행동을 해도 ‘자신이 생각한 이바노프’를 기준으로 두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내면의 심연은 이바노프 스스로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바노프는 자신을 증오하는 의사에게 말한다. “우리에겐 너무도 많은 볼트와 너트, 밸브, 바퀴와 부속이 있어서 첫 인상이나 몇 가지 외적인 행동만 가지고 판단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바노프라는 상을 멋대로 만들어내며, 이바노프는 ‘자신을 내버려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그것이 그를 파국으로 몰아갔던 것 같다. 이 작품의 원제는 ‘WHO Killed IVANOV?(누가 이바노프를 죽게 만들었는가?)’이다. 원제에서 느껴지듯이,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우울은 실체가 없는 적이다. 그렇기에 의사는 이바노프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 치료하는 것이다. 반면 자기 자신도 모르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끊임없이 의식했던 이바노프는 모른다, 귀찮다, 피곤하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그 누구보다 치열했을지도 모른다. ‘저항 없는 저항’을 하면서 말이다. 마지막에는 이바노프와 연결되는 흰색이 오히려 ‘정화’의 의미로 다가왔다. 인물들의 정장 차림이 장례식과 결혼식, 그리고 또 다른 장례식이 중첩되는 장면을 살려 주는 것도 그렇게 생각한 근거가 되었다. 마지막에 이바노프가 내버려 두라고 외쳤던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결국 이 작품은 잉여인간인 이바노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잉여로 재단하는 것도 모자라 잉여로마저 내버려두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애플씨어터 <잉여인간 이바노프>

[사진: 한강아트컴퍼니 제공]

애플씨어터 <잉여인간 이바노프> 포스터

일시
1월 29일~4월 12일
장소
아트씨어터 문
안톤 체홉
연출
전훈
출연
김대건, 이민준, 이동규, 주유랑, 이도우, 안나영, 김샛별, 염순식, 유영진 외

태그 애플씨어터,잉여인간 이바노프,권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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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린

권혜린 대학원생
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현재 대학원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읽고 쓰는 일에 매진하면서 때로는 연극을 보며 숨을 고르기도 합니다.
http://blog.naver.com/grayhouse31
mollispenn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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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호   2015-03-19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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