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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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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리뷰로 썼던 글을 모두 지웠다. 글에 ‘글’이 없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연극이 극렬히 던지고 있는 메시지들은 뒤로 한 채, 어쭙잖게 부수적인 장치들만을 분석했다. 그렇게 ‘글자’들만이 나열된 글 속에서, 문득, 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의 연극성이 떠올랐다. 실체 없는 허상만을 좇고 있던 우리에게 마지막 황백호가 남긴 대사는, 글을 모조리 지우고 말았던 그 순간의 깊은 막막함을 던져 준다. “전 이제 진짜 귀신을 잡으러 갈 겁니다. 우리는 이 무대에 갇혀 길을 잃었던 게 아니라, 현실로 나가는 길을 찾고 있던 겁니다.” 그는 그렇게 현실로 나가는 길을 찾아 떠났다.

허상만 있다. 우리네 삶이 실로 그러했다. 어찌나 현실만을, 합리만을, 사실만을 추구하던 세상이었던가.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의 것들은 모두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치부해버린 채,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실체’적이고자 아등바등 살았던가. 그러나, 여기, 이 연극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은 실체만을 좇고 있는 지극히도 허구적인 우리네 모습을 딱 꼬집어 재현해준다. 배우들은 “대한민국 민주 경찰은 사람 안 팬다. 말로만 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폭력은 여전히 존재했고, 가해 없는 피해만이 속수무책으로 생겨났다. 폭력이 부재한 폭력, 이처럼 현재 우리의 삶을 잘 그리고 있는 비유가 있을까. 그 동안, 실제로, 우리의 현실에서 실재했던 것은 얼마나 존재할까. 작년 4월 우리 모두 가슴으로 눈물을 쏟아냈던 크나큰 슬픔 속에, 결국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이며, ‘땅콩’을 쥐어박고 싶던 분노의 사건을 겪으며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개선되어졌던가. 그렇게 현실만을 추구하던 우리가 어찌 지금은 이리도 비현실적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든 붙잡고 묻고 싶다.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연극은 계속 말한다. “재미만을 추구하라”고 말이다. 무슨 말인가. B급 액션무협판타지 연극 속 원초적인 웃음만이 가득한 이곳에서, 극중극중극이라는 해괴망측한 내러티브 속에서 우리가 어찌 유쾌하고 진득한 웃음을 머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연극의 음악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신나는 것만이 재미는 아니”라고. “슬픔과 분노 또한 또 다른 재미”라고. 그렇다면 그들의 ‘재미’는 성공했다. 지극히 일차원적인 웃음들 속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극중극중극이라는 내러티브에 뒤통수를 거하게 맞았고, 점차 공연과 현실, 배우와 자연인 사이의 경계선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다. 이미 연극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알고 있노라고 생각했던 자만한 관객을 향해 무자비한 일격을 가했다. 더불어 연극은 이 시대, 우리 민중들이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극렬히도 예민해하고 있다는 통념에도 가차 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오로지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을 찾고, 죽이기 위해 달려온 무대 속 황백호는 결국 무대를 뛰쳐나간다. “이곳에서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을 수천 번, 아니, 수백만 번을 찾아 죽인다고 해도, 우리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외친 그는 결국 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허상’을 좇는 자신의 모습을 이내 자각하고는, “현실보다 더 리얼한 이곳에 없는 건 ‘현실’ 아니겠습니까”라는 말을 남기며 무대를 떠난 것이다. 그들의 재미는 그렇게 관객들에게 혼란과 분노, 슬픔과 아련함을 느끼게 함으로써 성공을 거둔다.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곧 4월이 다가온다. ‘그날’이 가까워져 온다. 건진 것보다는 잃은 게 더 크게만 느껴졌던 그날의 아픔의 날 말이다. 삶이라서, 삶이기 때문에 죽음에 미안해했던 그 시간들, 이후에는 책임의 자리만 추궁하던 역겨운 세월들,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오히려 또 우리는 실체라는 현실의 농락에 휘둘리며, 그날들을 그저 지난 날, 아픈 기억,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비현실적인 일들 즈음으로 치부해 두고 있지는 않은가, 되물어야 한다. 끊임없이 되묻자.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말이다.

“이곳에 갇혀 실체가 없는 이름과 싸우는구나. 누구도 본 적 없는 이름과 싸우는구나”. 귀신이라는 허구적 존재는 가장 뼈 있는, 가장 살아있는 대사를 반복하여 읊조린다. 주인공 황백호는 귀신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되어, 반복되는 저 말을 어이없게 지나치지 않았다. 연극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황백호, 결국 황백호는 자신이 그러한 ‘연극 속에 갇혀있음’을 발견하고, 갇히지 않은 상태, 즉 그가 간절히도 원했던 진정한 실체의 공간, ‘현실’을 향해,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를 박차고 나갔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황백호가 열어놓은 그 길로 우리도 달려가야 하는 일이 아닐까.

앞서 글자들의 나열이기만 했던 ‘글도 아닌 글’을 지웠다고 밝혔다. 과연 지금 쓰는 이 글도 감히 ‘글’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의 연극성 앞에, 그나마 낯 뜨겁지는 않으니, 이 글은 지우지 않으려 한다. 늘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끝으로 말하고 싶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나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자기 자신을 잃어간다는 뜻일 테다. 마찬가지로, 실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추구한다는 것이, ‘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허상’이라는 괴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남산예술센터 <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 포스터

일시
3월 12일~3월 29일
장소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최치언
연출
김승철
드라마터그
배선애
출연
김관장, 김성일, 김수현, 민병욱 외

태그 남산예술센터,소뿔자르고주인오기전에도망가선생,장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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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영

장기영 대학생
연극을 좋아합니다. 죽어있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역동적인 생명력을 내뿜는 연극이라는 장르에 매료된 대학생입니다. ‘살아있는’ 연극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법을 배우기 위해, 현재 국어국문학이라는 본 전공을 토대로 문화비평학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http://blog.naver.com/sec6300 , 이메일 kalce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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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호   2015-04-02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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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있기를 강요하는 세상에서, 역동적인 생명력을 내뿜는 연극이라는 장르에 매료된 당신이 부럽고 멋있다고 느껴집니다.
연극 리뷰 잘 봤습니다. 앞으로는 블로그 정기 구독을 통하여 당신의 글을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2015-04-02댓글쓰기 댓글삭제

파란기차
오우 좋아요.^^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2015-05-19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