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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 이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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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은 노래가 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삼마미아! ㅇㅇㅇㅇㅇ!’ 가사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배우들이 좀 더 신나게 노래를 불러주었더라면, 또박또박 전달하기보다 즐겨주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었을 텐데, 내용을 듣기 위해 언어에 집중하느라 음악을 즐기지 못했다. 핑계 맞다. 기억력이 나빠서 가사를 기억 못할 뿐이다.

생쇼를 살리는 쇼

유희왕들이 등장한다. 영조, 사도세자, 정조. 3대가 유희관에 모여서 담소를 즐긴다. 원래의 목표는 ‘놀이를 즐긴다’였던 것 같은데 ‘담소’를 즐겼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사연 많은 3대가 모여서 놀이를 하고, 하룻밤의 꿈같은 유희관의 경험이 정조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줄거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용상으로는 생쇼일 뿐이다. 내용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는데, 의무교육시절에 들었던 역사 얘기가 갑자기 툭툭 튀어나와서 놓칠 수가 없었다. 영조의 탕평책과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 정조의 탕평책. 이런 것을 다시 주워들으려고 극장에 간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의무교육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극장에 간 것은 아니고 ‘삼마미아’가 뭔지 궁금해서 극장에 갔다. 물론 공연을 보면서 역사 공부를 다시 해볼까, 잠시 스쳐지나가듯 생각은 해봤다. 그러면 학습 동기 유발을 위한 연극이었던가!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연극이다. 연극의 놀이성에 초점을 맞추고 한 판 신나게 놀아보자는 공연이었다. 놀기 위해서 말을 만들어내고 싸움을 만들어내고 사연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연출가는 스토리텔링과 쌩쑈 중 이야기를 선택했다. 이야기 전달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극이 그다지 진중하지도 않은 말장난들에 신경을 쓰니 배우나 관객이 신나게 놀 수 없었다. 갑갑했다. 이야기 전달보다는 쌩쑈! 유희적 본능에 초점을 맞추어야 극이 살았을 것 같다. 텍스트는 놀이에 집중했는데 공연은 스토리에 집중했다. 안 맞다. 합이 안 맞다. 조심스런 줄타기는 모호함만 남겼다. 유희적 본능을 발휘해라!

부분과 전체의 부조합

약간은 어설프지만 그래도 뮤지컬 형식을 취한다. 연기하다가 노래하니까 뮤지컬. 일부러 어설픈 의도를 갖고 쓴 것 같은 삼마이 대본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이야기 구성을 취하고 있지만 장면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들만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굉장히 열.심.히 연기를 한다. 그러다가 노래를 할 때는 뮤지컬의 정석을 보여주려는 듯한 무대연출을 보여준다. 멋지고 정확하게 노래를 부르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노래도 잘 부르려고만 한다. 정극과 아동극을 오가다 뮤지컬까지 탐내는 복잡한 장르는 그저 쌈마이라고 퉁칠 수밖에. 관객으로서는 재치 밖에 없는 말장난을 경청하다가 노래를 부르길래 리듬을 타려고 하는데 다시 진지모드다. 아, 난감하다. 즐기고 싶단 말이다. 차라리 진지하게 정조와 사도세자와 영조가 치고받고 싸우던가, 쌈마이의 진수를 보여줄 양 ‘병맛’이 폴폴 풍기는 무협극을 보여주는 식으로 다양한 장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으면 더욱 좋았지 않았나 싶다. 연출가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추억의 놀이들

귀신을 소환하는 주문은 ‘삼마미아’다. 삼마미아! 트라우마! 절차탁마! 정말 말도 안 된다. ‘마, 마, 마자로 끝나는 말은’ 아무 생각 없이 뱉은 말을 대본으로 만들어 내다니. 정말 ‘화학작용’에서 기다려온 연극은 바로 이런 연극인걸까. 어이없는 상황에 모든 것을 내려놓게 만드는 연극. 자발적으로 지속적으로 예술 할 수 있는 유희본능이란 이런 것이었다니. 많은 생각이 든다. 말장난부터 시작하여 90년대에 한창 유행이었던 DDR 스텝을 밟는다. 무대 한 가운데에서 DDR로 동서남북을 밟으면(땅따먹기와 DDR이 한겨레였던가!) 차례차례 사도세자 이선과 영조 이금이 등장한다. 특히 사도세자는 대형마트에서 볼 수 있는 카트에 몸을 싣고 등장한다. 뒤주에 갇혀 죽은 귀신이기 때문에 카트에 갇혀서 나온다. 뒤주를 있는 그대로 제작하지 않고 생활 속 소품을 이용했다. 어린 아이들은 카트를 물건 담는 수레로 보지 않고 놀이기구로 보듯이 연극에서는 모든 것을 비일상적인 장난감으로 이용할 수 있다. 연극적 약속이라는 마법을 이용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 끝말잇기, 진실게임, 가장 불쌍한 사람 이름대기 등등 여러 놀이로 연극은 진행된다. 음악들도 매우 익숙한 음악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나 영화 <올드보이> OST 같은 친숙한 음악들만 틀어준다.

제일 의문이 드는 것은 놀이를 얘기하는데 왜 왕들을 등장시킨 것일까? 3대를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결자해지와 무수리 명주, 유희왕들은 어떤 관계일까.
권력의 쟁투 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긴 왕들. 무엇에 쫓기는 것이고 어디로 피신한단 말인가. 웃기다. 쫓기는 우리 삶을 보는 것 같다. 도망에 일가견이 있는 내 삶에도 제동을 건 이유는 계속 내 삶에서 도망쳐봤자 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피신할 곳이 없다. 한 번 도망가면 영원히 쫓길 뿐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인생을 견뎌보기로 했다. 마주치고 싸우고 모든 아픔을 감수하기로 했다. 우리는 항상 쫓긴다. 학업에 취업에 생계에 사랑에 쫓긴다. 삶을 살아가면서 요구되는 것들에게 쫓긴다.

무릇. 임금이라면.
무릇. 청년이라면.
무릇. 창작자라면.

논다는 것은 당파싸움을 피해 유희관을 찾은 왕들처럼 조금 쉬어가자는 것이다. 도망치듯 쫓기면서 돈 벌고 공부하고 일하면서도 인생을 즐기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는 것은 무용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생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쫓기지 않고 창작하겠다는 ‘화학작용’이 부럽다. ‘우리가 기다려왔던 연극은 바로 우리’라고 외치는 뻔뻔하고도 당당한 슬로건을 응원한다.

한 판 놀아보자꾸나. 삼마미아! 세상이 그대를 힘들게 할지라도!

[사진: 컬쳐버스 제공]

태그 극단 걸판,삼마미아,김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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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김연재 대학생
대학교에서 연극을 공부하고 있다.
제87호   2016-03-11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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