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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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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대한민국은 군인에 열광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드라마 ‘태양의 후예’ 속 군인에게 말이다. 드라마에서 창조된 ‘군인’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를 지키기 위해 땀 흘리는 숭고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들은 언제나 의롭고 당당하며, 자주적 신념과 사상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에서 빛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군인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드라마가 끝난 후 뉴스를 통해 드라마와 사뭇 다른 군인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현실 속 군인은 의롭거나 당당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주적 신념과 사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국가와 정치권력이라는 거대 담론 아래 희생당하는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연출가 박근형은 현재를 살고 있는 군인의 초상을 연극 무대 위에 옮겨 놓았다. 이상적으로 미화된 ‘영웅’으로서의 군인이 아닌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군인을.

“어차피 세상은 전쟁이고, 우리는 모두 군인이다”

지난해 정치 검열과 관련하여 문제작이라 손꼽힌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전작인 <개구리>에서 박정희 전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전적이 있다는 이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 지원사업 선정이 취소된 이 작품은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난 후 남산예술센터에 오르게 되었다. 정치 문제로 홍역을 앓았던 연출가가 선보이는 이 작품 역시 정치 문제를 화두에 던진다. 다만, 이번에는 정치 풍자가 아닌 정치권력 아래 희생당한 이 시대 개인의 삶과 아픔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연극은 2015년 대한민국 경남, 1944년 일본 도쿄, 2004년 이라크 팔루자, 2010년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를 배경으로 하여 만기 제대를 한 달 앞둔 젊은 탈영병,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가 된 조선인 병사, 이라크 테러 집단에 납치된 한국인, 선박 침몰로 목숨을 잃은 해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사적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네 개의 서사는 각각 상이한 시공간에서 벌어지지만 모두 하나의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이 세상은 온통 전쟁터이며, 그 안에 존재하는 우리는 살기 위해 스스로 죽거나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군인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라고 말하는 이 연극은 ‘모든 인간은 불쌍하다’는 주제로 귀결된다.

파편화 된 네 개의 서사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박근형 연출이 지금껏 선보인 작품들과 다소 다른 형태의 극적 구도를 취한다. 한 개의 주된 서사가 극을 이끌던 기존의 연극적 관행에서 벗어나 네 개의 서로 다른 서사를 결합하여 하나의 극으로 만드는 옴니버스 식의 서사 방식을 사용했다. 이 때 특징적인 것은 하나의 서사를 완전히 마무리 지은 후 새로운 서사를 시작하지 않고, 네 개의 서사가 교차 편집된 형태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나 볼 듯한 이러한 서사 방식은 서로 다른 시공간의 상황이 마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며 연출가가 네 가지 서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를 보다 극명하게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력 아래 한낱 힘없는 인간이 겪어야만 하는 피해자와 가해자로서의 모순된 굴레, 그리고 불행한 굴레 속에서 벌어진 과거의 사건들처럼 지금 이 시점, 그리고 내다 볼 수 없는 미래의 어느 한 순간에도 이러한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주제뿐 아니라 극적 효과 면에서도 교차 편집 구성은 제 힘을 발휘한다. 한 개의 주된 서사로 이루어진 작품을 관객이 몰입해서 볼 경우, 관객은 극 중 인물에 동화되기 쉬워 극적 상황을 넓은 시야로 보지 못하고 해당 인물의 특정한 내면적 감정에 의지하여 편협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반면 교차 편집 형태로 구성된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의 경우, 파편화 된 서사들 간의 유기성을 유추하기 위해 관객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작품의 큰 그림을 보려 한다. 탈영병이 군 제대를 한 달 앞두고 총을 든 채 사회로 뛰쳐나온 이유, 조국을 버리고 일본의 군인이 되어 죽음의 길로 스스로 뛰어든 조선인 병사의 사연, 죄 없는 한국인을 납치하면서까지 세상에 알리고자 한 이라크 무장 단체의 분노, 수많은 해군 장병의 목숨과 뒤 바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이처럼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작품 안에 흩어져 있는 서사의 조각들과 거리를 둔 채 이를 관조하는 과정에서 관객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발견하거나 혹은 작품 속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각과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여백의 밀도

이 연극은 특징적인 무대 형식을 취한다. 기존의 남산예술센터 원형무대 위에 T자형 돌출무대를 추가로 설치한 것이다. 덕분에 넓어진 무대공간을 확보했고, 원형무대와 돌출무대 사이의 공간을 활용하여 연극적 스펙터클을 창조할 수 있게 되었다. 단상처럼 높이를 두고 제작한 돌출무대는 마치 선함 위 갑판 같은 공간으로 표현되고, 무대 중앙과 뒤편, 객석 옆에 자리한 계단은 때에 따라 배우들이 오르내리며 무대의 수직적 깊이감을 더한다. 이 작품의 무대 미학은 여백의 밀도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장면은 무대 위에 별다른 소품 없이 간단한 책상 혹은 의자만을 둔 채 진행된다. 이 때 무대는 곳곳에 커다란 여백이 생기게 되며, 이는 마치 작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대조되는 국가 혹은 정치권력이라는 거대한 존재를 공간으로써 상징하는 듯하다. 반면,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서해 백령도를 배경으로 한 장병 추도식 장면은 죽은 병사들이 살아생전에 못 다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발화하며 무대 곳곳을 가득 메운다. 무대의 여백이 점차 없어지고 극장 안에 퍼지는 희생자들의 울음소리로 작품의 절정은 극화된다. 새로운 연극적 장치 혹은 무대 세트의 활용 없이 여백의 밀도를 통해 극적 상황을 대변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무대 미학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그간 박근형 표 연극과 사뭇 다른 색채를 띤다. 부조리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그만의 특유한 희극성과 정치 풍자가 이루어내는 연극적 효과를 찾아보기 힘들다. 첫 장면에서 잠시 표현되는 듯 했으나 극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마치 다른 공연이 된 양 그의 색채는 이내 지워졌다. 그렇지만 이 또한 그의 또 다른 색채로 볼 수 있을 듯 하다. 국가 혹은 거대한 정치권력 아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서 두 얼굴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인간의 비통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가 취해온 기존의 연극과 다른 새로운 연극이 필요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정치 검열이라는 외부 압력을 버티며 다시금 견고해진 그의 연극은 관객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계속해서 진화하는 그의 연극이 반갑기도, 한편으로는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지점이다.

[사진: 남산예술센터 제공]

남지현
한예종 연극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며, 공연 관련 글을 쓰고 있다.
pil_jh@naver.com

태그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극단 골목길, 남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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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호   2016-04-07   덧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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