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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가 만난 배우] 김석영X김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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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시려는 독자님, 지금 머릿속에 떠도는 많은 생각 혹은 이미지들 중에서 하나를 잡아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 보세요. 혹시 생각이 다른 곳으로 점프한다면 그 새로운 이미지나 생각을 따라가 보세요. 혹시 방금 눈동자를 움직이셨나요? 미간을 찌푸리셨나요?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라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몸의 세부가 움직였나요? 의식과 몸이 서로에게 깃들어 함께 흐르고 있지는 않았나요? 한성대입구역에서 3년 째 연습실을 운영하며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김석영 배우를 만나 ‘몸과 의식의 흐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2016년부터 연습실을 운영하며 3년 동안 주 5일 2시간씩 훈련을 이어오고 있다고 알고 있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2008년에 스즈키 타다시가 연출한 <엘렉트라>에 배우로 참여하면서, 일본의 토가 연극촌에 가서 두 달 가까이 체류했다. 당시 배우들이 매일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흔히 말하는 ‘스즈키 트레이닝’을 하고, 오후에는 리허설이나 다른 업무를 봤다. 굉장히 충격 받았다. 우리나라 배우나 극단들은 왜 훈련을 안 할까, 왜 이런 특화된 메소드나 문화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나 단체가 없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때 매일 아침 훈련을 하면서 구체적인 훈련 프로그램도 경험하게 되고, 매일 훈련하는 것의 유용성 같은 것도 느끼게 됐다. 한국에 돌아와서 「신체감각 개발 훈련을 통한 배우의 '말할 수 있는 상태' 구축과정 연구 : 스즈키 메소드(Suzuki Method)를 활용하여」 라는 제목의 실기 논문도 썼다. 이후 나라도 나서서 지속적으로 훈련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고, 이런 방식으로 동료들을 만나 작업도 하고 싶었다. 3년 가까이 해오고 있는데 아직 그룹을 만들지는 못했다. 함께 훈련하는 사람들이 들쭉날쭉 한다.
그때 경험한 스즈키 트레이닝을 훈련에 이용하고 있나.
스즈키 트레이닝의 일부와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 중 플라스티끄(Plastiques)를 이용한다. 스즈키 극단의 경우, 훈련에서 익히는 움직임의 형태가 그대로 공연 양식으로 이어지지만, 나의 경우는 그걸 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스즈키 훈련 프로그램의 일부만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스탬핑(stamping 혹은 stomping)을 이용한다. 스탬핑 역시 그 폼 자체가 중요하기 보다는 스탬핑을 끝냈을 때 내 몸 안에서 흐르는 에너지의 흐름을 중시한다.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장전된 총알과 같은 상태’ 역시 스탬핑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감각이다. 거기에 연기의 시작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론가 갈 수 있는 어떤 기분(?) 같은 것이 내 몸에 찾아온다. 스즈키의 경우는 그 훈련 자체를 공연에 이용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훈련 후에 찾아오는 몸의 자유, 변용 능력을 위해 스즈키 훈련을 이용한다고 할 수 있다. 플라스티끄의 경우는 ‘조형과 의식의 흐름’을 훈련하는 데 유용하다. 스즈키 트레이닝이 고정된 형식을 익히는 데서 출발한다면 플라스티끄는 지금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의 흐름과 의식을 함께 탐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두 훈련법이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는 것 같다. 결국 둘 다 ‘쪼그려 앉아 있는 몸엔 어떤 충동이 오고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의 문제이다.
2000년대 이후로 스즈키 타다시와 한국 연극이 긴밀히 교류하면서 짧든 길든 제법 많은 한국 배우들이 스즈키 트레이닝을 경험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미국의 시티 컴퍼니(SITI Company)에서도 스즈키 트레이닝으로 워크숍을 하고 있고 이 워크숍에 참여한 배우들도 점점 늘고 있다. 이 배우들을 주축으로 국내에서 열리는 스즈키 트레이닝 워크숍도 종종 있다. 그에 비해 플라스티끄를 훈련해봤다는 배우는 만난 적이 없다. 나 역시 책에서만 접했다. 어떤 계기로 접하게 됐나.
플라스티끄의 경우, 칼아츠(CalArts; 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유학하고 온 동료를 통해서 그 학교 학생들의 필독서라는 An Acrobat of the Heart: A Physical Approach to Acting Inspired by the Work of Jerzy Grotowski (Stephen Wangh, 2000)을 소개받고, 함께 스터디를 했다. 그 책에 보면 플라스티끄에 대한 방법론이 세세히 묘사되어 있다. 1967년에 그로토프스키가 NYU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했는데, 그 워크숍 참여 학생이자 스타니슬라브스키에 경도되어있던 스테판 웽이 충격을 받고 그로토프스키의 방법론을 탐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에 그가 그로토프스키를 기반으로 자신이 발전시킨 훈련들을 적어놓은 책을 썼는데, 나는 그 책을 본거다. 그러니까 내가 훈련하는 방법이 그로토프스키와 같다는, 혹은 스테판 웽의 것과 같다는 보장은 없다. 그냥 책을 통해 내가 이해한대로 훈련해보고 있는 거다.
그로토프스키의 플라스티끄 훈련의 경우 국내 번역서에는 ‘조형훈련’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훈련하고 있는 플라스티끄는 어떤 방식이고 어떤 효용이 있는가.
일단, 이것은 내가 이해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로토프스키의 원전과 얼마나 가까운 지 혹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는 보장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내가 훈련하는 방식을 소개해 보겠다. ‘의식이 담겨 있는 모든 움직임의 형태’를 플라스티끄라고 한다. 신체의 모든 부분은 신체 조형에 기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신체의 부분 부분을 나눠서 신체 부위 별로 ‘조형과 의식의 연결’을 실험한다. 이를 ‘플라스티끄 아이솔레이션(isolation)’ 이라고 한다. 눈꺼풀 혹은 눈동자에서부터 출발해서 코, 귀, 입, 고개, 목, 어깨, 팔, 손가락, 척추, 다리, 발가락까지,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신체 부위를 각각 조형하면서 그 세부적인 조형에 어떤 의식이 깃드는지를 경험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의식이란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나.
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을 의식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상상과 이미지와 생각, 충동, 정서, 기분, 해석, 호르몬의 작용, 화학작용 등이 될 수 있겠다.
훈련의 예를 들어줄 수 있나.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눈동자를 오른쪽 끝까지 보냈더니 내 오른쪽에 있는 커피 컵이 눈에 들어온다. 곧이어 저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커피의 맛, 향기도 느껴진다. 그런데 여기서 턱을 반대쪽으로 살짝 당기면, 커피는 마시고 싶지만 마실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마시면 안 된다는 해석이 내게 생겨난다. 여기에 다른 신체 부위를 계속 추가할 수도 있다.
추가해 보자. 예를 들면 가슴.
내가 어느 쪽으로 가슴을 움직이면 좋겠는가. 제시해 보라.
글쎄. 뒤쪽으로 당겨보자.
눈동자를 오른쪽 끝까지 보내고, 턱을 왼쪽으로 살짝 보낸 상태에서 가슴을 뒤로 살짝 당기니까 순간 장난스러운 기분이 들어온다. 저걸 마시면 안 되는데 마실까? 말까? 장난스러운 느낌. 심지어 나는 계획에도 없이 혀를 날름 내밀게 됐다. 이처럼 조형은 의식을 불러오고 의식의 흐름은 다시 (날름거리는 혀와 같은) 몸을 불러온다. 이렇게 조형과 의식의 흐름을 계속 따라가면서 훈련하는 것을 ‘플라스티끄 리버(river)’ 라고 한다.
김석영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제자 소니아 무어가 심리신체적 행동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근육에는 일대일로 연결된 감정이 있다’는 표현을 썼던 것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
사실 나는 감정이라는 단어를 될 수 있으면 쓰지 않으려고 한다. 감정보다는 정서나 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위 예시에서 눈동자와 턱과 가슴 등 신체 각 부위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흥미롭다. 『가난한 연극』(그로토프스키 저, 고승길 옮김, 1987)이라는 번역서에도 조형훈련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나와 있는데, 거기 보면, ‘역향적인 동작’에 대한 지시가 계속 나온다. 말 그대로 서로 어긋나는 방향으로 신체를 운용하는 방식인데 예를 들면, ‘머리를 오른쪽으로, 척추는 왼쪽으로, 엉덩이는 오른쪽으로, 허벅지는 왼쪽으로, 발목은 오른쪽으로 각각 회전한다.’ 이런 식이다. 어깨와 팔과 손목과 손가락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흑백의 훈련 영상을 봤던 기억도 떠오른다. 조금 전에 플라스티끄를 설명하면서도 눈동자, 턱, 가슴을 모두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이렇게 ‘역향적인’ 동작을 훈련하는 이유가 있나.
일종의 저항, ‘애씀’을 훈련하는 것 같다. 어느 책에선가 ‘저항이 곧 표현이다.’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저항이 뭘까. 너와 나가 마주 앉아있는 것, 맞대고 앉아 있는 것 역시 저항일 수 있다. 혹은 내 몸과 마음 사이에도 저항이 있을 수 있지 않나. 저항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써야하고, 이 저항, 애씀, 에너지의 낭비를 통해 표현이 발현된다. 드라마가 생겨난다.
언젠가 워크숍에서 만난 세르게이라는 러시아 연출가가 ‘문제가 있는 곳에 예술이 있다.’고 말했는데, 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애씀’을 통해 무엇을 탐구하고 있나.
‘나만의 드라마를 쓰는 것’이 화두다. 플라스티끄 리버 훈련을 통해 ‘의식과 몸의 연결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나만의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다. 대본을 받으면 대본을 따라가기 바쁜데, 대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 몸과 마음에 이는 것에 대본을 가져올 수는 없을까. ‘텍스트를 어떻게 몸으로 끌어당길 수 있을까’. 순간순간 내가 해석하는 방향으로 텍스트의 방향을 틀수도 있다. 결국 텍스트에 제시된 드라마가 아니라 내 몸으로 끌어드린 나만의 드라마를 쓰는 것이다.
‘의식과 몸의 연결을 따라간다’는 것에 대해 부연해 달라.
우리 머릿속에는 수 없이 많은 생각의 줄기가 있다. 이것을 이미지라고 하자. 이 이미지 하나만 계속 따라가 보자. 그것이 나에게 어떤 사유를 가져다주는지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거다. 의식은 감각을, 행동을 동반한다. 흐를 수 있을 때까지 흘러보자. 그러다가 다른 생각의 줄기를 만나면 또 그것을 따라간다. 이미지는 파생되고 파생된다. 논리적이지 않아도 된다. 흐름이 끊이지 않게 된다.
여기 있는 자몽주스를 따라가 보겠다. 그제 분장실에서 분장선생님이 시원한 자몽에이드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시원하고 신선해 보여서 한 모금만 달래서 마셔봤다. 너무 상큼해서 어디서 샀냐고 했더니, 요 앞 **커피에서 샀다고 했고, 거기 가면 자몽 하나를 그 자리에서 짜서 에이드를 만들어 준다고 했다. 어제 연습실 가는 길에 다른 카페에서 자몽에이드를 시켰는데 자몽 청에 사이다를 부어줬는지 인공적인 맛이 나고 너무 맛이 없어서 버리고 싶었는데 그냥 다 마셨다. 대 실패. 오늘도 여기 인터뷰하러 오면서 근처 커피숍에서 이 자몽주스를 사왔는데 이건 그냥 그렇다.
방금 자몽주스를 따라가면서 지었던 표정, 말했던 입 모양, 손의 제스처, 몸의 포즈 등 그 모든 것이 방금 따라갔던 그 의식과 연결된 몸의 조형이다. 그 의식과 몸의 조형 안에는, 자몽 주스의 맛, 향기, 마셨을 때의 기분 같은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에는 몸으로 집중이 넘어가서 몸을 따라갈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의식을 따라가다가 어느 부분에서 내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인식했다면, 이번에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식으로 역으로 의식이 몸을 따라갈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다가 다시 눈동자의 움직임이 어떤 충동이나 정서, 사유, 이미지 등을 불러오면 다시 의식을 따라가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아주 동시적이다.
그로토프스키가 말한 ‘몸-기억(body-memory)’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을까. 방금 짧은 순간에 3일 치 자몽주스 다 마신 기분이다.(웃음) 아까 위에서 ‘텍스트를 몸으로 끌어당긴다’는 표현도 썼는데 거기에 대해서도 부연해 달라.
내 몸에 명칭이 붙어 있는 부분들에 상상의 끈을 매달아보자. 각 부위를 당기면 거기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거다. 신체 각 부위에 매달린 욕망들이 충돌하고 있는 거다. 그 욕망을, 그 사건을 뭐라고 해석할까. 텍스트에서 그런 걸 읽어내는 거다. 드라마란 무엇인가. 연극에서 드라마란 단순히 서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드라마란 무엇인가. ‘배우의 몸 안에 있는 드라마’를 어떻게 구성해내고 드러내야 하는가. 이것이 내 화두다.
‘배우의 몸 안에 있는 드라마’가 뭘까. 텍스트가 있는 이런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아내가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넥타이를 매주면서, 남편이 어제 밤에 사전 통보도 없이 데리고 들어온 시동생이 날이 밝았는데도 왜 갈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장면이다.
“도대체 저 작은 방에 있는 사람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내 동생이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우리 집에 와 있어?”
“동생이 형 집에 오는데 이유가 필요한가?”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 근데 저 사람 우리 집에 완전히 눌러 붙으러 온 거 아니지?”
“눌러 붙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 늦었어. 가봐야 돼.”
“날이 밝았는데 왜 갈 생각을 안 하고 저러고 있는데.”
“듣겠어. 왜 큰소리를 내고 그래.”
“들으라지 머.”
넥타이를 매주고 있으니, 화난 것을 완전히 드러내고 싶은 건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원하는 것은 시동생이 이 집을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의식 저편에는 시동생을 밀어내고 있는 내가 있다. 그것을 몸과 연결시켜보자. 나는 남편을 마주보고 넥타이를 매주고 있다. 넥타이를 매주는 손에 밀어냄이라는 애씀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눈과 턱으로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역시 밀어냄이라는 저항의 에너지를 담을 수도 있다. 그리고 등으로는 다른 방에 있는 시동생을 밀어 낼 수도 있겠다. 그런 식으로 눈, 코, 귀, 턱, 목, 어깨, 팔, 손, 가슴, 등, 허리, 골반, 허벅지, 무릎, 발 등 신체 각 부위에 각기 다른 끈을 매달아 그것을 당기는 애씀에 동반되는 의식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모두 몸과 연결되어 있고 형태가 없어 보이는 의식도 몸과 만나면 결국 형태 혹은 뉘앙스를 갖게 된다.
이 글을 다 읽으신 독자님, 지금 독자님 몸의 세부에는 어떤 의식이 깃들어 있나요. 내 눈은, 턱은, 손가락은, 등은, 가슴은 어디에 매달려 있나요. 어떤 사건과 욕망에 연결되어 있나요. 그리고 그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의식과 함께 내 몸의 조형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매 순간 그 몸의 조형을 나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요. 결국 내 몸은 지금 어떤 드라마를 쓰고 있나요. 『배우훈련』(앨린슨 호지 편저, 김민채 옮김, 2017)이라는 번역서의 ‘그로토프스키의 배우를 향한 비전’ 이라는 챕터에서 다음 문장을 인용하며 마칩니다.
“많은 연출가와 배우가 행하는 실수는 움직임의 상황에서 단순히 나타나는 작은 행동들의 모든 순환(행동들, 반응들, 접촉의 지점들(points of contact)) 대신 움직임만을 결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p.309)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태그 배우가 만난 배우,김석영,김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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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록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rock2da@gmail.com
제 161호   2019-06-13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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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혹시... 워크샵에 참여 할 수 있을까요...?

2019-06-14댓글쓰기 댓글삭제

와...
와우...

2019-06-14댓글쓰기 댓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