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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철인28호가 소주 한 병으로 거듭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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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황선택

제가 이제 연출이라고 불리네요.
연출할 생각이 있었나. 나한테.
아니, 연극할 생각이 있었나. 나한테.

저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했어요.
꽤 잘 했어요.
프로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당연히 될 거라 생각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중3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이게 뭐지.
사람이 왜 이렇게 쉽게 떠나지.
난 내가 철인28호처럼
무적인 줄 알았어요.
영원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시니까
자꾸 이게 뭐지 이게 뭐지.

그러다 죽음 이라는 단어가
정말 도적같이 가슴에 찾아왔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은
중학교 졸업식 전이었어요.
그 날 이후로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그렇게 허무주의에 빠져 5년을 보내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프로테스트를 준비하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 진짜, 이게 뭐지.
이건 대체 뭐야.

다시 야구를 그만두고
계속 돌아다녔어요.
몸도 마음도 계속 빙빙 돌았어요.
집도 없고 돈도 없어서
친구 집을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스키장에 가서 일하면서 살다가
결국 핸드폰 팔이 하면서
그렇게 돈을 모아
제 방을 구하면서
두 발 뻗고 누울 수 있게 됐는데,

왜 아직도 이렇게 불안한지.
자꾸 나가야할 것 같고
어디로 가야할 것 같고
그러다 군대를 갔죠.

연출가 황선택

연극도
자꾸 어디로 가고 싶어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친구가 연극을 한다기에
저도 친구 따라 연극을 시작했어요.
연극 보다는 친구 때문이었죠.

그러다 보니 내가 왜 연극을 하는지도 모르겠더라구요.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를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연극을 왜 하는지 궁금했어요.
선배들은 예술이라고 하는데
예술이 뭐냐고 물어보면 다들 추상적으로만 이야기 하고
정확한 말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게 궁금해서 더 깊이 물어보면 다들 화를 내거나 피했죠.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이방인 같은 거예요.
저라는 인간이
너무 쓸모없어 보이더라구요.
아, 내가 선배들이 말하는 연극건달이 되려나보다.
갑자기 서러웠어요.
삼양동 꼭대기 옥탑에서 이장희의 ‘휘파람을 부세요’를 듣는데
소주를 마시고 싶었어요.
근데 아무리 바닥 구석구석 동전을 긁어모아도
200원이 모자란 거예요.
편의점 알바에게 부탁해서
200원을 깎았어요.
알바가 대신 내줬죠.
그 소주를 들고
다시 집 옥탑에서
이장희의 ‘휘파람을 부세요’를 듣는데 미치겠더라구요.
제가 정말 쓸모없는 인간 같아서요.
울분이 터졌습니다.
옥탑 난간에 매달려 절규하며 신을 찾았어요.
(제가 교회를 다녔었거든요)
고요했습니다.
신은 저에게 침묵하더군요.
아래 층 집주인도, 동네 사람들도
저 멀리 개들도 저에게 침묵했어요.
이장희의 노래가 끝나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극을 만들자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바닥을 친 거죠.
두려울 게 없었어요,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이장희의 ‘휘파람을 부세요’를 듣다
연극 제목을 <휘파람을 부세요>라고 정하고
그날 바로 8페이지를 쓰고 그 8페이지로
주변에 배우를 섭외하고 우격다짐으로 극장을 찾아가
수입의 5대5로 극장을 잡고
정신없이 20일 뒤에 공연을 올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2년이 되어 가네요.

연출가 황선택

운 좋게 상을 받기도 하고
항상 상을 받을 때 처음 생각이 납니다.
배우들과 같이 배짱 키운다고
지나가는 버스 세우고
무대 소품 훔치러 다니고
산에서 리딩하고 동선 짜고 했던 처음이...

전 아직도 연극을 잘 모릅니다.
그저 누가 "어떤 연출이 되고 싶어요?”라고 물어보면
“배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연극을 만드는 연출이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사실 연출 작가 배우 스태프를 구분 짓진 않습니다.
그냥 연극을 하는 거죠.
저도 언젠간 배우를 하고 싶어요.
원래 배우를 하려고 했으니까요.

연극을 지치지 않고 오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원금을 받지 않고 네 작품으로 열 번 넘게 공연을 하다 보니
좀 지친 것도 있어요.
그러다 보면 어떨 땐 이것만 하고 때려 쳐야지 생각도 합니다.
그리곤 공연이 시작되면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가끔 머리가 아프면 연습 중에 가기도 하구요.
반복인 거 같아요.
안 하면 하고 싶고
하면 이것만 하고 그만 해야지 하는

연출가 황선택

벌써부터 이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버티려고 합니다.
바둑 고수가 한 수 한 수 바둑알을 묵묵히 바둑판에 두듯이요.
그렇게 하다보면 좋은 날이 있겠죠.
연극으로 먹고 사는 날도
배우, 스태프에게 페이를 줄 수 있는 날도 오겠죠.
지원금을 받으면 이제껏 고생한 배우 스태프에게 돈을 나눠주고 싶어요.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요즘은 기분이 좋은 편이에요.
상도 받고 제가 조금은 쓸모 있어 진 거 같아서요.

연극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연극이 아닌
이 시대를 이야기 하고
더욱 더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 하는 연극을 만들려고 노력하겠습니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연출가 황선택

황선택(연출가)
주요작품
<형민이 주영이> <무풍지대 로케트> <휘파람을 부세요> 외

태그 연출가 황선택,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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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혁

오세혁 작가, 연출, 배우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에서 작가 연출 배우로 활동중.
트위터 @gulpanart
홈페이지 www.gulpan.com
제75호   2015-09-03   덧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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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섭
멋지네요. 삶이 연극같아요.

2015-09-05댓글쓰기 댓글삭제

리플
가끔은 초중고등학교 개근으로 졸업하고 대학나오고 일을 하는 나의 지난 삶이 후져 보입니다. 셀 수 없는 방황의 날들을 지나 인고의 시간을 거쳐 그 끝에 연극에 가닿은 분들을 보면... 어떤 열등감이랄까요, 그런 것도 생기고요. 황선택 연출님, 앞으로의 연극하시는 길을 응원합니다. 다음 연출님 작품 꼭 보러 갈게요!

2015-09-13댓글쓰기 댓글삭제